그들은 요청하고, 요구하고, 잊는다
큰 조직에서 스타트업에 몸을 던진 지 7년째.
그동안 꽤 많은 대기업, 중견기업, 공공기관과 협업을 진행했다.
협업이라는 이름 아래 초도 미팅을 잡고, 시범사용을 설계하고, 보고 자료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떤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과연 협업이 맞는가.
1차 미팅에서부터 NDA 없이 제품을 보여달라는 건 기본이다.
무료 테스트는 당연한 거고,
몇 달간 시범사용을 “의사결정을 위한 과정”이라며 요구한다.
그리고 중간에 임원 보고가 필요하다고 하면
보고서 목차와 구성안을 스타트업에게 요청한다.
본 도입 얘기로 넘어가면
“우리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너희에게 좋은 기회 아니냐”며
대승적인 차원의 할인을 요구한다.
지방 사업장에 출장 가는 세션비에
기차 일반석 요금과 식비 하루 만 원을 실비로 반영했더니
혹시 더 싼 버스나 기차는 없냐고 되묻는다.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이제는 그냥 익숙하다.
대기업은 그래도 사내 절차라는 이름 아래 일정한 선을 지킨다.
정말 피곤한 건 현금이 많고, 오너 주도로 디지털 혁신을 추진 중이라는 전통 중견기업들이다.
오너가 관심을 보이면
회사가 달아오른다.
대표와 임원이 미팅에 참여하고,
자료 요청도 구체적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대응한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연락이 끊긴다.
메일에도 답이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NDA 체결 전 테스트를 원해
계정을 제공하고,
사후적으로 빠르게 NDA 체결을 요청했는데
한 달 넘게 아무런 응답이 없다.
어제는 상급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변은 이랬다.
요즘 NDA 요청이 너무 많아서 법무팀 검토가 밀리고 있다고.
NDA는 2장짜리 업계 표준 양식이고, 내용도 원하는 대로 적었다. NDA 검토 요청이 얼마나 많길래 몇 달이 걸리는 걸까. 이마저도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이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항상 떠밀리듯 시작하는 초도 미팅의 온도는 뜨겁지만
제품을 보여주고 실제 협업 얘기가 시작되고 의사결정이 필요하고 유관 부서를 움직여야 하는 단계가 되면,
늦어지는 이유가 다양해진다.
임원이 바뀌었다.
방향성 재검토가 필요하다.
담당자가 휴가 중이다.
연말 인사이동이 끝나야 다음 담당자와 논의 가능하다.
법무팀 변호사가 퇴사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공유해주는 곳은 오히려 괜찮은 편이다.
요즘은 그마저도 없이 읽씹과 회피가 일상적이다.
회사 대 회사,
수십 명의 시간과 고민이 오가는 공식적인 관계에서
연락 두절과 무응답이 비일비재하다.
썸을 타는 사이에서도 하지 않을 무례가
협업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판교, 일산, 지방을 오가며
초도 미팅 일정을 잡는다.
언젠가 이 모든 과정이
서로를 존중하는 협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뀌기를 바란다.
협업이라는 말은 함께 일한다는 뜻이다.
책임도 나누고, 결정도 공유하고,
리스크도 어느 정도는 함께 감당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협업은
책임은 없고, 요구만 있는 관계에 가깝다.
이건 협업이 아니다.
일방적 요청이고,
그럴듯한 명분 아래 반복되는 무책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