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번 주에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고향으로 잠깐 내려갈 생각으로 기차표를 끊으러 앱에 접속했다. 첫 화면 대신 팝업창이 띄워지길래 뭐지? 했는데 내용을 보고 아! 싶었다. 세상에, 이번 주가 설 연휴 기차표 예매기간이었어?!
가족들이 설날에 어떻게 할 것인지 종종 물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같았다.
"취직하면 내려가고, 아니면 서울에 그냥 있을래."
아빠는 이런 내 대답을 예상이나 했던 건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원래 취업 준비 들어가면 다들 명절 때 그렇게 안 온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오히려 덤덤한 반응에 내가 놀랐다. 그래도 우리 집 소수로 모여도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고, 할머니, 엄마 뵈러 절에 가는 사람들인데. 이 모든 걸 '취업준비'라는 변명으로 한 해 더 미루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 고향으로 내려가면 가족들과 시간을 좀 보내다 올라올 예정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난 고향에 내려가서도 이력서를 쓸 예정이다.
나는 친가, 외가 통틀어서 막내이다. 내 밑으로 조카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형제자매와, 사촌언니, 오빠의 진로선택 과정을 듣고 보며 자랐다. 문제는, 내 형제자매를 비롯한 친척들의 아웃풋이 굉장히 좋다는 것이다. 안정적인 공직부터 내로라하는 대학교의 높은 학위의 소유자까지 다 한 명씩 있었다. 그리고 막내 바로 앞인 내 하나뿐인 형제자매도 이번에 공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미안하지만 배고픈 예술가의 글을 걷고 있다. 그것도 글 쓰는.
어렸을 때부터 전교 1등은커녕 '전교권'이라는 말은 내게 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나 빼고 다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하더라. 그래서 매년 명절 때마다 나는 곤욕이었다.
"그믐이도 공부 반에서 1등 하나?"
"아유, 얘는 머리가 나빠서 1등 몬한다."
(참고로 경상도)
저 대화를 기억엔 없지만 아마 수십 번은 들었을 것 같다. 이런 질문들을 받을 때면 난처하긴 했다. 막 씻을 수 없는 상처이고 그렇진 않은데, 대답하기 곤란해서 껄끄러웠다. 난 지금 내 대학과 내 전공에 충분히 만족하지만, 내 친척들 중엔 여전히 내 대학이 어디 붙은 대학인지, 전공학과 이름은 매번 어떤 걸 배우는 곳인지 설명해야 했다.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왜냐, 그만한 공부머리가 안 되는 걸 나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주제로 글을 써볼 계획인데, 공부는 내 적성에 안 맞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친척들을 마주치기 싫어 때아닌 명절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나 콩가루 같은 가족사로 하나둘 멀어지다가 이제는 명절에 몇 만나지도 않는다. 그래도 일단 명절에 '친척을 만난다'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기승전취직 질문일 걸 다 알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명절을 쇠는 것도 내 적성에 안 맞다.
2월에도 난 계속 취준생일까, 아님 어디라도 다니고 있을까. 둘 중 어느 것이든 설날은 금방 지나갔으면 좋겠다. 취직을 하더라도 웬만한 곳으로는 아웃풋이라고 쳐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번 주 날짜로 끊은 기차표는 내가 끊자마자 해당 시간대 좌석이 매진되었다. 아마도 내가 마지막 표였던 것 같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이리로 저리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주말에도, 명절에도 집에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중 절반은 나와 같은 취업준비생이 아닐까 싶다.
이번 설은 잔소리 없이 지나가길. 모든 취준생들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