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꽤나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한 회사를 다닌지도 1년이 넘었고, 내가 번 돈으로 적금도 들고 예금도 들었으니, 이제는 부모님의 손을 빌리지 않는 경제적으로도 독립한 '진짜 어른'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물가에 내놓아진 사람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한 달 안에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웃기고 슬프게도 우리 집은 이미 3년 전 엄마의 사망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망진단서를 가지고 동사무소로 가는 그 길이, 마냥 낯설지가 않았다. 사망신고를 하게 되면 고인의 주민등록증은 반납하게 된다. 언니는 이미 엄마 때의 일을 알고 있어서, 사망신고가 끝난 후 내게 미리 찍어준 아빠의 민증 사진을 보내주었다. 간직하라고. 그걸 보며 나는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스캔을 떠 둘 걸 그랬다."
"그러게."
사망신고 이후 언니와 나는 난장판이 된, 그러니까 아빠의 암 재발 이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해 사람이 사는 건가 싶은 본가를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일을 계속 미뤘다. 지금도 미루는 중이다. 아마 둘 다 번아웃이 온 게 아닐까 싶다. 언니는 이제 본가를 팔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본가를 판 돈을 내 서울 전세금에 보태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말하면서 망설였다. 사실 집을 매매하고 정리하는 방법을 모른다. 집을 산 적도, 팔아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 건 더 어른인 아빠가 해왔으니까. 나는 26살을 먹고도 아빠가 여전히 다 해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배워둘 생각도,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서러웠다. 나 아직 이런 일 겪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다니는 회사가 스타트업이라서 그런 건지, 내가 입사한 지는 이제 1년을 갓 채웠을 뿐이지만 벌써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 나는 그곳에서 경력 없이 시작한 쌩 신입이지만, 어느 순간 회사에 누가 있었고 누가 나갔는지, 저분은 어떤 성향인지 얼추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지금 직무가 맞는지, 여기서 내가 경력을 쌓고 있는 게 맞는지 말이다. 그럴 때마다 묻고 싶었다. 아빠는 나보다 사회생활을 훨씬 많이 한 사람이었으니까. 한 회사에서 20년을 근속한 성실한 직원이었으니까. 물어보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더라도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을 텐데.
그런데 아빠가 없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이 숨 쉬고, 크리스마스 때만 해도 언니의 자취방에서 같이 중국집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던 사람이 이제 없다. 같이 지지고 볶았던 엄마와의 시간을 회상하며, 항암약이 안 듣지만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며 얘기하던 사람은 끝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채로 떠났다. 팔다리가 묶인 채로, 지독한 섬망을 보이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지 않고 갔다.
이게 뭐야, 아빠. 이런 건 우리가 원한 게 아니잖아.
엄마가 너무 고통스럽게 가서 아빠는 싫어했다. 다 미련을 두고 가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괴롭게 갔느냐고 나름 속상해했다. 그렇게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으면서, 왜 가는 모습이 둘 다 고통스럽게 닮아있는지 알 수가 없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엄마를 따라 3년 만에 가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나도 좀 힘든데, 사회생활이 내 마음 같지 않는데 물어볼 어른들이 없다. 하나하나 혼자 알아보고 혼자 앓아야 한다는 생각에 버거운 날이 많아진다. 물이 귀까지 차오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