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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믐 Mar 06. 2020

#1 아빠가 암에 걸렸다

암 환우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①


이 글을 시작하기까지


2020년 1월 1일, 엄마의 1주기가 있었다.

2020년 1월 9일, 나의 22번째 생일을 위염에 걸린 채로 보냈다.

2020년 2월 20일, 아빠가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초등학교 이후로 쓰지 않던 일기를 다시 쓰게끔 만든 건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나는 글을 쓰는 행위가 심리치료의 일종이라고 믿기 때문에 지금껏 길고 짧은 여러 글을 써왔고, 그러다가 대학까지 문예창작학과로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그 '지경'을 떠날 때쯤,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에서의 막 학기를 앞두고 있는 2020년 2월, 내 삶은 다시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운수 좋'았던' 날


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보면 그와 같은 상황이 있지 않나. 방학이라 할 일도 없고, 면접을 본 곳은 예감이 좋고, 남자 친구와 곧 100일을 앞두고 있고, 비록 코로나가 창궐해 집에만 있어 우울한 나날이었지만 세상에 불만은 없는. 당시 나는 고향이 아닌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 소식은 친언니(이하 '언니')를 통해 들었다. 아무튼 그런 날에 나는 한 통의 카톡을 받는다. (쓰고 보니 '한 통'이라는 표현은 현시대에 맞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던 조직검사 소식을 듣던 날(2/17, 왼쪽), 청천벽력 같던 암 소식을 듣던 날(2/20, 오른쪽)

집안에 암 내력이 있다면 '조직검사'라는 말은 치가 떨리게 익숙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엄마가 암 투병을 10여 년 가까이하다 하늘나라로 간 지 이제 막 1년이 지난 시기였다. 그런데 운명은 무심하게도 아빠 차례라고 했다. 조직검사 소식을 듣던 날 단언컨대 드라마 내레이션이나 소설 속 한 대목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방황 하'는 순간이 내겐 없었다. 그저 '아... 그렇구나...' 했을 뿐이다. 물론 처음 소식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사실 매우 놀라서 부정맥이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하루 만에 곧 안정을 찾았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연락(왼쪽 사진)을 받을 당시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큰일이 아니길 비는 것 밖에 없었다.



당신은 암입니다.


2020년 2월 20일, 아빠는 고향의 개인 내과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사실 여기까지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검사 결과를 처음 들을 당시(2월 19일), 검사를 담당한 의사가 휴진이라 다른 의사에게 결과를 들었는데, 그때에는 '직장암'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대장암을 포괄적인 의미로 묶었을 때 직장암을 포함시키긴 하지만, 당시 결과를 듣고 직장암에 대해 네이버 검색창을 쉼 없이 쳐봤던 것을 생각하면 착오가 있었던 의사에게 약간은 서운하다. 결국 20일 날, 아빠의 검사를 맡았던 의사에게 비로소 '대장암'이라는 사실을 들었다고 한다. 착각이나  작은 실수에도 하루의 기분이 달라지는 암 환우와 그 가족들이었다.


아빠는 건강검진과 친하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2년마다 돌아오는 건강검진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받곤 했다. 그렇다, 건강검진을 받더라도 내시경을 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미루다 겨우 대장 내시경을 받은 것은 작년에 항문이 아파서 받은 이 전부인데, 그것도 약을 먹고 대장 전부를 비우는 것이 아닌, 에스결장(구불결장)까지만 받은 내시경이었다. (에스결장에 대한 이해는 맨 아래의 그림을 참고해달라.) 언니에게 듣기로는 아빠가 20일 날 언니 앞에서 고백하시길, '대장 내시경을 제대로 받은 지는 10년이 넘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암이란 것이 작년 내시경에서 발견되지 않았어도, 올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 발견될 수 있는, 변수가 많은 존재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와 언니가 좀 더 잔소리 폭격을 해서 미리미리 내시경을 받도록 아빠를 설득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어쨌거나 엎질러진 물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성적으로 다음 일을 언니와 의논하는 것이었다. 나의 언니는 본디 이성적/합리적인 사고방식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이라, 20일 날 내시경 검사를 들으러 병원에 갔다 온 후 그 내용을 정리하여 나에게 PDF 파일로 보내주었다.


병원에 다녀온 후 브리핑이라는 제목으로 내게 온 파일. 여담이지만 언니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파일 안에는 아빠의 대장암 위치, '의사와 아버지의 문답', '대장암 명의 자료(신문기사 스크랩한 것)' 등이 담겨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언니 역시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엄마가 투병할 때에 정신없이 지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이 얘기는 차차 올릴 예정이다), 오히려 나보다 더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언니는 파일 끝부분에 어떤 병원의 어떤 의사로 예약을 잡을 것인지 나와 상의를 해보랬다는 아빠의 당부를 덧붙였다. 아빠가 조직검사를 받고 암 판정을 받는 동안 아빠랑은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아빠도 아마 아픈 것에 대해 짐이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뚝뚝한 딸내미의 표본인 나 역시 아빠에게 따로 연락을 드리진 않았다. 죄송하게도, 그리고 여전히 어느 정도는 현재 진행형으로, 놀라고 무섭다기보다 현 상황이 피곤하고 원망스러웠다. 언니의 파일을 받고, 내용을 살펴보고, 병원 예약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엄마의 1주기를 보낸 지 한 달 하고도 20일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은 그러했다.

브리핑 파일 내용 중 일부분. 새삼 대장을 저렇게 많은 부분으로 나눠 설명한다는 것에 놀랐고, '상당히 진행된 대장암'이 아빠 몸속에 있다는 것에 또 놀랐다.


이 글을 쓰는 시기는 코로나 19가 창궐하여 병원 방문이나 예약이 어려운 기간이다. 병원 진료, 예약 등 뒷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병원 예약이 예상보다 지연되고 있어 현재로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아빠의 진료나 검사, 수술 등의 이야기는 시간이 꽤 흐른 후 상황이 모두 정리가 되면 그때 이야기를 푸는 것으로 할 예정이다.

이 글 이후로 당분간은 내가 겪은 암에 대한 기억, 경험, 감정 등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려고 한다. 코로나 19 확진자를 비롯하여 모든 환자분들이 적재적소의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첫 번째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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