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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믐 Mar 06. 2020

#2 엄마의 다른 이름, 000 환자

암 환우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②


나의 주마등, 나의 엄마


앞선 이야기에서 간간히 엄마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었다. 글의 첫머리만 읽어도 알아챌 수 있듯이 나의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신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과 함께 1년 여가 지나 담담해졌을 뿐이다. 아무튼, 더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왜 엄마의 이야기를 언급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어느 정도의 확률을 이루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도 암으로 돌아가셨다. 자궁암을 거쳐 췌장암까지, 도합 10여 년의 투병이었다.

대학병원에서 마지막 한 달을 보낼 당시 엄마의 손


중학생 때의 기억


이제 나도 10년 전의 기억이란 게 존재할 만큼 나이가 들고,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가 없는 성인이자 막 학기 대학생이다. 10년 전이라고 해도  중학생 때의 기억이라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특히 중학생 시절,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깊숙이 인지하게 된 그 날의 기억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다들 알다시피 중학생은 저녁 시간 이전, 늦어도 저녁 시간쯤에는 하교를 한다. 그 날도 그런 보통의 날들 중 하나였다. 기억하기로는 꽤 더운 여름이거나 여름 막바지였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다만 달랐던 것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엄마가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내 인기척을 듣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안방 문도 닫혀있어 이 추측은 신빙성을 더하고 있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안방 문을 열며 '엄마!'하고 불렀다. 그런데 서 있는 내 시야에는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바닥에 엎드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건 큰일이다!'싶은 감이 들고, 중학생 입장에서 무척 무서웠던 것 같다.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고, '엄마... 엄마 왜 그래... 엄마 어디가 아파...' 이런 말만 반복했다. 여기에 더하자면 답답한 마음에 '왜 병원을 안 가고 이러고 있어!'라고도 했다. (자주 생각하지만 당시 내가 한 말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엄마는 그렇게 체감상 몇십 분은 그렇게 있었다. 사실 그 이후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힘든 나머지 지워버려 군데군데 끊어져있다. 통증이 서서히 사라진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생활을 했고, 그럼에도 당신도 이상한 점을 느꼈기에 얼마 안 가 병원에 가 진료를 받았다.

그 길로 엄마는 자궁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엄마와 아빠는 언니한테는 모두 말해줬을지 몰라도 내겐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부분이 사춘기 시절 불만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부모님의 아쉬운 선택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택으로 지금의 나는 당시 엄마가 자궁암인지, 자궁경부암인지, 암이라면 몇 기인 지, 앞으로 몇 년을 내다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듭 물은 질문 끝에 자궁 쪽에 20cm~30cm에 달하는 암 덩이리가 있고 이게 장기를 눌러 그만큼 고통을 유발했을 거라는 것 정도를 알아냈을 뿐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단계, 울기 - 울기- 울기


미성년의 나는 누가 놀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울보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내 울음의 역사(?)는 꽤 길다고 답할 수 있을 정도다. 어릴 땐 다들 울지 않냐,라고 묻는다면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울보라고 답하겠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땐 학급에 적응하지 못해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고 울면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누가 말만 걸어도 무섭다고 울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무턱대고 울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대화를 잘 못했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얘 이러다 사회생활 못한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도 스스로 느끼기에는 사회성이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머리가 어느 정도 큰 이후로는 남들이 보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우는 걸 더 선호하게 되었다. 어린 날의 내가 느끼기에도 세상은 아예 안 울고 살 순 없어 보였기 때문에 나름의 타협을 한 것이었다. 이런 성격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즉, 내 학창 시절은 남몰래 우는 것이 버릇이었던 것이다.

성격이 이런 만큼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한 장의 CD(듣기로는 CT를 찍은 영상이라고 했다.)를 통해 확인이 되자,  허구한 날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을 들을 때도 자꾸만 눈물이 나 맨 앞줄에 앉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물론 선생님은 수업 중 당황하셨을 것 같다.) 공중파 다큐멘터리로만 보던 암환자가 우리 집에도 있다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슬펐다. 그때 내 고정관념은 '암=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암 덩어리가 30cm에 육박한다니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고통을 글로 승화하기?!


이 글의 초반부에 엄마의 암은 자궁암과 췌장암의 두 가지였다고 언급했었다.

엄마는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은 뒤 몇 년 간은 별 탈 없이 추적관찰을 하며 완치 판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암치료로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자랐으며, 살도 잘 찌워나가며 여느 평범한 50대의 체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배 안 쪽이 아프다고 하였다. 처음에 우리 가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미 3년~4년 아무 전이나 재발 없이 지내왔기 때문에 더 이상 병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반복적으로 통증을 호소했고, 이제 시간이 지나 몇 달에 한 번씩만 만나는 주치의에게도 이 점을 어필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개강을 앞두고 서울에 있는 학교 기숙사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고 별생각 없이 개강 후 첫 소설 창작 수업을 앞둔 때에 벼락을 맞게 되었다.


그날따라 꿈자리가 사나웠다. 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이상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받지 않았고, 연거푸 전화를 걸자 갑자기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엄마는 이미 대학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하고 회복 중이었다. 췌장 쪽에 작은 혹 같은 것이 보여 조직검사를 맡겼다고 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일단 알겠다고 하고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로 향했다. 별 일이 아닐 것이라 바라던 나날이 흘러 나는 문학비평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엄마의 췌장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투병은 내게 글을 쓰게끔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지금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고, 엄마의 조직검사 얘기를 들은 날에도 엄마에 관한 소설을 합평받는 수업을 앞두고 있었다. 또 그때 당시는 교지편집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이라 그 해 교지에도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실었다. 연말에는 교내 창작 공모에 엄마에 관해 쓴 에세이를 제출해 수필 부문 수상을 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글을 전공으로 하는 학과에 다니면서도 에세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복잡한 내 심경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다 여러 편의 에세이로 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누군가는 이럴 시간이 있다면 가서 엄마 손을 한 번 더 잡아드리지 그랬나 하고 토로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나는 나쁜 딸이었음을. 다음 편에 이어서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엄마의 힘듦을 고려하기엔 내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해 교지에 실었던 내 에세이 편집용 중 일부분이다. 이 에세이에는 항암치료에 대한 감정도 함께 있다. 그렇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엄마가 췌장암 판정을 받은 그 해 교내 창작상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쓴 수필로 상을 받게 되었다. ⓒ사진은 학과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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