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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믐 Mar 06. 2020

#3 엄마를 보내고 아빠의 차례에서

암 환자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③


마지막 한 달, 그 후


엄마의 투병이 다시 시작된 이후 나는 줄곧 글쓰기에 매달렸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엄마는 서 있는 시간보다 앉아있는 시간이, 앉아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 수술과 항암치료를 수차례 거쳤다. 그리고 판정 다음 해 하반기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배에 물이 차 불러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물이 차오르는 배를 제외한 다른 모든 몸의 부분에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은 진즉 다 빠졌고, 살과 근육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걸 나는 매일 눈으로 좇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감정을 상기시켜 보자면 극도의 무기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어 당시 종강하기 전임에도 공부, 과제, 학생회, 교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언니가 카톡으로 엄마의 시한부 판정 사실을 알린 것이다. 그때의 나는 학과 세미나실에서 친구와 만나 다른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보단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슨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말을 왜 내가 들어야 해? 이 생각이 컸다. 결국 그 날을 기점으로 나는 당시 내가 하던 활동 중 상당수를 정리해야 했다. 연말이라 기말고사를 일주일 남겨둔 상황이었지만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학교의 2인실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울고 싶었으나 룸메이트 언니가 있을까 봐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눈물을 꾹 참고 언니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던 것 같다. 울다가 잠들고 20시간 가까이 잠만 자다 다시 일어나서 우는 것을 반복했다. 이전까지 나 스스로는 덤덤하게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 분출구를 '글쓰기'로 정해 열심히 내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글만 쓸 줄 알지 엄마를 낫게 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딸이 되어 있었다.


일일이 지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기엔 힘이 부쳐 인스타로  힘든 상황을 전달했었다.

 



미안해 무서워서 그랬어


엄마가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 내 생일이 4일 지난 후, 엄마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무렵 나는 엄마가 무서운 존재로 남아있었다. 화를 많이 내고, 짜증을 많이 내고, 언니를 더 많이 찾는 어린아이로 변해버린 엄마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더 많이 잡아드리지 못했고, 학교를 핑계로 더 자주 내려가지 않았고, 원래 무뚝뚝하다는 변명으로 엄마와 마지막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벌이었을까, 엄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언니를 유독 더 많이 불렀으며, 언니 손을 더 많이 잡으려 했다.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엄마... 미안해... 무서워서 그랬어... 그냥 다 무서워서 그랬어... 미안해..."


엄마가 내 얘기를 들었을진 모르겠다. 이미 내 목소리는 울음에 너무 젖어있었고, 엄마의 목소리는 객혈에 잠겨 갈라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엄마가 보고 싶어 간병 당번을 하러 가는 언니를 따라 아빠와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함께 향했다.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아빠에게서 엄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급히 갔었다. 엄마는 이미 병실에서 나와 집중치료실에 베드를 옮긴 뒤였다. 쉼 없이 오르내리는 맥박과 산소 포화도가 오늘 내에 끊어질 거란 담담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하나 둘 엄마의 손을 잡으며 하고 싶었던 마지막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 날의 기억은 생생하면서도 아득하다. 중간중간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의 통곡을 듣고 눈물을 훔치던 간호사와 급하게 엄마를 보러 온 주치의의 허망한 얼굴, 와중에 장례식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빠의 얼굴이 번갈아 지나치던 것 등등이다.


엄마는 그 날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엄마가 입원한 병원 앞 일몰. 언니와 함께 달이 참 예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암'이라니


지금도 나는 엄마에 대해 후회와 안도의 생각을 함께하며 산다. 엄마에게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엄마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의 생각. 후자는 자기 합리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는 진정으로 엄마가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을 테니 편안한 생활을 하시라고, 그렇게 빌었다.

그로부터 꼭 1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아빠가 투병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그것도 엄마와 같은 '암'이라는 질병으로. 집안에 암 환자가 또 생기니 이제는 처음부터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가 내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이렇게 같은 상황에 또 처했다면, 다시 써보고 싶었다.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컸고, 암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많으나 그 가족, 보호자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감정에 더 충실한 이야기는 많이 보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그래서 앞으로 쓰는 글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내 글을 통해 한 명이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쓰기로 마음먹었다.  


'암세포도 생명이잖아요.'와 같은 어느 이상한 대사 말고, 직접 겪고 전하는 위로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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