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엄마는 자궁암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완경이라는 과정을 겪지 못했다. 당시 엄마 안에 자리 잡은 암 덩어리는 20~30cm 정도였고, 그걸 다 제거하기 위해서 자궁까지 들어내야 했다. 첫 번째 암을 겪은 뒤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여자가 아니다.”
그때에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의 엄마가 아프지 않은 게 중요했고, 엄마가 아프지 않음으로써 집안이 화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여성 생식기관의 유무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교복 입는 학생이던 어느 날 엄마와 집 근처 마트 앞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이 엄마가 아프고 난 뒤였는지, 이전이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엄마는 집 근처이니 말 그대로 편한 반소매 티와 편한 바지를 입고 나왔다. 내가 이상함을 느꼈던 건 엄마와 가까이 마주 서고 나서였다.
“엄마, 브래지어 안 했어?”
“어, 왜?”
엄마의 가슴이 눈에 띄게 처져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때가 엄마가 갓 50대로 진입한 시기였었나. 여름이었고, 더웠고, 집 앞이었고, 그래서 엄마는 원래 하던 속옷을 그날따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탄력을 잃은 가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데에 내 탓도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리고 싶었고, 그 뜻을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신했다. 엄마는 내가 그런 말을 해서 기분이 나빠 보이기보단 정말 그런가 싶은 표정으로 아래를 자꾸만 내려다봤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엄마는 날 보며 말했다.
“야야, 네 말마따나 엄마 가슴이 너무 처졌다. 그렇지?”
딸이 했던 말을 계속 곱씹어 보면서 방에서 나올 때까지 거울 앞을 서성인 듯했다. 나는 또다시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 집에선 안 해도 밖에 나갈 땐 하고 나가.”
그래야겠다며 내 말에 바로 수긍하는 엄마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엄마가 나이 들어 겉모습이 달라진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엄마는 그 뒤로는 아무리 더워도 외출할 때 속옷을 꼭 챙겨 입고 나갔다. 그걸 볼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를 계속 먹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렇듯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한다. 나는 그때 사춘기에 살도 찌고 있어서 외적인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런데 엄마에게 늙어 보인다는 소리를 했고 엄마는 그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실은 엄마도 젊어 보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실제 나이가 장년층을 향해가도 자식에게만큼은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가 알아서 자신을 다듬고 꾸미며 다니길 바랐다. 누구 때문에 못 꾸미고 다니는지, 거기까지 생각을 하기에 나는 너무 모자랐다.
나와 같은 여자였던 엄마는 이후 하나둘 몸의 기관을 잃어갔다. 자궁부터 대장까지 10여 년에 걸친 투병은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삶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여자가 아니다'는 말은 아픈 엄마를 볼 때면 두고두고 날 찾아와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엄마는 그때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할까. 적어도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던 내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만약 기억한다면, 그날의 나를 미워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난 그냥 엄마가 늙는 게 싫었다. 노화는 이별을 끌어오는 과정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더 붙잡아 두고 싶었다. 미워해도 옆에 두고 미워하고 싶었다.
그땐 엄마가 영원히 예뻐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 예쁨은 다름 아닌 딸인 내가 지켜줘야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곁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