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숙사 생활
나는 20살 때부터 학업 때문에 타지에서 살았다. 그 뒤로 타지에서 기숙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본격적으로 자취를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내가 매 학기 짐을 싸고 기숙사 입주 날이 다가올 때면 잔소리가 심해졌다.
급하게 싸다가 뭐하나 빼먹지 말고 미리미리 싸 둬라.
이불은 택배로 부치면 하루 만에 안 갈 수도 있으니까 손에 들고 가라.
저렇게 덜렁거리는 애가 그 먼 데서 혼자 살 수 있으려나.
초, 중, 고 모두 집에서 다닌 탓에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와 화장실을 같이 쓰고, 불 끄는 시간도 맞춰줘야 하는 삶이 상상만 해도 불편했다. 내가 새로 만날 룸메이트 걱정에 빠져있을 때, 엄마는 그저 내가 당신 없이 밥을 굶지나 않을지 걱정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엄마는 내가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울면서 전화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고 했다. 아무리 첫 기숙사 생활이라도 그때의 나는 20살 성인이었는데 말이다.
막내딸이 걱정은 되지만 직접 갈 수는 없고, 신경은 쓰이고. 그래서 엄마가 내린 결단은 다소 특이했다. 내가 첫 택배 박스를 싸고 있을 때 집안에 곳곳에 박혀 있던 인형들을 모조리 꺼내와 박스에 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맡에 두고 잘 인형 하나 정도만 챙겨가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인형 하나를 챙기는 모습을 보고 가만있어보라며 이것도, 저것도 가져가라고 숨어있던 인형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어릴 적엔 잠자리에 인형을 빙 둘러싸 놓고 지냈으나 머리가 좀 더 크고 나선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던 인형들이었다.
인형 하나를 박스에 넣을 때는 엄마가 당연히 잔소리할 줄 알았다. 챙겨가야 할 짐도 많은데 인형은 뭐 하러 챙기냐, 네가 애냐, 등등. 그런데 예상 밖으로 엄마는 손수 한 박스를 전부 인형으로 채워주었다. 정말 박스 하나는 인형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처음 혼자 떨어져서 자는 건데 외로워하지 말고 얘네랑 같이 자라.
엄마가 순수한 사람으로 보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20살, 당신 눈에는 아직 작고 어리기만 한 딸이 타지에 나간다고 했을 때 순수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돈보다 새 옷보다 당장 내가 무엇을 더 필요로 할지 엄마는 알았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무엇이 필요했는지 알아챘던 순간이 있었나. 아니, 엄마도 무엇이든 필요할 순간이 올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이란 걸 나는 끝까지 몰랐다.
엄마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에서 떨어진 곳에서 선생님으로 일을 했다. 3년여의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부조리가 심해 더 있지 못하고 관뒀다고 했다. 엄마가 아직 나를 만나기 전, 그날의 그 곁에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줄 사람이 없었다. 가족들, 그러니까 나의 외가는 당시 먹고살기가 바빠 6남매였던 엄마의 형제 중 몇 명만이 대학에 진학하고 다른 사람들은 생계를 뒷받침해야 했다. 엄마는 운 좋게 대학에 진학한 몇 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회로 나간 후에도 힘들다며 어디에 말할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엄마는 더 순수했을 것이고, 그러니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만이 남아있을 테니까.
나는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학비가 비교적 저렴한 대학에 진학했다는 자부심 하나로 모든 지원을 받았다. 또한 나는 엄마가 병원으로 길게 떠나던 날 어떤 짐을 싸 갔는지 모른다. 몇 가지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지, 다음 진료 예약일이 언제이고 무슨 검사를 받는지 하나도 몰랐다. 20살을 기준으로 비교해도 나는 엄마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군가는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내 인생은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내게는 원망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몇몇 경우에는 정말로 그래 보였는데도 이상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하지 않고 한 번으로 그쳤다. 그냥, 지금은 미워하겠다고. 먼저 떠난 것도, 아빠랑 그리 화목하지 못했던 것도,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던 것도 아직 남아있으니 원망하겠으니 말리지 말라고 속으로 말했다. 한 박스 가득 인형을 채워주던 모습은 사실 암이 재발하기도 전, 그러니까 내가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시기가 오기 전의 엄마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