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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믐 Dec 16. 2020

야근, 그 낭만에 대하여

서울은 야경이 예쁘니까요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느는 건 '그러려니'하는 마음가짐이다. 


상사가 화를 내도 그러려니, 일을 하다가 잘 안 풀려도 그러려니, 실수해도 이제는 3주 전보다는 죄책감이 덜 든달까. 어쩌겠어, 입사한 지 얼마 안돼서 아는 게 없는데. 이미 지나간 일은 그냥 흘려보내고 다음번에 더 잘해야지 뭐.


일이 점차 익숙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중간중간 새로운 일을 배당받으면 당황하는 건 여전하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것도 여전하다. 그래도 업무를 완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시간이 오래 걸릴 때면 야근을 하게 된다. 이제는 이 야근을 좀 좋아해 보려고 한다.


오늘의 야근은 일이 많아서 했다기보다 컨펌받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미리 업무일지를 쓰고, 다른 잡무를 처리해도 최종 컨펌까지는 좀 험난했다. 세세한 부분을 수정하다 보니 시간은 이미 7시를 넘고 있었다. 결국 초과근무를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어 봤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혼자 업무를 마무리짓고 불을 끄고 퇴실하려니 기분이 신기했다. 되게 열심히 일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쓸쓸함도 들었던 것 같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런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꼈다. 


사실 그렇게 길게 야근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동기들과 함께 가던 퇴근길을 이번엔 혼자 갔다는 점에서 기분이 새로웠다. 날씨는 어제처럼 추웠고, 차라리 즐기자 싶어서 지하철역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바람 계속 맞으면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으니 꼭 모자를 쓰자) 강남의 중심은 높은 건물이 나란히 서있고, 밤이 되면 건물의 불빛 때문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건물마다 회사 로고가 크게 크게 박혀있고, 상징색으로 빛난다. 


한때는 저런 높은 건물을 드나드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다 필요 없고 그냥 나랑 맞는 회사를 다니는 게 최고인 것 같다. 


길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로수에 꼬마전구를 감아놨다. 퇴근길에 반짝이는 큰 나무 몇 그루가 보이면 지하철역이 다 와간다는 신호다. 도로 위 차들은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나서인데 쌩쌩 달리고, 인도에도 사람이 얼마 없어 안 그래도 넓은 곳이 더 넓어 보인다. 그나마 거리 위 남아있는 사람들은 추워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바삐 걸어간다. 서울에 살기 시작하며 느낀 건 여기 사람들은 걸음이 다소 빠르다는 것이다. 소위 잰걸음이라고나 할까, 걸음을 재촉하는 삶에 익숙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서울살이 5년 차인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도 다들 바쁘게 사는구나 싶어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일을 하면서 장단점을 꼽자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는 부분에서 장점이고, 야근이라도 하는 날엔 저녁이 통째로 날아간 삶을 살게 된다는 부분에서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대학 다닐 때는 돈을 내면서도 밤새 무언가에 열중할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돈을 받는데도 늦게까지 일하는 건 꺼려진다. 그래도 오늘 야근한 덕분에(?) 서울의 야경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감성적인 순간을 때때로 가지지 않으면, 내게 있어 사회생활은 좀 더 삭막한 것이 될 것 같으니 종종 가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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