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 있다.
3주의 시간 동안 터득한 건 상사가 날 찾지 않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일단 날 호명한 순간, 확률은 50:50으로 나뉜다. 새로운 업무를 받거나, 이전에 한 업무가 엉망이라고 혼나거나. 신입사원 입장에서는 둘 다 좋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어떤 때는 이틀 연속 불려 가 혼이 난 적이 있다. 하루는 업로드까지 완료한 업무의 퀄리티가 엉망이라서 혼났고, 하루는 할 게 이렇게 많은데 왜 결과물은 이것밖에 없느냐고 혼이 났다. 이번 주는 그래도 혼나지도, 싸우지도 않고 무사히 지나가는 중이지만, 상사가 내가 있는 사무실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무섭다. 상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에는 걱정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혹시 날 부르러 오신 건가?'
'어제 한 일 중에 또 잘못한 거 있나?'
'내가 노는 것처럼 보이나?'
어제는 그냥 업무를 주러 오신 건데 온갖 생각 때문에 상사가 들어옴과 동시에 바짝 긴장해버렸다. 앞으로 나는 컨펌받는 일이 일상일 텐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나 싶다. 그리고 전공병 아닌 전공병처럼 나는 사람들의 비언어적/반언어적 표현을 무척이나 신경 쓴다. 그 '사람'이 직장 '상사'라면 더 그렇다. 퇴근할 때 꼭 사무실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가는 게 루틴인데, 문을 똑똑 두드렸을 때 안에서 들리는 "네"의 높낮이와 톤, 내가 "퇴근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어, 그래" 혹은 "수고했어요"하는 대답의 부드러움 정도를 너무 분석하려 든다. 어제는 웃으며 "수고했어요"였고 오늘은 웃으시진 않고 "그래요"였나, 아무튼 그랬다. 결론은 오늘은 퇴근할 때 상사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는 것이다. (또 내 업무량이 너무 적었나?)
이번 주는 상사를 정말 최소한으로만 마주쳤다. 이제 어느 정도 내가 임의로 판단해 진행하는 일도 있는지라 개별적으로 컨펌받은 적도 없어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마주치지 않으니 내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혼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애초에 그런 여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너무 크다. 그래서 상사가 사무실 근처에 오지 않는 날이면 기분이 좋다. 실은, 기분 째진다.
흡사 게임과도 같다. 00 피하기, 탈출하기. 왜 그런 이름의 게임들 있지 않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게임 유저가 된다. 퇴근시간까지 9시간 동안 장기적으로 펼쳐야 하는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미션 1: 9시간 동안 상사에게 불려 가지 않기
미션 2: 틈새 업무 진행하기
미션 3: 상사에게 출/퇴근 인사하기
미션을 하나하나 클리어하다 보면 돌발 미션으로 야근을 하는 날과, 순탄하게 게임 클리어해서 칼퇴하는 날로 나뉜다. 어제는 전자였고, 오늘은 후자였다. 내일은 어떻게 끝날까.
이렇다 보니 나름의 스릴을 가지고 회사에 출근한다. 9시간 동안 사무실 안에서 큰소리 없이, 혼나는 것 없이, 업무량도 적당하게 하기를 매일 기도하면서 회사로 향한다. 상사는 알고 있을까. 그래도 10시 업무 시작 전에 미리 업무를 시작하는 나를. 내가 상사 1의 업무뿐만 아니라 상사 2의 업무도 맡고 있음을 말이다.
(※자매품: 교수님은 우리가 본인 수업만 듣는 줄 알고 과제를 주신다.)
게임 유저 정그믐은 내일도 출근한다. 주 5일, 하루 9시간의 게임 대장정이지만, 차라리 게임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녀야 더 즐겁게 다닐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내일은 금요일이다. 불타는 금요일인 만큼 내가 불탈 정도로 일하는 게 아니라 업무가 불타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