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번째 이야기
돈, 돈, 돈. 어릴 적부터 집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를 떠올리자면 단언컨대 이 한 글자의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돈이 원수이건 세상의 전부이건, 혹은 그 둘 모두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끈적이는 것에서 결국은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리 같은 신세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가끔 ‘ㄷ’,‘ㅗ’,‘ㄴ’의 집합체인 그것은 내게 어떤 기운을 풍긴다.
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나는 S은행의 장학생이 되었다. 수능이 끝난 이후 나는 여러 곳에 ‘저의 등록금을 내어주실 고마운 곳을 찾습니다’라는 신청서를 제출했고 그중에서 S은행이 서울로 진학한 나를 지원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장학생 발대식이 열리던 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신규 장학생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우리 모두는 서로의 배경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기에 어쩐지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 같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 그곳은 어떤 것이 부족하게 혹은 없이 자라온 아이들이 선택받은 자리였으며 동시에 내가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100명 넘게 한 자리에서 마주한 날이기도 했다. 왜인지 더 삐그덕 대고 기가 죽어 쭈뼛쭈뼛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멍한 날의 내가 떠올랐고 그 순간 그 공간을 휘감는 시큰하면서도 쿰쿰한 기운 때문에 코 끝이 찡했다. 그것의 부재가 사람에게 남기는 어떤 기운이, 그래서 어쩌면 세상이 그토록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날 그 안에서 생경하게 느꼈다.
장학생이 되어 내가 얻은 또 하나의 혜택은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서 멘토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학원에 다닐 수 없는 형편의 아이들에게 영어 과외와 멘토링을 했고 그의 대가로 활동비를 받았다. 그리고 그 활동비는 내가 서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생활비가 되었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로 간 날이 떠오른다. 도봉구 소재의 한 고등학교, 오랜만에 고등학교 교정에 들어가니 남자아이들이 늦은 시간까지 공을 차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의 내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그리고는 3층까지 계단을 올라 학교 선생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반으로 향했다. 당시 고2였던 여자아이 2명이 나를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하는 것을 좋아했던 민지, 수줍음이 많았던 소희. 아이들은 분명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남자 대학생이 와서 자신들에게 공부를 알려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전해 들었을 터였다. 그리고는 그들이 마주한 나. 잘생긴 대학생 오빠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여고생들은 대놓고 실망감을 표출했다. 얘들아 미안해,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 과외선생님이 아니야. 그래도 이 점 덕분에 나는 오히려 아이들과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원래 마음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나.
그렇게 이후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로 갔다. 수업을 진행하고 멘토링을 했고 아이들과는 더 친해졌다. 아이들은 나에게 김태우를 닮았다고 했다.
“선생님, 저는 수능 끝나면 바로 쌍수할 거예요”
민지는 어서 빨리 수능이 끝나길 기다리며 그 이유를 덧붙였다. 아이들은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빨리 취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씩씩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다독였다. 그게 공부건 일이건, 나는 그저 아이들이 삐그덕 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김태우 닮은 꼴인 내가 뭘 알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아빠의 자식을 검증이라도 받는 것 마냥 아빠를 따라서 군대를 면제받았다. 아빠의 사유는 ‘국민학교 졸업장만 있는 못 배운 놈’이었고 나의 사유는 ‘그런 아빠가 곁에 없음’이었다. 부는 대물림된다던데, 군 면제도 대물림되는지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대학교 2학년 때 최종적으로 입영 면제를 받기 위해 광주에 있는 전라남도 병무청으로 내려가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광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그곳으로 향했다. 광주, 예전에 고모가 나에게 넌지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 엄마가 지금 광주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
그렇다. 광주는 그런 곳이었기에 입영 면제를 받으러 내려가는 그 길이 조금은 싱숭생숭했다. 병무청에 도착해서는 입영 면제 심사관과 독대를 했다. 그는 나에게 티백녹차를 권했고 컵 안에서 푸석한 향이 올라왔다. 이 과정도 ‘면접’이라는 게 필요했고 나는 그에게 대학교 면접을 볼 때처럼 그리고 장학생 선발 면접을 볼 때처럼 말을 이어갔다. 매 번 하던 이야기, 나의 어린 시절들. 그런 이야기들은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이럴 때마다 꺼내야 하는데 그때마다 당시 살았던 단칸방의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어디선가 올라오는 것 같아 머리가 띵했다. 나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그가 나에게 말했다.
“자네의 이야기를 잘 들었네. 훌륭하게 커줘서 고맙네”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 만약 군 면제가 된다면 자네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학업을 빠르게 마친 후 바로 취업해서 돈을 벌 생각입니다”
“그래, 좋은 생각일세. 응원하겠네”
그렇게 모든 과정을 끝내고 다시 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버스는 중간에 천안 키다리 휴게소에 정차했는데 나는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호두과자를 사 먹는 것을 빼먹지 않는 아이였다. 그날도 3,000원에 10알이 들어있는 호두과자를 샀다. 고소한 향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그렇게 군 면제를 확정받고 이후 한 학기도 쉬지 않고 졸업을 향해 달려갔다. 같은 시기, 나의 대학 동기들은 해외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거나 혹은 전문직 시험을 준비했다. 우리 과에는 의사나 약사를 준비하는 동기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런 것들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랬고 아빠가 그랬듯 원수이자 전부인 그 끈적한 것을 최대한 빨리 벌고 싶었다.
어차피 전공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주식투자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주식이란 게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터였다. 그렇게 2년이 넘는 학회활동 경력을 녹여 대학교 4학년 때에는 수 십 개가 넘는 회사에 취업서류를 제출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S은행의 장학생 그리고 어쨌든 2년이 넘는 금융과 관련된 학회활동, S은행으로의 취업이 보장된 길 아니야. 물론 나도 합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예상외로 냉정했다. 4년 동안 장학금을 주며 기른 나를 서류 전형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결과를 통보받은 그날은 어렴풋이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칼 같은 사람들. 아 물론, 농담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2곳의 회사에서 최종 합격을 통보받았다. 하나는 L통신사였고 다른 하나는 S은행의 경쟁회사였던 K은행이었다. 나는 두 곳 중 고민을 하다가 연봉이 더 높았던 K은행에 입사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빠른 취업의 목표가 그것 아니었나.
그렇게 나는 4년 동안 한 스승 밑에서 무공을 전수받고 결과적으로는 그 스승의 원수 밑으로 들어간 훈련생 심정으로 K은행 신입행원 연수원에 들어갔다. 수 백명의 동기들 중에서 23살의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다. 특히 동기 형들은 이런 나를 신기하게 여기며 이렇게 자주 묻곤 했는데.
“23살에 취업? 너 군대는 다녀왔어?”
“형, 저 군 면제예요”
“면제? 뭐 때문에?”
“아… 저 어릴 때 운동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이야, 너 같은 애가 군대를 가야지 하하하”
사실대로 말하면 동기들이 불편해할 것을 걱정했기에, 나는 늘 그렇듯 준비한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나는 주기적으로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동기들은 이런 나를 초반에는 신기하게 보다가 점점 익숙하게 대했는데 여기에는 23살처럼 안 보였던 나의 노안이 한 몫했다. 동기들과의 괴리감을 줄여준 나의 유전자에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덕분에 산전수전 다 겪을 필요도 없었어.
2달간의 연수원 생활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우리 모두는 밤을 새우는 구보 활동을 하고 있었고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새벽이 되었다. 그렇게 새벽 6시쯤이 되었을까, 여기저기서 휴대폰 알림음이 들렸다. 동기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나도 휴대폰을 보았다. 나의 첫 월급, 청량한 새벽공기와 함께 그것은 내 휴대폰에 알람을 남겼다.
은행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나는 지점에서 모출납 업무를 담당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신입들이 거쳐가는 일이자 지점의 모든 돈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ATM에 돈을 채우거나, 금고에 쌓여있는 돈다발들을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가져오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돈을 만졌고 하루에도 몇 억, 몇 십억이 넘는 돈이 내 손을 지나쳤다. 그렇게 하루 종일 지폐를 만진 내 손은 일이 끝날 때쯤이 되면 정말로 끈적해져 있었다. 돈은 정말로 끈적한 것이었고 특히나 돈다발이 산처럼 쌓여있는 금고에 들어가야 할 때가 되면 그 끈적한 욕망의 냄새가 내 코 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달달하면서도 동시에 꽤나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2024년에 나는 남미를 여행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조국, 한 때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부국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날. 나는 그날 길 위에서 수많은 노숙자들을 마주했다. 아르헨티나는 국가 부도 위기 속에서 경제가 파탄난 상황이었고 어제까지 집에서 수프를 끓여 먹던 사람들은 오늘은 길에서 빵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쩐지 지금 길 위에서 구걸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꽤나 어색해하는 듯했다. 내가 지폐 한 장이라도 쥐어주면 그들은 쑥스럽게 받아서는 재빨리 호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파산의 냄새가 진동했고 그것은 오줌 지린내, 몇 달간 씻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휴지조각이 된 지폐로 범벅된 냄새였다. 내가 저들처럼 갑자기 길 위로 나앉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끈적하게 이어졌다. 밤이 되어 그들은 거리 한편에 자리를 잡고는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저녁의 쌀쌀한 공기 냄새는 그곳의 냄새와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아르헨티나를 나와서는 옆 나라, 브라질로 향했다. 브라질에서도 꽤나 많은 노숙자를 목격했는데 그곳에서 마주한 노숙자들은 아르헨티나의 노숙자들과 결이 달랐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갈고닦은 노숙 실력, 그들은 소위 ‘프로노숙자‘였다.
개중에 몇몇은 관광객들을 위협해서 강도를 하는 강력범죄형 노숙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상적으로 구걸을 하는 노숙자였다. 내가 지폐를 한 장 쥐어주면 그들은 마치 마수걸이 장사에 성공한 옷가게 주인아주머니 마냥 돈의 냄새를 맡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다음 관광객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브라질에는 ‘파벨라’라고 부르는 곳이 곳곳에 있었다. 그 단어가 사전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빈민촌’이었고 그곳에는 실제로 빈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곳이 궁금했던 나는 단체 투어를 신청해서 직접 방문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브라질은 치안이 안 좋기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단체 투어니깐 괜찮겠지 싶었다.
투어 날짜가 되어 집결지 앞으로 가니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처럼 투어를 신청한 관광객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필리핀 출신의 미국 의사 앙헬과 인사를 나눴다.
“Hi, 나는 필리핀 출신인데 지금은 뉴욕에서 의사를 하고 있어”
“Hi, 나는 한국에서 왔고 백수야”
앙헬은 당시 여행을 다니는 백수였던 내가 그저 부럽다고 했다. 자신도 언젠가는 일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덧붙였다. 물론, 지금의 나도 그때의 내가 좀 부럽긴 하다.
가이드는 사람들이 다 모이자 말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이곳 파벨라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곳 파벨라를 소개해드릴 파비앙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당부했는데,
“이곳 파벨라는 현재 한 갱단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 갱단의 보스에게 이 투어를 허락받아서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여러분이 지불한 투어비용의 일부는 갱단으로 돌아갑니다. 파벨라 곳곳에 이곳을 지키는 갱들이 서 있는데 절대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규칙을 지키면 그들은 당신을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이드의 추가적인 설명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파벨라 내에 여러 갱단이 난립해서 치안이 꽤나 불안정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지금은 하나의 갱단이 지배하고 있기에 치안이 안정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브라질 정부의 암묵적인 용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경찰들도 이를 모르는 체하는 듯했다. 그 말을 듣자 하니 나는 예전에 봤던 한 영화가 떠올랐다. 불안정한 멕시코 마약상들을 관리하기 위해 미국의 CIA가 콜롬비아 마약상과 손을 잡는 영화.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악을 선택해야만 하는 곳이 이곳 남미였다.
이후로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 같이 파벨라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실제로 AK47로 무장한, 상의를 탈의한 브라질 갱이 우리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좋은 거 구경이라도 왔느냐는 표정으로 우리 쪽을 매섭게 노려봤다. 가이드가 그의 어깨를 툭치며 가볍게 손인사를 나누자 그제야 그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가이드는 말을 이어갔다.
“이곳, 파벨라에는 이곳만의 규칙이 있습니다. 주민들 간에 분쟁이 생기면 갱단의 보스가 중재합니다. 주민들은 갱단에 세금도 납부하죠. 아 물론, 그 세금은 파벨라를 위해 쓰입니다. 우리 보스는 불우한 이웃에게 음식도 나눠주고 약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요!“
파벨라는 높은 언덕을 따라서 부채꼴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평지는 이미 오래전 부자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여서 빈민들이 겨우 자리 잡은 곳은 평지 사이에 있는 이런 접힌 공간들 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힘겹게 그곳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지린내가 진동했고 아무렇게나 버린 쓰레기 더미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은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긴 했다. 쓰레기 더미들 사이사이에 가게들이 있었다. 슈퍼마켓, 휴대폰 대리점 심지어 헬스장까지. 헬스장 안에서는 등빨이 상당한 사내 몇몇이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쪽에 무관심한 듯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나는 그 상황이 마치 동물원 같았다. 누가 동물이고 누가 관람객인지는 그들 손에 들려있는 게 아령인지 아니면 총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괜히 움찔했다.
내가 괜한 생각을 이어가던 차에 가이드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저쪽의 산 중턱을 손으로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했다.
“여러분 저기가 국제학교인데요, 브라질에서 최고로 학비가 비싼 곳이에요. 이곳 파벨라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죠. 웃기지 않나요?”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앙헬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이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여기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나요?“
“남자아이들은 축구선수가 되는 게 꿈입니다. 실제로 파벨라 출신의 유명한 축구선수들이 꽤 있어요.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삼바를 배워서 카니발에 출전하는 게 가장 큰 꿈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을 바꿀 수 있거든요”
국제학교와 축구선수, 그리고 삼바와 카니발. 그것들은 학교와 파벨라의 거리만큼 꽤나 잘 어울리는 조합인 듯했다.
중간중간 우리는 골목 갈림길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갱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몇몇은 코로 마약을 흡입하고 있었는데 빨아들인 이후로는 아찔한 듯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약기운에 빠져 주춤했다. 그 모습을 흠칫 놀라 지켜보던 우리들에게 가이드가 말했다.
“지금 저들이 하고 있는 마약은 코카인입니다. 이곳 파벨라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죠. 저 정도 섭취량이면 시가 2달러 정도입니다”
2달러의 냄새, 그것은 사람을 충분히 아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투어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앙헬은 많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리핀 출신의 미국 의사, 그에게도 어떤 사연이랄 게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나는 앙헬과 연락처를 교환했고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혹시 다음번에 뉴욕에 오게 되면 나에게 연락해”
나는 그에게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파벨라를 빠져나온 우리는 육교를 건넘으로써 모든 투어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 육교는 파벨라와 바로 그 옆 부촌을 나누는 경계와 같은 곳이었는데 육교부터는 경찰이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지린내가 코 끝을 찌르는 그 육교에는 파벨라 출신 작가들이 그린 벽화가 꽤나 많았었는데 나는 그중 한 그림에 가장 눈이 갔다.
거울을 보고 있는 한 갱 단원의 뒷모습, 그는 옆으로 총을 메고 있었는데 거울 속의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홀로 나뒹굴고 있는 축구공. 그 그림을 보는 내내 나는 좀전에 파벨라에서 마주친 갱 단원들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러다 그들의 얼굴이 점차 내 얼굴로 바뀌어가는 상상이 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황급히 그 육교를 내려왔다. 육교 밑에 있던 경찰이 그런 날 보며 비웃듯이 한마디를 건넸다.
“Welcome to Braz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