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번째 이야기
우리나라는 어찌 보면 참 운이 좋은 나라다. 사계절을 다 가지기란,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실 이만한 특권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양과 지구사이의 밀고 당김과 그로부터 탄생한 질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무릇 그런 하나의 계절이 지날 때마다 세상에 남기는 어떤 흔적처럼 나의 사랑들 역시 내 안에 여운을 남겼다.
T를 처음 만난 건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어느 봄 날이었다. 학교 캠퍼스에는 개화를 준비하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한창 오동통하게 살찌우고 있었다. 그날은 바로 신입생 환영회. 나는 당시 2학년으로 과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신입생들 앞에서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바로하야 가장 무섭다는 1년 위 선배, 게다가 학생회의 일원!
T는 우리 과에 새로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렸던 그녀는 그날 무테안경을 쓰고 있었고 눈썹 바로 위까지 기른 앞머리는 살짝 곱슬기가 있어 이마 위에서 왼쪽으로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나는 동그란 얼굴에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수줍어하는 그런 그녀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저 아이는 누굴까. 이후에 신입생 자기소개를 통해서는 그녀가 재수를 했다는 사실, 그래서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주가 흘렀고 그 기간 내내 나는 문득문득 T가 떠올랐다. 무슨 감정일까 내내 고심하던 사이 월요일이 되어 학생회 일원을 모집하는 날이 되었다. 당시 나는 우리 과의 기획부 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말이 기획부지, 사실은 과 행사 때마다 학교 주변 술집을 예약을 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어렵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학생회 활동에 관심 없어?”
“학생회요?… 아직 고민해 본 적은 없었는데…“
“기획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경험도 쌓고 더군다나 우리 부는 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아. 과 행사가 있을 때 장소를 섭외하기만 하면 되거든“
“재밌을 것 같긴 한데…그럼 제가 내일까지 고민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용기를 내어서 그녀에게 학생회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했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작업을 건다”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다음 날,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답변을 들려주었다. 기획부에 들어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단추는 꽤나 성공적으로 들어맞았다.
이후 우리는 같은 수업을 듣기도 했고 그리고 학생회 활동을 이유로 종종 함께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그녀는 항상 차분했고 웃는 모습은 봄처럼 싱그러웠다. 그런 그녀를 만날 때마다 이제는 터질듯한 꽃봉오리를 품고 있던 진달래처럼 내 마음은 조금씩 더 부풀어갔다. 하루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Lenka의 ‘The Show’가 참 좋다고 했다.
“저는 이 노래가 참 좋아요. 근데 사실 가사는 꽤나 우울한 내용을 담고 있거든요“
“가사가 무슨 내용이길래?“
“삶이 혼란하고, 내면이 불안하고 뭐 그런 사춘기스러운 내용들이에요. 그래도 결국 노래의 제목처럼 쇼처럼 인생을 즐기면 된다는거죠. 그래서 이 노래가 좋은가 봐요 “
“그렇구나. 꽤나 의미가 깊은 노래였네“
나는 노래 하나도 깊게 빠져 듣는 그런 그녀가 나랑 닮아서 더 좋아졌다. 그런 나의 관심을 그녀도 싫어하지 않는 기색이어서 그래서 또 기뻤다. 이제는 진달래가 마침내 개화해 버린 4월의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학생회 일인 양 연락했다.
“이따 저녁에 시간 되면 잠깐 볼까? 학생회 일 때문에..”
“네,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어디서 볼까요?“
“학교 옆에 Bar 있잖아. 드록바 거기서 보자”
“아, 칵테일 파는 거기요?…”
“응”
“네, 알겠어요”
내가 그녀를 불러낸 곳은 당시 유명했던 첼시의 축구선수 ‘드록바’의 이름을 차용한 학교 근처의 칵테일 바였다. 나는 그곳에서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근데 어떻게 전달할지가 문제였다. 그때까지 연애 경험이 없었던 나는 큰 난관에 봉착해버리고 말았다. 아 이제 어떻게 수습하지. 그러다 문득 지난겨울에 봤던 영화 ’Love Actually’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크가 줄리엣에게 스케치북을 넘기며 마음을 고백하는 그 장면! 차마 떨려서 말이 안 나올 것 같은 나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다 싶었다. 그리고는 바로 문방구로 달려가 스케치북을 사고는 한 장 한 장 내 마음을 적어내려 갔다. 글자를 하나씩 적을 때마다 오그라드는 내 손발을 계속 타박하면서. 그때의 내 세포들은 사방에서 삐그덕 댔고 세상은 요동쳤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약속시간이 되어 나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장소로 향했고 그녀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학생회 일이라고 하셔서 다른 애들도 오는 건 줄 알았는데요”
“아…그런 건 아니고 우리 둘이 논의할 일이 있어서…“
“어떤 건데요?”
그 순간, 그전까지 어떻게든 잡혀있던 내 떨리는 마음들이 이제는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생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꽤나 당황했다. 이성에게 처음으로 하는 고백, 스케치북을 준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전에 어떤 말로 빌드업을 할지는 미쳐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
“어…아… 그게… 그러니깐…”
어쩔 줄 몰라하던 나는 다 내려놓는 심정으로 다짜고짜 스케치북을 펼쳐 들었다. 그 안에는 내가 부끄러움을 꾹꾹 눌러서 적었던 글자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본 그녀는 처음에는 흠칫 놀라더니 내가 장을 넘길 때마다 이내 조금씩 웃음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장까지 스케치북을 넘긴 나. 이후 몇 분이나 흘렀을까. 우리 둘 사이에는 꽤나 긴 정적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내 눈은 시곗바늘 말고는 응시할 곳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가 왼쪽으로 치우쳐있던 앞머리를 공연히 정돈하고는 정적을 깨고 멀뚱하게 있던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깐 이것 때문에 부른 거라는 거죠?”
“그런 거지…”
“하하하”
“…”
그녀는 나에게 학생회에 참여할 때처럼 내일까지 답변을 준다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홀가분해진 고해성사자가 된 느낌으로 주춤거리며 걸었다. 기대한 답변이 오기를 바라며 그 날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내 옆에서는 스케치북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가 뜰 시간이 되었고,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나에게 카톡을 보내온 것이었다.
“나 그럼 이제 오늘부터 말 놓는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날부터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나의 첫 연애. 그녀는 평상시 학교를 다닐 때는 안경을 쓰다가 나와 데이트를 할 때는 렌즈를 끼고 왔는데 나는 나처럼 쌍꺼풀이 없는 그런 그녀의 눈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내가 들어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다. 그간 우리가 시간을 채웠던 일들로는 열람실 데이트, 카페 데이트 그리고 같이 ITX청춘열차를 타고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에 간 일 등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이 남는 날을 꼽자면 모든 수업이 끝나고 저녁에 같이 뚝섬으로 데이트를 간 날이다.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는 같이 나란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하늘은 보랏빛을 띠며 우리를 마주했고 옆으로는 한강이 차분하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들의 주변을 떠돌던 인파들의 소음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잠잠하게 묻혔다. 그러는 사이 나의 가슴은 점점 세차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주변의 모든 공기를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용기 내어 나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살포시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득하게 아름다웠던 그날, 그리고 나의 첫사랑.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