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 여름

13 번째 이야기

by 우두커니

T와 헤어진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연애를 하지 않았다. 졸업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러다가 은행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뒤로부터는 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바로 쓰러져 자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고객과 씨름하고 돈을 만지는 일은 대학을 갓 졸업했던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꽤나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무더위가 공기를 가득 메웠던 7월의 한 여름날,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던 한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은행 취업한 거 축하해. 지금 여자친구는 있고?“

“형, 저 지금 솔로예요”

“오 그래? 잘 됐다. 마침 나 아는 애 중에 괜찮은 애가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누군데요?”

“너랑 동갑인데 성격이 참 좋아. 한번 만나봐 일단”


그렇게 나는 선배로부터 H의 연락처를 전달받았다. 퇴근 후 집에서 맨날 쓰러져있던 나를 반성하던 차에 받은 소개여서 그런지 한번 잘해보리라 다짐하고 저녁이 되어 나는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녀는 여름날 실내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 불쑥 덮치는 한낮의 뜨거운 열기처럼 나에게 답장을 보내왔다.


“괜찮으시면 저희 카톡 말고 통화하실래요?“


나는 그런 H의 당돌한 태도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휴대폰 자판을 고심하며 누르느니 그 편이 차라리 낫겠다 싶어 그녀에게 좋다고 답을 보냈다. 이후 우리는 1시간이 넘도록 통화를 했는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녀가 왜 통화하기를 원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우아하지만 당찬 목소리, 그녀는 나에게 E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아, 어쩐지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어. 그런 그녀는 통화 중 내가 툭툭 던지는 농담에 잘 웃어주었고 나는 점점 그런 그녀가 더 궁금해졌다. 통화의 말미에 우리는 그 주 주말 신촌에서 만나기로 서로 약속했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날, 그날은 낮 최고 기온이 39도에 육박한 그 해 최고의 무더위를 기록한 날이었다. 길 위에 사람들은 찌는 열기 속에서 대부분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나는 인파 속에서도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와 그리고 성악이라는 전공과 꽤나 잘 어울리는 외모, 무엇보다 그녀는 무더위 속에서도 내 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을 각각 볼 때 풍기는 묘한 이미지가 내게는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와 신촌에서 닭갈비를 먹고 카페에 가서는 마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잔을 내려놓고는 나에게 조금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은 교수님으로부터 소프라노 1:1 수업을 듣고 있는데 고음 파트가 좀 힘들어요 하하하”

“아, 소프라노면 조수미 같은 거죠?“

“아는 사람이 조수미 밖에 없는 거 아니에요?”

“뭐, 그런 셈이죠 하하하”


그리고 그녀는 가끔 주말에는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사실 자기는 모태신앙이긴 하지만 요즘은 신앙심이 별로 크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농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도 미션스쿨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요”

“에이, 모태신앙이랑 그거는 다른 거 아닌가”


그녀는 나의 이런 시답지 않은 말들에도 웃어주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음에는 어떤 시답지 않은 말들을 들려줄까 고민하는 내가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2번을 더 만났고 사귀기 시작했다. 소개팅 불변의 법칙, 3 번째 만남에 고백하기.


그녀와 막 사귀기로 시작한 시점, 운전면허를 딴 직후이기도 했기에 나는 한창 운전에 재미가 붙어있었다. 그래서 종종 퇴근 후 쏘카로 차를 빌려서는 수업이 끝난 그녀를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가곤 했는데,


“오늘도 와줬네, 고마워”

“아니야 뭘”

“우리 이제 어디 갈까?”

“저녁 먹고 야경 보러 갈까?“

“그래, 좋아”


그녀는 차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대부분의 노래는 그녀가 준비하던 실기와 관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런 그녀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서울의 밤거리를 떠도는 게 좋았다. 가사 없는 음표들의 선율처럼 우리 둘은 그렇게 서울의 이곳저곳을 맴돌았다.


특히 그녀가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 중 하나는 ‘밤의 여왕 아리아’였는데, 그녀가 처음 나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후렴구 들으면 무슨 노래인지 바로 알 텐데. 그전까지는 모를 수도 있어“

“아, 후렴구 들으니깐 바로 알겠다. 이 노래가 그 노래였구나”

“맞아. 근데 이 노래는 여성 소프라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노래 중 하나야. 고음도 고음이지만, 완벽한 감정표현까지 소화해 내야 하거든. 이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데 마음대로 잘 안돼“


나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세를 취하고 무대 위에서처럼 연습하던 그녀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쌍꺼풀이 있던 오른쪽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데이트가 끝난 후에는 그녀가 살던 홍제동으로 향했는데 그녀의 집은 가파른 언덕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운전하던 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여기 언덕이 미끄러워서 마을버스가 못 다니거든. 그럼 천상 저 아래까지 걸어서 내려가야 해. 그래서 내가 여름을 더 좋아하나 봐“


그녀에게 좋아하는 계절을 고른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향할 때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 홍제동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나는 그냥 나 자체로 좋아해 주길 조심스레 바랬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우리는 그다음 해 여름을 맞이할 때쯤 이별했다.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녀는 나와 헤어진 후 얼마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밤의 여왕 아리아‘를 잘 부르고 싶어 했고 여름을 좋아했던 H, 지금은 그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되었는지 그저 조금은 궁금할 따름이다.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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