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번째 이야기
문장의 시작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사람을 살면서 한 명쯤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은 좋은걸까 나쁜걸까. 사랑의 반댓말이 무관심이니깐, 그러면 어쩌면 그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겠지. 나에게는 떠올릴 때마다 늦가을의 찬바람처럼 나를 괜시리 조금 시리게 만드는 한 여인이 있다. 3번의 사계절을 함께 보낸 Y에게.
2017년의 10월, 그 해에 나는 은행 지점에서의 신입 생활을 마무리하고 여의도의 본사로 발령을 받았고 그쯤은 한창 실무를 배우고 있던 시점이었다. 아, 참고로 내 생일도 10월달이다. 여의도는 역시 전해들었던 명성처럼 항상 분주했고 나는 약간은 얼떨떨하게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던 차였다. 그간 ‘밤의 여왕’과 헤어진 이후 주변의 소개로 꾸준히 소개팅을 나가긴 했지만 이렇다할 끌림없는 관계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에 나는 연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는 마음을 비우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퇴근길 5호선 지하철 광고판에 떠있는 소개팅어플을 발견하고는 눈이 갔다.
‘나도 저거나 한번 가입해볼까‘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위에서 나는 큰 기대없이 회원가입을 진행하고 빈칸들을 채워나갔다. 어차피 무료하게 반복되던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10분 정도의 시간투자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고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상대방들의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시작된 왼쪽으로 스와이프의 연속,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굳이 설명하자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계속 거절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 날은 무의식적으로 왼쪽으로 넘기려던 왼손 엄지손가락을 가까스로 부여잡고는 지금 내 휴대폰 화면 안에 있는 한 여인에게로 눈길이 멈췄다. 남자들 사이에서 전혀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지 않은 수려한 외모! 게다가 그녀는 원하는 남성상에 키가 큰 남자를 선호한다고 적어놓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마침 가진 것은 키밖에 없었던 180후반의 나는 바로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는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녀로부터 피드백이 돌아왔다. 최대한 키가 커보이는 척 올렸던 내 사진을 보고 그녀도 ‘좋아요’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앱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공유했고, 이후 동대문DDP에서 첫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그때, 동대문 DDP에서는 조명 전시회가 한창이었는데 그녀는 전시회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주의 토요일 저녁 6시, Y를 처음 보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기 1시간 전이었다. 늦가을 바람은 쌀쌀하게 불어왔고 나는 인간 공작새라도 된 마냥 한껏 꾸미기위해 검은색 코트를 차려입고는 집에서 그리 멀지않았던 동대문DDP로 향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마주한 그녀, 그녀도 마침 우아한 흰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실물은 사진 속보다 3배는 더 예뻤다. 165cm정도되는 키에 내 얼굴의 반 정도되는 작은 얼굴, 두 눈에는 쌍꺼풀이 진하게 자리를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마와 머리사이의 라인은 마치 드라마에서 봤던 조선시대 양반집 딸처럼 참 똑떨어지게 가지런했다.
“사진처럼 키가 정말 크시네요”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쁘시네요”
“에이, 아니에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빨주노초파남보, 각자 다른 색과 모양들을 뽐내는 조명들을 관람하며 그녀와 조곤조곤 담소를 나눴고 그런 그녀는 조명들 사이에서도 내 눈에 가장 빛났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고 했다. 전시회 관람을 마무리하고 어색하게 헤어지기 전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그…다음 주말에 예술의 전당에서 르꼬르뷔지에 전시회가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어떤 전시회에요?“
“프랑스 건축가인데 제가 예전에 프랑스에서 한번 보긴 했는데 너무 좋아서요”
나는 그저 좋다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달까. 흰색 코트가 잘 어울렸던 그녀를 다음 주말에도 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떠서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는 서울의 야경을 아찔하게 반으로 가르며 달렸는데 나는 평소와 달리 그런 것들에는 전혀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까지 한 주가 남은 사이, 그 시간은 나에게 꽤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 간 우리는 카톡을 통해서 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공유했다. 그녀는 어릴 적 S전자 직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서 살았다고 했다. 런던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어릴 적 익혔던 스페인어를 점점 잊어버리고 있어 그 부분이 참 아쉽다고 했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분위기를 잔뜩 머금은 그녀가 조금은 벅차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그 벅찬 감정때문에 미리 겁먹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토요일이 되어 Y를 다시 만나는 날, 우리는 내가 예약한 파스타집에서 먼저 만나 저녁을 먹고 전시회로 이동하기로 했다. 약속시간이 되어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고 나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내가 도착하고 얼마 있다가 그녀가 도착했는데 저번과는 달리 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전시회에 집중하기위함이었을까. 그녀는 그날도 도시의 분위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아, 저도 조금 전에 왔어요“
“근데 혹시 제가 외국이야기해서 파스타집으로 예약하신거에요?”
“아 그렇긴한데…”
“저 한식 좋아해요,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물이에요”
그녀는 나물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나물이 뭐라고, 조금은 움츠러있던 내 마음이 그래도 한결 풀어졌다. 식사를 마치고는 이후 전시회로 이동했다. 그녀는 나에게 일전에 프랑스에서 직접 봤던 같은 건축가의 작품에 대해서 머쓱한 듯 추가적인 설명을 해줬다. 그녀의 말을 한참 빠져듣던 나는, 이제는 나와 다른 세상의 그 분위기에 저항없이 빠져들고 싶었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딱히 없었다. 그러다 전시회 관람의 막바지에 그녀가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앞으로 한동안은 좀 바쁠 것 같아요. 내년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되었거든요”
그녀는 나에게 한동안 바빠서 못만날 수도 있다며 미안한 감정을 표했다. 나는 괜찮다며 내가 나중에 평창에 놀러가겠다고 했다. 그녀를 보러 평창까지가는 일은 그리 대수로워보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나에게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그 뒤로 한달동안 정말 바빴다. 그리고 그녀가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막 자원봉사를 시작한 때에 나는 정말로 평창에 갔다. 그녀는 그런 나를 기쁘게 반겨주었고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오빠, 나 사실 어렸을 때 주변에서 막 아이돌하라고 그랬었다?“
그녀는 으쓱한 듯 사실 어렸을 때는 주변에서 아이돌 제의도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말하곤 했다. 나도 속으로는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지는 기분이라 아닌 척 답했다.
“에이, 그정돈 아닌데”
“뭐? 죽을래?”
그런 그녀는 나의 농담을 듣고는 삐진 척하며 내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 더 꼬집히고 싶었던 그 순간.
그녀는 당시 광교에 살았었는데 그 전까지 여전히 외국에서 근무하시던 부모님이 잠깐 한국에 들어오셔서는 그곳에 집을 구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나는 광교까지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그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첫 번째 사계절을 함께 보냈다.
이후에 그녀는 외국계은행에 입사해서 종로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쯤 그녀의 부모님은 다시 외국으로 발령을 받아 나가셨고 그녀는 서대문에 집을 구했다. 여의도가 직장이었던 나는 퇴근 후 그녀의 집에 방문하는 시간이 늘어갔고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아침에 막 일어나 산발이 되어 있는 내 머리와 부은 얼굴을 보며 ‘무’같다고 했다.
“오빠, 지금 진짜 ‘무’같아 하하하”
“에이, 너도 막 일어나서는 굉장히 별로거든”
“아닌데, 난 항상 예쁜데”
우리는 정말 부부라도 된 마냥 아침이 되면 함께 일어나서 출근을 했고 퇴근 전에는 몇시에 집에 도착하는지 서로 물었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밥을 하는 암묵적인 규칙도 생겼다. 그녀는 계란후라이를 좋아했고 계란은 반숙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말이되면 우리는 느지막히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는 경복궁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담장 주변의 낙엽이 바삭하는 소리를 내며 자전거 바퀴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경복궁을 한 바퀴돌았다.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힙한 노래들을 부르곤 했는데 그 중에는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도 있었다. 멜로디에 빠져서는 가사는 생각지도 못하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별을 암시하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지 말 걸 그랬나보다. 자전거를 다 타고는 사과잼 와플을 사들고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사계절이 지나갔다.
그녀와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 사이사이에서 나는 문득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좁힐 수 없는 차이에 대하여, 특히나 명절만 되면 평소에는 묻혀있던 그녀와의 괴리감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느꼈었던 그 아득한 차이, 어쩌면 이미 그전부터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러한 경계감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가 되면 나를 더욱 세차게 덮쳤다. 그녀는 명절 때마다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임원으로서 외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인 순천시로 향했는데, 내가 내려간다는 사실을 미리 통화로 전해들은 작은 삼촌은 터미널 대합실에 앉아서는 날 마중나와 있었다.
"잘 내려왔냐"
"응"
"밥은"
"휴게소에서 호두과자 먹었어"
이후 작은 삼촌은 ‘K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를 데리고는 역시 자랑스럽다는듯이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있는 작은 삼촌의 지인들 앞에서 소개되는 나,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항상 겪는 같은 레퍼토리, 나는 그렇게 잠시나마 누군가의 트로피 역할을 했다. 사실 백조들이 넘쳐나는 서울에서는 그리고 Y 옆에서 한참 작았던 스스로를 경험하고 있던 그때의 나는 트로피인양 들려있던 내가 조금은 비참하다는 생각을 했다. 단칸방의 쾌쾌한 곰팡이, 초등학교 때의 Outback, 중학교 때의 우유 그리고 고등학교 때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그런 내 주변을 스산하게 맴돌았다.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끼인 느낌, 하얀색과 검은색 사이에, 서울과 고향 사이에, 돈과 기생 사이에 그리고 Y와 같이 살던 아파트와 단칸방 사이에, 그렇게 고향에 내려갔다가 올라온 뒤로 한동안은 수 많은 경계감 위에 서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막걸리 냄새가 폴폴 풍기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 작은 삼촌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없다. 어쨌든 그에게 나는 트로피가 맞았으니깐.
Y는 참 꿈이 큰 사람이었다. 역시 보고 자란 것이 달라서 그랬을까. 조기교육이 이래서 중요한가보다. 그녀는 동거 후 1년이 막 지난 시점에 다니던 회사에서 홍콩으로 발령을 받았다.
“오빠, 미안해. 그래도 나 해외에서 꼭 일해보고 싶었어”
“응, 이해해”
“우리 그래도 자주 만날 수 있어. 나도 한국 자주오고 오빠도 가끔 홍콩으로 오면 되잖아, 맞지?”
“응, 그러면 되지. 너무 걱정마”
그렇게 우리는 기약없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그 때 우리는 참 다양한 곳에서 서로를 만났다. 한국, 홍콩, 상해, 제주도, 앙코르와트, 방콕 그리고 훗카이도까지. 장거리 연애기간 동안 짧게 만나고 다시 헤어질 때가되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는데 그 눈물은 다시 한번의 사계절을 마무리 짓고는 서로 그쳤다.
가끔 바짝 말라버린 낙엽을 실수로 밟는다. 일부러는 최대한 밟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인데. 바삭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스라지는 낙엽을 볼 때면 어딘가 한편이 아려온다.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되어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