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번째 이야기
전해져 내려오는 영웅들의 서사에 따르면 예수는 33살에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싯다르타는 35살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나이도 어쩌다 보니 딱 그 둘 사이에 끼어버린 어디쯤. 그렇다고 내가 예수처럼 인류의 원죄를 등에 업지도, 부처처럼 제 손으로 머리를 깎을 결심을 내린 것도 아니지만 인류의 나선형 DNA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확실히 존재하긴 하나보다. 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겪을 나이.
선악과를 먹고 제대로 된 수치심을 깨닫지도 못했고, 가부좌를 틀고 열반의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대한 정리정돈 정도는 해볼 수 있는 나이. 개운하게 세탁된 빨랫감들은 건조대에 널어놓고 밀린 설거지를 시작한다. 라임향 세제에 뽀드득 씻겨나가는 그릇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곳에 받침대를 대고는 이제 중고로 산 짭다이슨 청소기를 켠다. 역시 독일제를 따라 만든 제품이라 소리부터 다르군. 웅 하는 소리조차 안나는 이놈을 들고 온 방의 이곳저곳 먼지며 머리카락을 빨아들인다. 후,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수납함에 다 마른빨래들을 정리해서 넣고는 마지막으로 신발장의 엉켜있던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이 정도면 집들이 준비가 얼추 끝난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손님들 올 시간이 다되었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 소피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인 모자가게를 운영하며 고향을 지킨다. 그러던 중, 황야의 마녀의 저주를 받게 된 그녀는 급작스레 할머니가 되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걸린 저주를 말할 수도 없는 소피, 그녀는 도망치듯 떠나게 된 여정 속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올라타고 그렇게 세상을 여행한다.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된 소피는 말한다.
‘정말 신기해, 이렇게 마음이 평온한 건 처음이야’
‘아름다워, 덕분에 이런 곳까지 와보고 고맙긴 해‘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바다. 마녀의 저주가 사실은 저주가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고 내가 소피 같다는 말은 아니다. 일단, 소피는 여자고 장발머리에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깐. 나는 남자이면서 그리고 약간은 엄지손가락처럼 생겼으니깐.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나도 여행을 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아름다워, 덕분에 이런 곳까지 와보고 고맙긴 해‘
내 유년시절을 보고 혹여나 날 연민하지 마시길, 그것은 세계 문학의 3대 비극에 비비지도 못하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20살 이후의 놈팽이같았던 내 시절을 보고도 부러워하지 마시길, 그것은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같은 성장의 서사도 아니었다. 체 게바라는 반골기질을 날카롭게 제련해 쿠바의 혁명을 이끌고 마침내 하바나에서 라임을 곁들인 쿠바리브레를 마셨지만, 지금의 나는 꾹꾹 눌러 글을 쓰며 집에서 카스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게 전부니깐.
한 이야기의 다소 진부한 마무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나를 계속 지구라는 궤도 안에 안정적으로 머무르게 하는 것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돈보다 더 끈적이는, 다이소에서 산 접시 밑에 붙어있는 바코드 스티커가 꼴 보기 싫어 억지로 떼어내도 결국은 엉성하게라도 접시 밑에 붙어있는 실선 같은 것이다. 비유가 좀 별로이긴 했는데 아무튼 좋다는 뜻이야 친구들아.
왜인지 앞으로 한동안은 이런 긴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긴 글을 쓰는 과정은 나를 가라앉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런 중력이 더 거세게 나를 잠식하는 날이면 나는 밖으로 나가 운전대를 잡았다. 자차가 없으니 내 차를 운전했다는 말은 아니고 카카오 대리운전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다시 찾게 된 나의 직함, 전진우 대리.
10년 전, 조수석에 탄 여자친구를 옆 눈으로 흘깃 보며 서울의 야경을 가르던 나는 이제는 얼큰하게 취한 취객을 뒷좌석에 태우고 정면을 응시한다. 복잡스럽고 미묘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올라오던 차에 하루는 목소리가 참 점잖으신 중년의 남성 고객이 말을 걸어오셨다.
“직장인 할 관상은 아니신 것 같네요”
“어떻게 아세요?”
“제가 현장일 다니면서 사람들을 하도 많이 봐서 딱 보면 느낌이 와요”
우연히 마주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그것은 지금의
내 삶을 응원하는 우주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덕분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쾌하게 글을 적었던 날. 인연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소중해서 그래서 나는 더욱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게 된다.
몇 안 되는 내 가족들,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동기들, 독서토론 문우들, 전 회사 동료들, 여행지에서 만났던 동행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지금은 서로를 모르는 인연들.
글을 적는 내내 나의 포근한 산책로가 되어 주었던 보라매 공원의 바로 옆에는 기상청 건물이 있다. 그리고 그 기상청 건물 외벽에 선명한 글씨로 적혀있는 문구.
‘하늘을 친구처럼, 구름을 하늘처럼‘
서로를 하늘처럼 대하자 우리, 그렇지 않으면 구름처럼 서로를 떠나갈 테니.
글을 적으면서 또 소중한 인연들이 생겼다. 이제는 지나치다 서로 눈인사정도는 할 수 있게 된 내 안의 수많은 관성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층간소음은 대화로 풀어야지. 이사를 갈 수 없다면 그 또한 적응해야 할 문제.
옛 말은 정말이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좋은 친구 사귀어라,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뱃속에 있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기를 하지 않나. 그래, 이미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던 거다. 관성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를.
집을 나설 때 전등은 제대로 껐는지, 가스레인지의 중간밸브는 가운데를 향해있는지 아직도 3번씩은 확인하는 나, 아빠가 나에게 남긴 관성은 여전히 내 일상에 흐른다. 아빠가 나에게 남겨준 재산은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전기세도 아끼고 화재도 예방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출생과 함께 부여받은 이름은 향후 인생을 지배할 가장 큰 관성이다. 하루는 고모에게 물었던 날이 있다. 내 이름이 왜 진우인지에 대하여.
“고모, 근데 내 이름을 왜 진우로 지은 거야?”
“그야, 우리 집안이 워낙 힘들었으니깐 너라도 좋은 집에서 살라고 한자 眞참 진에 宇집 우로 지었지”
좋은 집. 내 이름은 정말이지 자본주의 대한민국스러운 이름이었네. 그래서 내가 돈을 그렇게 좋아했던 거였어. ‘이게 다 고모때문이야’라고 농담을 던질까 하다가 꾹 삼켰다.
나에게 만약 사랑하던 연인과의 이별 장소를 결정할 수 있는 전능이 있다면, 나는 굳이 곧 헤어질 그녀를 비행기 옆자리에 태워서는 바라나시로 가고 싶다. 원하는 시간은 정확히 오후 6시 6분. 낮과 밤의 경계 속에서 화장터의 망자가 타는 것을 마주하며 연인과 이별하는 나의 모습. 낮과 밤의, 삶과 죽음의, 사랑과 무관심의 3중 경계감 안에서 나는 어쩌면 너무 황홀한 나머지 이별의 아픔에 무감각해질지도 모른다. 마치 피자 3조각을 겹쳐서 한 입에 먹는 느낌이랄까, 너무 맛있을 것 같아.
이런 지랄 맞은 생각을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나 말고도 일출, 일몰을 좋아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으니깐. 어쩌면 그들 역시도 나처럼 경계감의 중력에 이끌리는 것은 아닐까. 이 감상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렇게 외롭지 않다.
낮과 밤의 경계, 해 질 녘. 그 시간은 하루의 총량 안에서 너무나도 미약하게 적은 시간. 허무하게 짧은 시간. 그래서 어쩌면 허무와 경계는 형제사이일 수 있다.
악마가 하울에게 말한다.
‘괴물로 변신하면 인간으로는 못 돌아와’
하울이 답한다.
‘우는 법도 잊을 테니 상관없어’
삶의 모순 앞에 늘 도망쳤었던 나는 그래도 이제는 그 녀석과 적어도 얼굴을 맞대볼 수는 있다. 매 순간 눈을 응시할 수는 없어서 가끔은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쳐다보겠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우는 법을 잊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내 삶의 가장 슬픈 모순 중 하나는 그 좋아하는 술을 평생 마시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조금만 마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생각을 하면 가장 눈물이 난다니깐. 지금도 글을 쓰는 나는 술 한 잔을 들이켤 때마다 모순인 척하는 씁쓸한 진리를 들이마신다. 그것은 쓰리쿠션의 당구알처럼 정확히 3번 튕기고는 내 위장 안으로 스며든다.
최종적으로 어떤 글이 완성될지 몰랐기에 적을 수 있었다. 만약 글을 적기 전에 이미 무엇인가가 선명했다면 나는 아마 글쓰기를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을 다 적고난 지금 내 앞에는 된장인 척하는 똥이 마주하고 있다. 홍합, 우유, 기회, 오리, 계절, 신호 그리고 여행까지 다 삼켜먹은 내 앞에 마침내 소화되고 배출된 그것.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래도 구린내가 심하지 않고 나름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물론, 다른 사람들한테는 냄새가 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똥이니깐 그렇다고요.
그래도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똥 앞에 좌절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은 아니다. 개똥도 약에 쓴다던데 제 똥도 언젠가는 약에 쓸 날이 오지 않을까요?
나에게는 베프 C가 있다.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은 통화하는 우리, 그런 우리를 보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말한다. “야, 너희들 솔직히 말해. 너희 게이지? 사귀지?“. 내가 앞 장에 연애소설을 적어놨으니깐 이제 더 이상 그런 의심은 안 받겠지. 하루는 그런 C와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주에서 새로운 블랙홀을 발견했대”
“근데 왜 블랙홀은 검은 점으로 보이는 걸까“
“중력이 너무 세서 빛까지 삼켜버렸기에 검은 점으로 보이는 거지”
“근데 중력은 지구가 인간을 끌어당기는 힘이잖아”
“에이, 초등학교 지식수준이네. 중력은 밀도가 큰 물체가 상대적으로 밀도가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빛까지 삼켜버릴 정도의 중력이면 도대체 어느 정도 일까. 감도 오지 않는 힘의 크기 앞에서 나는 내 이름을 다시 생각해 본다. 眞참 진, 宇집 우. 같은 한자를 쓰는 다른 의미로는 眞진리 진, 宇우주 우. 아직 좋은 집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우주의 진리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기에 내 이름의 관성은 역시 내 안에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소망을 하나 품어본다. 나도 블랙홀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군가를 끌어당길 중력을 조금은 가지고 싶다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더 이상 허무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허무까지 삼켜버릴 수 있는 검은 점이 되고 싶다고.
저주에서 풀려 마음을 되찾은 하울이 말한다.
‘몸이 너무 무거워’
그런 하울을 보고 소피가 웃으며 말한다.
‘마음은 원래 무거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