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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Jan 04. 2020

내 불행이 네겐 다행이니

다행이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른 애들한테는 말 못 하겠거든."


'상처 입은 치유자'란 말이 있다. 본인이 아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상처에 더 깊게 공감해줄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상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뛰어난 상담자다. 친구들은 힘들 때 나를 찾아온다.


"역시 너는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어. 잘 된 애들은 이런 마음 모르잖아."


문제는 본인의 불행을 얘기할 때만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잘 된 애들은 모를 실패한 이들만의 교감(?), 그런 것을 바라서이다. 언젠가부터 나의 실패를 본인의 위안거리로 삼으려는 그들의 태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무신경한 게 아닌가. 


친오빠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부 잘하는 여동생의 그늘에 가려 열등감에 시달렸던 오빠는 어느새 착한 오빠로 변해있었다.


"이제는 네가 잘 되길 바라."


누구보다 내가 잘 되지 않길, 아니 자신보다는 잘 되질 않길 바랐던 오빠가 '이제는' 내가 잘 되었으면 한단다. 더 이상 부럽지 않으니까.  '이제는' 본인이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였다.


다사다난했던 20대를 보내며 인간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다. 연민보다 어려운 것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축하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연민은 쉽다.

며칠 전,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이나 전쟁 피해자들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남편의 말에 심장이 덜컹한 일이 있었다. 내가 이런 남자와 결혼한 것인가, 슬픈 감정이 몰려왔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떠올리며 감수성 얕은 남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남편이 마지막 말을 뱉었다.


"나는 공감한다면서 행동하지 않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해."


그 말이 내게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불쌍하네', '마음이 아프네'란 값싼 동정만 해댄 게 아닐까.  '그래도 난 저들에 비하면' 하고 그들의 불행을 이용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연말에 MBC 연예대상에서 개그우먼들이 보여준 우정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누군가 상을 탈 때마다 진심으로 기뻐해 주던 동료들. 타인과 함께 울어주는 것보다 같이 웃어주는 게 더 힘든 요즘,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친구가 나를  위안삼아 공감을 얻고 슬픔을 달래려는 것에 내가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나는 더 이상 내 불운했던 한 때에 잠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 과거를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기에 내 상처는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다. 친구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내가 위로가 되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저 앞으로는 그 친구가 나의, 내가 그 친구의 행복을 진정으로 빌어주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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