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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Jan 17. 2020

나를 술푸게 하는 사람들

좋다가도 싫다. 사람들 말이다.


"나는 원래 인간들 딱 질색이야."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결국은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살면서 절대 악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저 내게 나쁜, 가끔은 내게만 나빠서 더 화가 나는 상대적 악인과 맞닥뜨릴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악인이므로(물론 내게만) 피해야 한다. 싸울 수 있으면 좋지만 이 사람은 만인의 적인 절대 악인은 아니기 때문에 공감대를 얻지 못한 채 혼자만의 힘으로 실전에서 싸우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므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더 골치 아픈 건 '악의 없는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자 하는 의지 없이 그저 살아갈 뿐인데, 누군가는 그들로부터 피해를 받는다. 나의 경우는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의 인간군이다.   


일단 그들은 귀찮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그냥 당신한테 다 맡길게요"라며 배려 깊은 척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수고로움을 덜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뿐이다.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에 본인만 빠져나가 상대방을 고되게 만든다.

내가 사람들에게 가장 지칠 때가 이럴 때다. 이상하게 일을 할 때나 모임을 운영할 때 정신 차려보면 일이 내게만 몰려 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선의로 먼저 일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처음엔 고마워하다가 이후엔 너무 당연하게 내게 의지한다. 그러다 책임질 일이라도 있으면 본인은 스윽 빠져 버린다. 이런 일이 몇 번 지속되면 결국 가장 먼저 자빠지게 되는 게 나다. 사람들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친구들 중에도 이런 애들이 꼭 있다. 약속 장소를 잡을 때나 시간을 정할 때, 늘 "난 그냥 너희들 하자는 대로 할게." 하며 의견 내는 것을 피하다가 꼭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선 "난 니들 다 맞춰줬는데"라며 불평한다. 이런 인간의 경우는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본인은 진심으로 억울해한다.


약속을 정하지 않고서는 만나기 어렵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해주겠지 하고 기다린다. 반면 그 누군가는 '나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하고 나서게 된다. 나는 후자의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될수록 인간관계는 버거워진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원칙이 있다.


내 주변 사람 10명이 있다고 하자.

그중 한 명은 나를 싫어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와 잘해 보려 애쓸 필요 없다. 이런 사람과는 관계를 단절하는 게 편하다.

열 명 중 일곱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다. 나를 싫어하지도, 좋아지도 않는 사람이 내 인간관계 대부분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를 지치게 하는 '악의 없는 가해자들'도 거의 이 부분에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나에 대한 호감도를 결정할 뿐이다.

우리가 정말 잘해야 할 사람들은 남은 두 명의 사람이다. 그들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힘들 때 나를 지원해주고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게 관심 없는 일곱 명의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다 이 두 명의 팬을 잃어선 안 된다. 그들은 오히려 일곱의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좋아해 주는 둘에게 최선을 다하고 남은 여력이 있다면 일곱에게 잘해주면 된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나를 소진시키면서까지 잘해 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하다.

나에게 호감 있는 두 명의 인간관계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의 가족, 정말 친한 친구들, 손에 꼽는 지인 몇 명. 그들 외에는 아직 없다. 이들이 결국 나의 재산이고 나를 지켜줄 사람들이다. 그 외에는 나를 좋아해 주면 고맙고 아니면 아닌 거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리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덧붙이는 말.

이 인간관계의 원칙에 대해서는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강연에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갈 무렵 나이 지긋한 신사분께서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만약 나를 싫어하는 그 한 명이 내 가족이면 어떡합니까?"

그의 질문에 강연장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의 질문에, 그의 목소리에 그가 정말 이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듯 안고 가야죠. 그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그저 그 무게를 견디며 가야죠."

강연 시간이 초과되어 자세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운이 좋게도 내겐 가족이 지지자 역할이 되어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면 어떨까. 내가 무엇을 해도 내 가족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더 흔한 경우로는 직장 상사가 나를 싫어하는 한 사람의 유형에 속한다면.

실제로 이런 경우의 사람들을 꽤 보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어떻게 얘기해줘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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