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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Jul 22. 2020

괜찮아. 결국 돌아올 거야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내가 꿈꿨던 미래의 내 모습보다 훨씬 아름답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근 이십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십 대 때 보았던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지금과는 다른 가치관, 유치하고 작위적인 대사, 어른이 되고 보니 다시 보이는 캐릭터. 그럼에도 여전히 몰입하게 되는 재미.

그러나 그런 것들과는 다른 먹먹한 감정이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그립다. 그런 감정이 지속되니 그냥 울컥울컥 눈물이 난다.


이런 감정은 도대체 뭘까. 분명 드라마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잃어버린 것 같고 그리운 것, 그건 아마도 그 시절의 꿈인 것 같다. 나도 크면 드라마에 나온 '저런 사랑을 해야지',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했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느낌. 아니, 아직도 그런 바람은 마음속에 그대로인데 내 현실이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 나는 이미 서른이 넘었고 결혼을 했으니 더 이상 이룰 수 없을 것들에 대한 마음. 나는 저런 사랑을 해보았던가, 저만큼의 사랑을 받아 봤던가. 이제 저런 사랑을 기대해선 안 되겠지... 내 삶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토록 압축적인 갈등과 극적인 반전을 이뤄내지 못했기에 저 정도의 멋진 사람이 되지는  못했던 걸까 하는 아쉬움.

과거에는 미래의 일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는데, 나는 그때 꾸었던 미래의 그 어떤 것도 내 과거에 가져 본 적이 없다.


이런 감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함께 연극 연습을 하던 선생님들께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풀어놓았다.


"우리에게도 그런 게 있지. 젊음 같은 것 말이야. 우리 정신은 아직도 그때에 머물러 있어. 변한 건 오직 내 육체밖에 없는 데, 끝내 돌아갈 수가 없지. 돌아갈 수 없어."


그러면 그런 감정을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그냥 놓아두나요. 나는 물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지.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나도 본 또박또박 읽고 싶고 말도 빨리 하고 싶어. 그런데 그게 안 돼. 글자도 흐릿흐릿하고 말도 자꾸 더듬게 돼. 내가 여기서 빠져주는 게 가영 쌤처럼 젊은 분들을 위해 맞지 않나 하면서도 그래도 붙어 있어. 연기를 못하면 무대 청소라도 내가 해줄 수 있잖아. 그냥 그래서 있는 거야. 내 맘처럼 몸이 안 움직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남편에게도 고민을 말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사랑을 못하게 되었다고...


"왜 못 해?"

"이제 우리의 사랑은 너무 평탄하지 않나. 부모의 반대조차 없어."


남편이 대답한다.


"기다려 봐. 이번 명절에 부모님이랑 절연하고 올게."


그의 실없는 농담에 웃음이 난다.


"여보. 당신은 내가 드라마나 보면서 이런 얘기하면 기분 나쁘지 않아?"


"괜찮은데. 지금은 막 빠져있어도 결국 돌아올 거잖아, 나한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니 정신이 좀 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은 행복의 정점에서 카메라를 꺼버리는 그런 무책임한 드라마와는 다르다.

집안의 반대나 신분 차이, 연적의 등장보다 가혹하게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그런 시간의 시련을 함께 이겨내 보자 약속한 부부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십 대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닷새만에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격정적 사랑의 열정보다 삼십 년 이상을 함께 산 내 부모의 사랑이 더 절실하고 고되지 않았을까.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앞에 장애물로 서 있을 것이다. 우리를 계속해서 시험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해피엔딩이 정해진 16부작 드라마가 아니니 말이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사랑과 소망했던 어른의 모습이 아니면 좀 어떤가. 그래서 조금 아쉬워하고 아련해하고 눈물이 가끔 나면 그것 또한 어떤가.

다 괜찮다. 남편의 말처럼 나는 다시 돌아올 테니까.

더욱 값진 사랑과 소중한 내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지금 이 곳으로.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내가 꿈꾸었던 미래의 내 모습보다 훨씬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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