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일의 연속이었다. 현수막에 적힌 저렴한 가격에 이끌려 들어간 미용실에선 온갖 회유와 협박("그럼 머릿결 다 망가져요" 등)이 난무했다. 결국 나는 호갱이 되어 원치 않는 큰돈을 쓰고 말았다. 싼 가격을 이유로 서비스를 최소화하겠다고 적어놓았지만 나는 비싼 값을 치르고도 냉랭한 헤어 디자이너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다음날 방문한 도서관에선 서가에 있다는 책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어 사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돌아온 건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필요한 책을 빌리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사서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마음이 더 상한 채 도서관을 나왔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 지금 나 무시한 거지. 미용실을 다녀온 후부터 좋지 않던 감정은 더욱 심해져 갔다. 동시에 이게 정말 화가 날 일이 맞는지. 지금 내가 화를 내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갑의 위치에 있다고 믿기에 기분 나쁜 게 게 아닐까. 유병재의 말처럼 "굽실대지 않는 사람을 불친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봤다.
오늘 하루 느낀 것들에 대해 상담사인 형님께 이야기했다.
"저는 화가 나거나 하면 항상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옳은지."
"왜요?"
"내가 생각하는 게 틀릴 수 있잖아요. 화낼 일이 아닌데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닌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상대방에게 화를 내요?"
"화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죠. 그래도 화는 계속 나고 내가 그 감정에 빠져 있으니까 진짜 이게 그럴 만한 일이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궁금한 건 뭐예요?"
"그냥, 그런 행동이 맞는지. 다른 사람도 그런지. 내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꾸 타인에게 확인받으려고 하는 게 괜찮은지."
"왜 자기감정에 확신을 못해요?"
"내가 느끼는 게 보편적인 감정이 아닐 수 있잖아요."
한참 얘기를 들이시던 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질문에 대해 미리 답을 한다면 저는 그냥 '그럴 필요 없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화가 나는 감정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드는 거니까. 지금 화가 나는 게 옳으냐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그로 인해 다툼이 생겼다면 그건 생각해 볼 문제죠. 저는 본인의 행동이 옳은지에 대해 묻고 반성하는 가영 씨가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남에게 묻는 건 객관적이 될까요? 이미 가영 씨를 통해서 듣게 되는 제삼자가 가영 씨 자신보다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영 씨 본인이 가장 답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럴 필요 없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형님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사람의 심리에 대해 공부를 하는 것이 늘 이렇게 적절한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답을 알고 있는 사람 같다. 이런 사람은 자기 삶에 고민이 없을까, 언제나 현명한 선택만을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제가 걱정하는 건 가영 씨가 그런 감정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는 거예요."
형님의 말처럼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한 번 시작되면 그것에 지나치게 빠져있다. 어제 그 냉랭한 헤어 디자이너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오늘 도서관에서 사서가 내게 한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사서에게 책을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을 때는 다른 사서들이 식사를 하러 간 점심시간이었다. 혼자 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 힘들다는 사서의 말은 타당했지만, 나는 기어이 그녀의 태도를 트집 잡아 세상 사람들이 나를 너무 함부로 대한다고 격분했다.
사실 그 헤어 디자이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일하는 미용실은 디자이너에게 정해진 급여를 지불하는 것이 아닌 담당 손님에 대한 수당을 챙겨가는 방식으로 임금을 주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디자이너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고객을 받아야 했고 그 고객에게 최대한 많은 금액을 뽑아내야만 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그 날 그냥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다. 상사에게 혼이 났거나 진상 고객을 만났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인성과는 별개의 문제이고 또 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뜸 형님이 내게 물었다.
"가영 씨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어요? 가영 씨가 살고 싶은 세상엔 갑과 을이 존재하나요?"
그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갑, 을, 병, 정. 이것들은 원래 수평적 개념이었다. 언젠가부터 수직적인 힘의 논리가 갑과 을, 을과 병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나올 때 내가 떠올린 첫 문장은 '영원한 을은 없다'였다. 대개의 경우 '을'에 있던 내가 순간 '갑'의 위치가 되어 '갑질'을 한 게 아닌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갑과 을 사이에 어떠한 힘의 원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내가 갑이든 을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생기는 그런 연인 관계를 원하나.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그런 곳인가.
상담을 몇 번 하면서 깨달은 바는 내가 살고 싶은 모습대로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는 없을 갑을의 수직적 구분을 내 마음속에서 먼저 걷어낸다면 나는 오늘 또 하나의 고민을 덜어내는 것이다.
"숙제가 있어요. 가영 씨가 쓰고 싶은 책의 제목을 한 번 정해볼래요? 표지도 한 번 그려보면 좋겠고요."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글을 써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다고 말해 왔지만 정작 어떤 글을 누구에게 읽히고 싶은지, 어떤 감동을 주고 싶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책'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닌 '작가'란 타이틀을 원했던 사람이었다. 가방 안에서 저번 시간 형님이 빌려주신 책을 꺼냈다.
"죄송해요. 사실 다 읽지 못했어요. 잘 안 읽히더라고요. 문장이 나쁜 것도 아니고 글쓴이가 느낀 감정에 공감도 하겠는데 왠지 못 읽겠더라고요."
"맞아요. 이 책이 좋아서 읽어보라고 한 게 아니에요. 왜 안 읽히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했다. 읽기가 힘들었다.
"왜 힘들어요? 힘이 빠지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책은 작가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쓰고 있어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읽는 사람이 오히려 기운이 빠져버려요. 같이 우울해지는 거잖아요.
이 책은 제목부터 잘못됐어요. <나는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쓰면 안 되죠. 눈치 보지 않으면 당당한 건가요? 눈치를 안 본다는 게 이미 상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잖아요. 내가 주체가 되는 게 아니에요. 갑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나는 갑질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이미 갑과 을의 권력관계를 처음부터 상정해두고 하는 말이죠. 처음부터 갑을의 구분이 없어야죠. 그럼 이 책도 <나는 당당하게 살기로 했다>나 더 나아가서 <나는 표현하기로 했다>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 글을 써야 되지 않을까요?"
형님은 내게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라고 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수천 권의 책이 출판되고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정말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쓰라고 했다.
"책 내는 건 어렵지 않죠. 어떤 책을 쓰느냐가 중요하죠."하고 얘기하던 그 말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 내가 써야 하는 글. 그것은 상담 첫 시간에 알게 된 나의 진짜 모습. '내면의 아름다움을 아는' 나를 담은 글이어야 한다. 나만이 볼 수 있는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쓴 글, 그것이 내가 써야 하는 글이고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나는 내 인생의 무엇이다! 가영 씨는 본인 인생의 무엇이에요?"
"주인공?"
"아니죠. 주인공은 그냥 쓰인 대로 행동하는 수동적인 존재인데요? 가영 씨는 가영 씨 인생의 작가가 되어야죠. 창조성을 가진 작가!"
나는 '작가'로 살기로 했다. 책을 내기 위한 작가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