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못 돌리는 30대의 변명
할 것도 쌓여있는데
세탁기 돌리는 방법정도는
천천히 배워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세탁기 돌리는 법을 모른다
진짜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라
살면서 세탁기를 돌려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세탁기에 빨래 넣고, 세제 붓고
대충 아무 버튼이나 누르면 돌아가긴 하겠지
근데 그렇게 안 해도 내 옷은 항상
최상의 상태로 옷장에 걸려있고
수건과 속옷, 양말은 각 서랍마다 쌓여있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면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너 금수저야?
둘째, 언제까지 엄마 고생 시킬래?
셋째, 그래서 결혼은 하겠니?
이왕 말 나온 김에 내 생각을 말해볼까?
첫째, 너 금수저야?
만약 내가 평생 세탁기를 안 돌려도 되는
진짜 금수저라면
"너 금수저야?"라고 물어보는 인간과는
별로 상종 안 하고 싶을 것 같다
둘째, 언제까지 엄마 고생시킬래?
나는 세탁기 돌리는 거 빼고 다한다
밥하고, 청소하고
심지어 빨래도 칼각으로 갠다 이 말이다
심지에 우리 엄마는 오전 10시에 나갔다가
오후 8시가 넘어서 들어오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도 내가 훨씬 더 많다
얹혀사는 주제라 양심은 풀장착되어 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K 장녀라고!
셋째, 그래서 결혼은 하겠니?
결혼 선언문에 '세탁기 돌릴 줄 알기'가
필수라고 쓰여있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따지면 세탁기 안 돌려본 금수저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외롭게 늙어 죽어야 마땅하다
치킨집 자식은 힘든 날 치킨을 안 먹고,
삼겹살집 알바생은 고기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한다
세상엔 보고 배운 도둑질이 안 통할 때도 있는 법!
내 경우도 대충 비슷하다
이 나이 먹도록 세탁기 한번 안(못?)돌려본 이유는
내가 '세탁소집 딸내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사계절 내내 손이 부르터있고,
세탁 맡길 사람들도 놀러 가는 연휴에
굳이 굳이 가게 문을 여는 게 너무 싫었는데
그게 다 나 때문이었다
오늘도 우리 아빠 엄마는
내 몫의 세탁기까지 돌리고 있다
금이야 옥이야 귀한 대접에
지금껏 나만 뽀송뽀송한 인생을 살았다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줄게"라는 말은
앞으로 얼마나 더 신세를 져야 할 수 있을까?
치익치익- 말끔하게 다림질한 와이셔츠처럼
우리 아빠 엄마 인생도
구김 없이 짱짱하게 펴주고 싶다
맨날 염치없는 딸이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