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챗구멍에서 배우는 인생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면,
나는 어느새 해리포터 속 등장인물이 되어 있다.
덤블도어의 신임을 받는 충직한 부하이자
주인공 해리포터의 조력자 겸 절친한 친구,
바로 헤그리드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최 씨에 옥니이고, 곱슬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마라.'
그렇다.
나는 상종 말아야 할 조건 중
무려 두 가지에 해당된다.
최(崔)씨, 그리고 반곱슬.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숱까지 많아
미용실에 가면 레이어드 컷은 기본,
숱 치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머리를 감는 것까지는 견딜 만하다
하지만 말리는 건 글쎄...
살면서 하기 싫은 일 Top 5 안에 무조건 든다.
반곱슬 + 미친 숱 + 가슴 아래 기장
머리 감기 최악의 조건을 고루 갖춘 나의
'감기 루틴'을 잠깐 소개하자면 이렇다.
머리 빗질
샴푸 1회
헹구기
샴푸 2회
헹구기
린스 1회
헹구기
타월드라이
뿌리는 트리트먼트 1회
드라이기로 말리기
헤어 에센스 1회
롤빗 C컬 스타일링
헤어로션 1회
고정 스프레이 1회
이게 내가 머리를 매일 감지 않는
충분히 타당한 이유다.
출근이나 약속이 있을 때는 당연히 감지만,
강아지 산책이나 마트 갈 때 정도는
안 감아도 수치심(?)을 못 느낀다.
보통 이틀에 한 번 머리를 감는데
아주 가끔, 진짜 가끔
3일 정도 못 감는 날이 있다.
이때는 이상하게도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거의 3배 가까이 더 빠진다.
혹시 머리를 너무 안 감아서 탈모가 온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검색해 본 결과,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첫째, 하루에 빠지는 머리카락 수는 정해져 있다.
둘째, 빠진 만큼 다시 자란다. (자라지 않으면 탈모)
그러니까 오늘 빠지지 못한 머리카락이
내일 감을 때 한꺼번에 빠지는 것일 뿐,
다행히 탈모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수챗구멍에 시커멓게 빠진 머리카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치 할당량이 정해진 머리카락처럼
내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어차피 써야 할 마음이라면
재지 않고, 간 보지 않고
아낌없이 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하루치 마음을
누군가에게 다 써버리고 싶은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