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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Mar 02. 2024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에 나타난 단어 의미의 확장

두 단어가 서로 가까워지는 방법

 좋아하는 영화 중에 시카리오 시리즈가 있다.  

 1편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2015년에 개봉했다. 드니 빌뇌브가 감독을 맡았고 에밀리 블런트와 조슈 브롤린, 베니시오 델 토로가 주연으로 나온다. 

https://namu.wiki/w/%EC%8B%9C%EC%B9%B4%EB%A6%AC%EC%98%A4:%20%EC%95%94%EC%82%B4%EC%9E%90%EC%9D%98%20%EB%8F%84%EC%8B%9C

 2편은 스테파노 솔리마가 감독을 맡아서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라는 제목으로 3년 뒤인 2018년에 개봉했다. 조슈 브롤린과 베니시오 델 토로는 그대로 나오지만 에밀리 블런트가 빠지고 이사벨라 모너라는 아역이 추가됐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 솔다도(Soldado)는 스페인어로 군인을 뜻한다. 

https://namu.wiki/w/%EC%8B%9C%EC%B9%B4%EB%A6%AC%EC%98%A4:%20%EB%8D%B0%EC%9D%B4%20%EC%98%A4%EB%B8%8C%20%EC%86%94%EB%8B%A4%EB%8F%84

 두 편 모두 몇 번이나 재밌게 본 영화다. 요즘에도 TV를 켰는데 나오고 있으면 순식간에 빠져들어 어느 순간 엔딩 크레디트까지 보곤 하는데, 얼마 전 TV에서 다시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만나 즐겁게 시청하다가 문득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어떤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극에서 CIA로 나오는 조슈 브롤린이 상관과 함께 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 몇몇이 모여 있는 장관 집무실로 가서, 최근 마트에서 발생한 자살 테러와 관련해 회의하는 장면이었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살 테러범의 밀입국 경로를 추적했는데 이들의 밀입국을 멕시코 레예스 카르텔이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와 관련해 장관이 CIA 요원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대사이다.

장관: “카르텔들이 국내로 밀반입하는 것 중에 가장 돈이 되는 상품이 뭔가?”
CIA 요원(조슈 브롤린): “20년 전엔 코카인이었죠. 요즘은 사람입니다. 생산, 가공이 필요 없고 밀입국에 실패해도 코카인 1kg 밀수비의 세 배를 내고 재시도하니까.”
장관: “테러리즘을 어떻게 정의하겠나?”
CIA 요원: “그건 장관님의 일 같습니다.”
장관: “현재 정의로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지. 우린 마약 카르텔들이 그 범주에 든다고 보네.” 
참모 1: “다음 주에 대통령께서 마약 카르텔들을 테러 조직 리스트에 추가하실 걸세.”
장관: “우리의 대응 전력도 훨씬 보강되겠지.” 
참모 2: “현재 카르텔의 구역은 안정된 상황이지만 이라크에서 봤듯이 내분이 일어나면 공격이 훨씬 쉽지.”
CIA 요원: “뭐든 해드리죠. 말씀만 하세요.”

 그날따라 “테러리즘을 어떻게 정의하겠나?”라는 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현실의 어떤 부분을 각자의 상황과 지식 배경을 토대로 추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100% 정확히 일치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 것 같다. 다만 대부분의 대화에서 단어 정의의 세세한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적당히 필터링하거나 중심 의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뭉개고 이야기를 진행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다. 

 단어는 아메바와 같다. 시대나 지역, 집단, 사용하는 순간의 화자나 청자의 상황 혹은 감정 등 크고 작은 수많은 환경 변수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고 때에 따라서 슬며시 다른 쪽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단어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아예 소멸해 버리기도 한다. 

 위 장면이 나에게는 ‘테러리즘’과 ‘마약 카르텔’이라는 단어가 서로의 영역으로 자기 촉수를 뻗어 나간 장면으로 다가왔다.

 장관의 말에 따르면 테러리즘의 정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약 카르텔은 약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경제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해 온 집단이므로 그동안에는 테러 조직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자살 테러범의 밀입국을 도운 바람에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일에 발을 걸치고 말았다. 끄트머리에 살짝 걸친 정도일 테지만 어쨌든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만 것이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정말로 다음 주에 마약 카르텔을 테러 조직 리스트에 추가한 뒤 발표한다면, 이제 미국인들은 마약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머릿속에 테러리즘이라는 단어가 같이 떠오를 것이다. 대통령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일단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그것이 권력과 언론의 힘이니까). 

 그 후 검증 과정을 거칠 것이다. 만약 그 연결 논리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못한다면 잠시 뻗었던 촉수는 다시 움츠러들면서 원래 자리로 돌아올 것이고,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다면 각 단어의 의미는 서로의 방향으로 확장될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에는 마약 카르텔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던 이미지가, 마약 카르텔이라는 단어에는 테러리즘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던 이미지가 조금씩 덧붙을 것이다. 그렇게 그 두 단어가 계속 밀접해진다면 어느 날 이런 대화가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야이 테러리스트 같은 놈아!”
“뭐? 우린 그저 약 좀 팔았을 뿐이야!”
“그놈이 그 놈이지! 뭐가 다르다고!”

 이 대화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마약 카르텔과 테러리즘이 그 정도로 가까워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해 두 단어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이 쏟아진다. 예를 들어 최근 정청래라는 의원은 이재명이라는 단어를 손흥민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다. 

https://www.imaeil.com/page/view/2024022812333472637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이 발언은 당내에서 정청래라는 사람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는 도움이 됐을지언정 단어 의미의 연결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성공했다면 한국 사회에서 손흥민이라는 축구 선수가 갖고 있는 이미지의 일부가 이재명이라는 단어에 붙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 꼭 좋은 이미지만 가서 붙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붙을지는 미지수로 결국 그 단어를 널리 사용할 대중이 결정할 것이다.

 가수 비비 역시 가수 본인이 시도하는 것인지 언론이 시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지의 아이유’라는 문구를 내세워 ‘아이유’라는 단어와 '비비'라는 단어를 연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성공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음원 성적이 좋아서 한동안은 더 이 시도가 탄력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272#home

 이런 방식으로 자의든 타의든 어느 정도 이미지를 가져오는 데 성공하는 경우는 많다. 우리 사회에는 어느 순간 서로 잘 연결돼 특정 집단의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마치 죽마고우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들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에서는 '보수'와 '수구꼴통', '진보'와 '종북좌빨'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김건희’라는 단어도 ‘줄리’와 ‘도이치모터스’라는 단어와 어느 정도 이미지가 연결돼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둘 중 어느 한 단어를 들었을 때 자연스레 다른 두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윤석열’과 ‘도리도리’도 어느 정도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재명’은 ‘손흥민’과는 모르겠지만 ‘찢재명’과는 어느 정도 연결돼 있다.

 

 단어는 결국 어떤 부분을 정확히 가리키고 싶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뜻이 무한히 확장될 수는 없다. 아메바는 무한히 커지지 않는다. 어떤 방향으로 촉수를 뻗다 보면 자연스레 그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다. 

 앞서 영화 속 CIA 요원은 장관이 ‘테러리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마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의견을 낼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능구렁이처럼 ‘그건 장관님의 일’이라고 떠 넘기고 자신의 영역을 지킨 것이다.

 관련해서 리버풀의 클롭 감독 님도 생각난다. 그 역시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던 시절에 FA컵 첼시전 직후 기자들로부터 코로나와 관련된 질문을 받자 정색하며 아래와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정치나 코로나 문제를 왜 나한테 묻는가? 나는 야구 모자를 쓰고 수염 기른 남자다. … 나는 심각한 여러 사안에서 축구 감독의 의견이 중요시되는 것을 싫어한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다. 유명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이 진리는 아니다. … 나처럼 지식은 없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이 올바르게 언급해야 한다. 이런 사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이야기하고 지시해야 한다. 풋볼 매니저라면 모를까 나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다. … 다른 사람처럼 이번 사태가 걱정된다. 모두가 안전하기를 원하지만 코로나 사태에 대해 내 의견을 낼 입장은 아니다.”

 클롭 감독이 정말 아무 생각이나 아무 의견도 없어서 이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 혹은 친구와는 이런저런 의견을 나눴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축구 감독으로서 공식석상에서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담당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 대한 질문에 불필요하게 이런저런 의견을 밝히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건 내 일이 아닙니다’라고 밝힌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원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 관심을 갖고 공식적으로 꾸준히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는 자신의 이름이 해당 영역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게 본인과 해당 영역에 도움이 되는지는 다른 문제 이긴 하지만.

https://www.seoul.co.kr/news/society/2024/01/30/20240130500006

 '차범근'이라는 단어는 무한히 뜻을 확장할 없다. 그가 앞으로도 꾸준히 정치에 목소리를 낸다면 '차범근'이라는 단어 아메바는 정치를 향해 촉수를 뻗다가 결국 원래 있던 축구 영역에서 정치 영역으로 이동하게 것이고, '차범근'이라는 단어는 '축구 영웅'이라는 단어와는 점점 소원해질 것이다. 아래와 같이 차범근의 아내는 차범근의 이런 행보에 동의하는 것 같지 않지만.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9122610&code=611213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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