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lenteur
작년 늦여름께, 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난 뒤 두어 달 정도 지났을 즈음 서점에 들렀는데 통로 한가운데 설치된 매대에 추모 문구와 함께 이 책이 진열돼 있어서 집어왔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21053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 정도의 책은 아니었다. 밀란 쿤데라에게 큰 관심이 없다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는 잘 아껴뒀다가 다른 책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한 장소에서 서로 다른 인물이 주인공인 별개의 네 이야기가 번갈아 서술되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볍기 때문에 시트콤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먼저 가장 바깥에서 소설가인 화자(이름은 밀란쿠)가 아내와 함께 호텔로 탈바꿈한 프랑스의 어느 성에서 하루 묶고 오는 이야기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흘러간다. 설정된 배경은 ‘느림'이 발표된 1990년대 프랑스로 보인다. 화자는 차를 몰고 성으로 가는 길에 작은 에피소드를 겪고 ‘느림'이라는 화두를 떠올리며, 이 화두를 소재로 머릿속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창작하는데 이 세 이야기가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각각 병렬로 진행된다.
다른 한 이야기는 화자가 비방 드농의 소설 ‘내일은 없다'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야기다. 시대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화자가 묵고 있는 성에서 18세기 프랑스의 어느 한 기사와 귀족 부인이 하룻밤 정사를 나눈 뒤 헤어지는 불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재는 불륜이지만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느림'이다. 서로 호감을 느끼는 두 사람이 만나 정사를 나눈 뒤 이별하는 과정이 현대와 다르게 조금 더 복잡한 정신적 단계를 거치며 조금 더 느리게 전개되는 것이 포인트다.
그들이 서로 그토록 가까이 있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요, 그들을 감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관능적 분위기가 바로 리듬의 느림에서 생겨난다. 마차의 움직임에 흔들려 두 육체가 처음에는 그들 몰래 접촉하다가 곧 그들이 알게 접촉하며, 그리하여 이야기가 엮인다.
서로의 본능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이 이야기에서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인공들이 조심스럽게 한 수씩 번갈아 펼치는 ‘정신의 행보'를 묘사한 부분이 썩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인위적이요, 안배되었고, 조작되었으며, 모든 것이 연출이요, 무엇 하나 자연적이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게 예술인 것이다. 이 경우엔, 긴박감을 연장하는 예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오랫동안 흥분 상태를 연장하는 예술.
나머지 두 이야기 역시 이 성을 배경으로, 이번에는 화자와 같은 시대에서 진행된다.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심하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곤충학자로 한 사람은 프랑스 청년 남성 ‘뱅상’, 또 한 사람은 체코 중년 남성 ‘체-호-르집스-키’이다(이름을 이렇게 적은 것은 작중에서 본인이 이렇게 발음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다른 이들의 관심과 칭찬, 찬동을 얻기 위해 이 성에서 열리는 곤충 학회에 참석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인물의 방해로 이를 얻는 데 실패하고 좌절한 뒤 망각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여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이 네 이야기가 짧은 호흡으로 교차 진행되는 와중에 화자는 자신의 상상 속 이야기에 수시로 괄호를 열고 개입해 독자를 향해 부연 설명을 하거나 공감을 유도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갑자기 인물들의 대사를 극본 형식으로 전개하기도 한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인데 마지막에는 현실과 시간을 초월해서 화자가 자신의 상상 속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실제로 스치듯 만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런 독특한 요소들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순간 맥락을 놓쳐 내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런 특이한 구성이 신선하다기보다는 불편했고, 책 읽는 재미를 반감시켰다.
읽으면서 특별히 아쉬웠던 부분이나 특별히 좋았던 부분을 남긴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인사이트가 전혀 없는 책은 아니었다.
책은 가장 바깥 이야기로 시작된다. 소설가인 화자가 성에서 하루 묶어보고 싶어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호텔로 바뀐 어느 성을 찾아가는데 가는 길에 문득 사이드 미러를 통해 뒤차가 자신을 추월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본 화자는 속도라는 엑스터시에 지나치게 몰입해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시대라고 탄식하면서도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 이해한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 자신의 아내, 자신의 아이들, 자신이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나 역시 어느덧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시대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것도, 러닝이나 라이딩, 하이킹, 수영, 독서, 쇼핑, 게임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망각을 통해 천연 엑스터시를 얻고자 하는 갈망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문단은 조금 아쉬웠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최근 자동차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아들 덕분에 ‘F1, 본능의 질주'라는 넷플릭스 제작 다큐멘터리를 종종 함께 시청하는데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F1 선수들이 주행 중 최대 4G에 이르는 중력가속도를 견뎌내면서 예민한 머신을 섬세하게 다루기 위해 어떤 육체적 훈련을 받는지 알게 됐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하필 이 장면이 생각나 몰입이 깨졌다. 수시로 언론에 등장하는 고령운전자 이슈가 떠오르기도 했고.
이 소설에는 ‘춤꾼'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한다. 작가가 ‘춤꾼'들을 다루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가가 말하는 춤꾼은 ‘자신의 도덕 수준을 뽐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고급 관심종자'라고 할 수 있겠다.
명예를 갈구하는 춤꾼. 자신의 자아를 빛내기 위해 무대를 차지하는, 명예를 갈구하는 춤꾼.
끊임없이 스스로를 대중에게 전시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춤꾼은 비난할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해. 그는 파우스트처럼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 천사와 계약을 맺은 거야. 그는 자신의 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고 하고 그 작업을 천사가 돕지. 왜냐하면 잊지 마, 춤은 예술이기 때문이야! 자신의 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의 소재로 보려는 그 강박 관념 속에 춤꾼의 참 본질이 있어. 그는 도덕을 설교하는 게 아니라, 도덕을 춤추는 거야! 그는 제 삶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감격시키고 눈부시게 하려는 거지! 그는 마치 조각가가 자신이 조각 중인 조각상을 사랑하듯 제 삶을 사랑해.
다른 모든 종류의 관심종자들이 그렇듯 이 춤꾼들 역시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도덕 씨름'이라는 형태로 시비를 건다.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는 특별한 전투 기술을 전제로 한다. 춤꾼이 행하는 전투, 퐁트벵은 그것을 도덕 씨름이라 부른다. 춤꾼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누가 그보다 도덕적이라고(좀 더 용기 있고,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성실하고, 좀 더 희생적이고, 좀 더 진실하다고) 자처할 수 있는가? 그는 상대를 자기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상황에 처하게 할 갖은 기술을 다 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행위들이 춤꾼들의 도덕 씨름이다.
그는 자신의 제의들을 공개적으로, 연단 위에서, 노래하면서, 춤을 추면서 개진할 것이며 일일이 이름까지 거명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뒤따르도록 호소할 것이다. 은밀하게(상대에게 숙고할 시간, 반대 제의들을 논의할 시간을 주기 위해)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되도록이면 경악스럽게. “당신은 소말리아 어린이들을 위해 당신의 3월 봉급을 (나처럼) 즉각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깜짝 놀란 그 사람들에겐 두 가지 가능성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 거부하며 아이들의 적으로서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 끔찍한 당혹 안에서 “예"라고 말하거나.
혹시나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의 씨앗은 살면서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할 확률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인생에 끼친다. 세상에는 이런 심리를 비즈니스에 잘 적용한 사례가 많다. 복권도 그렇고 보험도 그렇고, 이 책에서 말하는 유명해지는 일도 그렇다. 이런 확률들은 그 확률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저자의 말처럼 삶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명예의 성격이 변한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것은 소수 특권층에만 관계된 일이라고 여러분은 말한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명예는 유명 인사들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계된 것인 까닭이다. 오늘날 유명인들은 잡지 페이지 위,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며 모든 이의 상상력에 침투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한낱 꿈에 불과한 일일지라도 그러한 명예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근심한다. 그 가능성은 모든 이를 그림자처럼 뒤쫓으며 삶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실존이 갖는 각각의 새로운 가능성은, 비록 그것이 극히 있음 직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실존 전체를 탈바꿈시키는 까닭이다.
책 자체는 사실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책에 나온 인물들은 모두 흥미로웠다. 어떻게 보면 인물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은 것도 같다. 밀란 쿤데라가 인물을 창조하는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체코의 중년 곤충학자 ‘체-호-르집스-키’이다.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경우 어째서 경제적 이유로 야기된 불행이 덜 중요하고 덜 심각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상사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은 수치를 느껴야 하는 반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직위를 잃은 자에겐 이를 자랑스러워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어째서?
경제적 이유로 해고된 경우, 해고된 자는 수동적 역할을 하고 그의 태도에 칭찬할 만한 어떤 용기도 없는 까닭이다.
이는 자명해 보이나 그렇지가 않다. 1968년 이후 직무에서 추방된 체코 학자 역시, 러시아 군대가 그 나라에 매우 가증스러운 체제를 정착시켰을 때, 용기 있는 어떤 행동도 수행한 적이 없는 까닭이다. 학회의 한 부서 책임자로서 그는 다만 파리들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반체제 인사 십여 명이 사무실로 쳐들어와 자기들이 비밀 집회를 할 수 있도록 방 하나를 이용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도덕 씨름의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 스스로 소규모 관찰자 대중을 이루어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 뜻밖의 대면에 학자는 완전히 당혹했다. “예.”라고 말하면 즉각 아주 고약한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자신의 직위를 잃을 수 있고, 자녀 셋이 대학 입학을 금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작부터 거의 소심함을 비웃는 그 작은 대중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만한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결국 그는 동의하고 말았으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소심함, 자신의 나약함,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에 대해 모멸감을 맛보았다. 결국 정확히 보자면, 뒤이어 그가 직무에서 쫓겨나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추방된 것은 그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그게 그렇다면, 젠장 대관절 어째서 그가 긍지를 느낀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는 그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자신의 격렬한 반감을 잊어버렸으며, 당시 그의 “예.” 안에서 자유롭고 의지적인 행위, 증오하는 권력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반항의 표현을 보는 데 익숙해졌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이 역사의 위대한 무대 위에 오른 자들에 속한다고 믿으며 바로 이 확신에서 자신의 긍지를 길어 내는 것이다. … 그 체코 학자의 긍지는 그가 아무 때나 역사의 무대에 오른 게 아니라 그 무대가 밝게 조명된 바로 그 순간에 올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역사의 조명된 무대, 그것은 지상의 역사적 뉴스라 불린다. 투광기들에 의해 조명되고 카메라들에 의해 관찰된, 1968년의 프라하는 둘도 없는 지상의 역사적 뉴스거리였으며 체코 학자는 오늘까지도 이마에 그 입맞춤을 느끼며 긍지를 갖는 것이다.
두 인물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발생한 각 인물의 심리 변화와 이에 따른 신체 변화를 세밀한 부분까지 캐치해 글로 묘사해 내는 밀란 쿤데라의 능력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실로 대단하다.
기사는 그 시선에서 뭔가 말해야겠다는 완고한 욕구를 본다. 그 완고함 속의 뭔가가 그의 마음에 거슬린다.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그 조바심이 곧 듣는 일에 대한 가차 없는 무관심임을 그는 깨닫는다. 상대의 그 욕구와 맞닥뜨리는 즉시, 기사는 얘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고, 대번에 그는 이 만남을 연장해야 할 어떤 이유도 보지 못한다.
그는 새삼 피로의 물결을 느낀다.
그는 상대의 얼굴에서 어떤 호기심을 엿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곧이어 돌연히, 설명할 길 없이, 그것은 꺼져 버렸고 뻔뻔스럽기까지 한 무관심에 덮여 버렸다. 속내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그 우애의 분위기가 겨우 일 분쯤 지속되다가 일시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러는 그에게 경멸의 시선을 날린 뒤 사내는 몸을 돌려 마차 쪽으로 향해 간다.
사내가 내뱉은 그 경멸은 다시금 뱅상을 저 뒤 멀리 예의 그 곤혹스러움 속에 잠기게 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허약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그 난교 파티 이야기를 하지 못하리란 걸 깨닫는다. 거짓말할 기력이 없을 것이다. 거짓말하기엔 그가 너무 슬프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한 가지 욕구뿐. 어서 빨리 이 밤을, 이 잡친 하룻밤을 잊어버리는 것. 이를 지워 버리고 말소하고 무화해 버리는 것.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순간 속도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단호한 걸음으로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 쪽으로 서둘러 간다.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에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에 대한 사랑에 충만했으며, 오토바이 위에서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그 자신마저도 잊어버릴 것이다.
침묵을 침묵하는 사람들의 이유에 따라 분류한 뒤 이를 글로 표현했다.
그가 의자를 향해 가는 동안 침묵이 실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들이 실내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 여러 침묵들 가운데 학자가 알아보는 것은 다만 하나, 감격한 침묵. 그는 마치 소나타 곡에서 한 톤을 다른 한 톤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느낄 수 없는 어떤 변조처럼 점진적으로, 그 감격한 침묵이 억지 침묵으로 변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연하다'라는 표현을 배웠다.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의연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멋진 표현을 알려주신 번역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뉴스, 드라마, 영화, 책 등 거의 모든 콘텐츠를 YouTube 요약본으로 소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tl;dr의 시대를 참신하게 표현한 문단도 있었다.
뉴스 추종자들이 곧잘 틀리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역사가 연출하는 상황들이 단지 최초의 몇 분만 조명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떤 사건도 진행되는 전 기간 동안 뉴스거리가 되는 게 아니며 단지 시작의 매우 짧은 한 시점만 뉴스거리일 뿐이다. … 사람들이 당대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베토벤의 작품 백서른여덟 곡을 연이어 연주하되 다만 각 악곡의 첫 여덟 소절만 연주하여 소개하는 그런 대연주회와 흡사하다. 만약 십 년이 지나서 또 같은 연주회를 연다면, 아마 각 곡의 첫 번째 음정 하나씩만을, 즉 연주회 전체에 걸쳐 백서른여덟 개의 음정들을 마치 하나의 멜로디처럼 연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나서는 베토벤의 음악 전체가 매우 길고 날카로운 하나의 음정으로 요약될 것인데 아마 이는 귀가 먹던 첫날에 그가 들었던, 매우 높고 끝없이 길기만 하던 바로 그 음과 흡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