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dent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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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종종 혼자 있을 때와 가족과 있을 때, 친구와 있을 때, 연인과 있을 때, 일터에서의 내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자각할 때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이해관계로 얽히느냐에 따라 내 언행은 조금씩 달라지고, 필요한 순간에는 속내를 감추고 위장하며 위선을 떨기도 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면 위선이라고 생각했던 겉모습이 조금씩 안으로 흘러들어와 실제 내 속내가 돼버리기도 한다.
이 소설은 정체성이라는 소재를 샹탈과 장마르크라는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로 엮어낸 이야기다. 더 이상 길거리의 남자들이 나이 든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진 샹탈. 그런 연인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 마치 ‘시라노’처럼 익명으로 자신의 연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장마르크. 이 둘의 사랑 이야기가 이 소설의 메인 플롯이다. 여기에 샹탈과 장마르크가 각자 나름의 사정으로 정체성과 관련해 겪는 문제들이 얽히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같은 작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과 비교할 만한 책은 아니었지만 간직하고 싶어서 발췌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문단은 여러 개 있었다. 바꿔 말하면 부분 부분 감탄을 자아내는 문단은 있었지만 이를 모두 꿰어 놓은 것은 별로였다는 것.
가장 인상 깊었던 문단은 샹탈이 아들의 무덤 앞에서 자신의 진짜 속내를 아들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샹탈은 이 소설에서 가장 깊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다음 날, 그녀는 공동묘지로 가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그러했듯) 아들의 무덤 앞에 섰다. 그녀는 거기에 가면 항상 그에게 말을 했고 그날도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듯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가 저지르는 바로잡을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갔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검색해 보니 자녀는 물론 결혼도 하지 않았던 밀란 쿤데라가 어떻게 이런 문단을 뽑아낸 것일까. 부모로서 아무도 누구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않을 속내다. 어지간해서는 스스로도 인정하기 쉽지 않은 이런 심리를 어떻게 포착한 것일까. 경험해 보지 않은 감정을 포착해 글로 풀어낸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권태가 측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권태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었다고 할 수 있지. 과거의 직업은, 적어도 대부분의 직업은 정열적 집착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지. 그들의 땅과 사랑에 빠진 농부, 아름다운 탁자를 만들어 내는 마술사인 내 할아버지, 모든 마을 사람들의 발 크기를 외우던 구두 수선공, 그리고 산지기, 정원사도 마찬가지였어. 당시에는 군인도 아마 정열적으로 살인을 했을 거야. 삶의 의미는 문제 되지 않았지. 삶의 의미가 그들의 공장, 그들의 밭에 그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거야. 각각의 직업은 그 고유한 직업의식, 존재 방식을 낳았지. 의사는 농부와는 다른 식으로 생각했고 군인은 초등학교 교사와는 다른 행동 양식을 가졌지. 오늘날 우리는 모두 비슷해.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무관심하다는 공통점으로 균일화된 거지. 이러한 무관심이 열정이 된 거야. 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요즘 자신의 직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 감정에 매몰돼 그 일에 진정으로 매진하고 있는 동료들까지 혐오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녀가 혐오하는 것에 그토록 쉽게 적응하는 것이 과연 칭찬할 만한 일일까? 두 얼굴을 갖는 것, 그것이 정말 승리일까? 그는 그녀가 광고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이단자, 스파이, 위장한 적,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굳이 정치적 용어를 빌리자면 부역자다. 혐오하는 권력에 자신을 동화하지는 않으면서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위해 일하고 어느 날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에겐 두 얼굴이 있다고 핑계를 댈 부역자.
아마도 그래서 흑백 요리사의 요리사들처럼 자신의 직업에 진심을 다하며 진정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일 게다. 그렇게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가능성과 희망. 무엇이든 상상하고 기대하며 설렐 때가 제일 좋은 법이다. 홀로 지내던 샹탈이 장마르크를 만나 이어지는 순간, 샹탈의 눈앞에 펼쳐져 있던 모든 가능성 중 장마르크라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 남아 환원되고 다른 모든 가능성은 소멸됐다.
장마르크는 모든 가능성의 소멸을 상징하고 그녀 삶을 유일한 가능성으로 환원(행복한 환원일지라도)한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녀는 나뭇가지의 속삭임을 혼자, 그 없이 들으려고 했던 것이다.
우정을 정의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얻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가 내가 적당히 뭉뚱그려 느끼고 있던 감정을 예리한 시선으로 명쾌하게 풀어낸 문장을 만나서 그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우정에 대해 내가 느끼던 감정을 잘 정리한 문단을 만나서 기쁘고 즐거웠다.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고, 이 물 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의 규칙적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자아를 비춰 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을 바랄 따름이지.
우정이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필경 적대자에 대한 하나의 연대감, 그것이 없다면 적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연대 같은 것일 거야. 아마도 이제는 이러한 연대가 더 이상 필요 없는지도 모르지.
적이란 항상 있게 마련인데.
맞아. 하지만 그 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름도 없어. 관료 조직, 법률 같은 거야. 당신 창문 앞에 누가 공항을 건설한다고 결정하거나 혹은 당신을 해고했을 때 친구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어? 누군가 당신을 돕는다 해도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누구, 즉 사회 복지 기구, 소비자 보호 연맹, 변호사 사무실 같은 거지. 어떤 시련으로도 더 이상 우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친구를 찾아 나서거나 도적 떼로부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칼을 뽑는 것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거야. 우리는 큰 위험이 없는, 그러니까 우정도 없는 삶을 헤쳐가는 거야. … 과거의 알맹이가 빠져 버린 우정은 오늘날에는 상호 존중의 계약, 한 마디로 예절 계약으로 변질되었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침묵’. 실로 멋진 표현이다. 게다가 연인과 침묵, 경멸하는 세계와 사랑의 관계를 이 짧은 문단에서 이토록 멋지게 엮어내다니.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침묵을 관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침묵할 수도 있을 텐데.
아니야,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 날 순 없어.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내 일거수일투족에 참견하며 영향을 끼칠 누군가가 생겨난다는 것과 같다. 나를 나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적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친구, 내 동료, 내 주변 사람들이다.
그녀는 시누이와 장마르크, 모든 감시와 염탐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녀 삶, 그녀에게 들러붙어 그녀를 짓누르던 삶으로부터 멀어진다고 느꼈다. ‘시야에서 사라지다.’라는 표현이 문득 떠올랐고 실종을 향한 여행이 우울하기는커녕 그녀의 장밋빛 신화의 가호 아래에서 부드럽고 경쾌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처럼 인상적인 문단이 많았는데도 전체적으로는 별로라고 평가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결말 때문이다. 소설 막바지에 샹탈의 몽상이 묘사되다가 갑자기 그 몽상이 그대로 현실로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분명 전체적으로는 모네의 그림인데 한 귀퉁이만 생뚱맞게 피카소의 화풍으로 그려져 있는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랄까. 이전에 읽었던 ‘느림’에서도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부분이 있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쓰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인데 ‘정체성’과 ‘느림’에서는 그 기법이 썩 훌륭하게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