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마블과 카탄

by gnugeun

종종 온 가족이 모여 보드 게임을 즐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젠가나 할리갈리, 도블과 같이 아주 단순한 보드 게임을 즐겼다. 단순하지만 다 나름의 확실한 재미를 갖춘 게임들이어서 어른들도 함께 재밌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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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셈셈피자가게나 쿼리도, 루미큐브, 인생 게임 등 조금씩 규칙 이해 난도를 올려가며 게임을 교체해 왔다(셈셈피자가게는 애들은 좋아했지만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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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B%AF%B8%ED%81%90%EB%B8%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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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최근에 부루마블과 카탄을 구입해서 한 번씩 즐겼는데 두 게임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특히 두 게임에서 모두 최하위를 기록한 첫째의 반응은 천지차이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6%80%EB%A3%A8%EB%A7%88%EB%B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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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만 놓고 보자면 첫째의 성적은 두 게임 모두 좋지 않았다. 부루마블에서는 가장 먼저 파산했고, 카탄에서도 둘째가 10점을 달성해 게임을 끝낼 때 6점으로 가장 점수가 낮았다.

그런데 부루마블을 할 때는 첫째는 물론 둘째마저도 중간에 울고 불면서 난리를 친 반면 카탄은 꼴찌한 첫째까지도 신나게 웃으며 게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남을 파산시키는 게 목적인 부루마블, 내가 10점을 만드는 게 목적인 카탄

일단 부루마블과 카탄은 게임의 목적이 다르다.

부루마블은 다른 모든 플레이어를 파산시키는 게 목적이다. 내가 땅이나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게임 승패의 기준이 내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에게 있기 때문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끝까지 탐욕적으로 플레이해야 한다. 중간 성적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게임이 끝날 때 내 결과는 0 아니면 1이다. 내가 다 가졌거나, 아니면 파산했거나.

반면 카탄은 내가 먼저 10점을 달성하면 이기는 게임이다. 점수는 누구 것을 빼앗아 얻는 게 아니라 빈 땅에 도로나 마을을 건설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다. 상대방 점수를 가져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게임 승패의 기준이 자신한테 있으며, 모두 다 같이 10점을 향해 달려가는 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 점수도 의미가 있고, 비록 내가 먼저 10점을 만들지 못해 게임에서 지더라도 게임이 끝나는 순간 그동안 쌓아온 만큼의 결과는 손에 남길 수 있다.


보아라, 결국 파국이다!

부루마블은 철저히 주사위 운에 기대는 게임이다. 게임 내내 주사위를 잘 던지는 것 외에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운이 따르지 않아 땅을 제대로 확보해 놓지 못하면 확률 싸움에서 밀려 시간이 갈수록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든다. 한 번 판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불안에 떨며 주사위를 던진 뒤 통행료를 헌납하는 것 외에 게임 내에서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때부터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서서히 파산해 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뿐이다.

첫 부루마불 때 하필 첫째가 딱 그런 상황에 놓였다. 첫 바퀴를 시작하자마자 그대로 무인도에 빨려 들어간 뒤 주사위 더블이 나오지 않아 세 턴을 내리 쉬고 나오는 바람에 판세가 순식간에 기울었다. 본인도 본인이 굉장히 불리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렇다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기고 있는 게임을 혼자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회복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딴에는 잘해보겠다고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기합을 넣었지만 운은 계속 따라주지 않았다. 안쓰러웠다. 남은 시간 동안 첫째가 할 수 있는 것은 비장한 표정으로 주사위를 던진 뒤 울먹이며 통행료를 내다가 파산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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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부루마블은 첫째의 대성통곡으로 끝났다.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 카탄

물론 카탄 역시 주사위 운에 어느 정도 의지하기는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상대방과의 자원 거래나 도로 및 마을 건설 시의 위치 선정, 도둑 옮기기 등을 이용해 어느 정도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조금 더 적극적인 견제 혹은 협력이 가능하다. 초반에 주사위 운이 좀 따르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겨서 게임을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이 최소한 부루마블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다.

또한 설사 어떻게 해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앞서 말한 거래나 도둑 옮기기 등을 이용해 1등을 견제하는 역할은 담당할 수 있다. 즉, 게임 참여자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게임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이번에 카탄을 하면서 느낀 카탄이라는 보드 게임의 백미다.

앞서 말했듯 첫째는 카탄에서도 꼴찌를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웃으며 게임을 끝낼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가 게임이 끝날 때까지 1등 견제에는 많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선두로 치고 나가는 순간 다른 모든 가족은 타도 아빠를 외치며 연합을 결성했고, 자기들끼리 거래를 통해 서로서로를 밀어주거나 도둑을 내 땅으로 계속 옮겨놓는 등의 방법으로 나를 치열하게 견제했다. 이때부터 첫째는 10점 달성 외에 또 하나의 목표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며, 그 목표 달성에 성공해 둘째가 10점을 얻고 1등으로 게임을 끝내는 순간 모두가 기쁘게 (물론 나는 겉으로는 아쉬운 티를 내야 했지만) 게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초등 저학년 애들을 데리고 보드 게임을 하겠다면 카탄을 적극 추천한다. 특히 아빠가 진심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아이들에게 져줘야 하는 접대 게임을 해야 할 경우 아주 좋은 게임이다. 거래를 통해 티 안 나게 아이들을 지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마오

카탄을 하면서 이 세상도 부루마블이 아니라 카탄 같은 세상이 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점에 올라서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평생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목표와 역할과 즐거움이 남아 있는 세상. 승자와 패자로만 나뉘지 않는 세상. 저물어가는 인생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죽는 그날까지 남아 있는 세상.

그러다 갑자기 딜런 토머스의 시가 떠올랐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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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다.


다음에는 또 무슨 보드 게임을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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