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nugeun Nov 18. 2019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미니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

처음 차를 사려고 결심했을 때, 내가 생각했던 내 차의 필수 조건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SUV일 것. 또 하나는 천장에 선루프가 있을 것.



둘 중에 오늘은 ‘SUV일 것’이라고 정한 이유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난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차를 몰고 다니기 싫어서 세단이 아니라 SUV를 선택했다. 전체 차 판매량의 절반이 SUV인 시대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내가 차를 샀던 2011년엔 지금처럼 SUV가 흔하지 않았다. 당시엔 길거리가 온통 세단 천국이었다. 덕분에 흔치 않은 차를 운전한다는 재미에 더해 운전 자체도 아주 쾌적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어지간해선 도로에서 내 시야를 가로막는 차가 없었다. 초보 운전이었던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워라밸이 대두되면서 다양한 여가 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SUV의 진가를 알아보고 마구 구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형 장비를 싣고 다니는 캠핑족들의 많은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슬프게도 더 이상 SUV로는 흔치 않은 차라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면서 내가 타고 싶은 차의 필수 조건이 바뀌어 버렸다. 난 이제 더 이상 SUV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에 필수 조건의 정의가 잘못 설정된 것이었다. 이제 다시 정의해 보자면, ‘SUV일 것’이 아니라 ‘흔하지 않은 모양일 것’이라고 정의했어야 했다.


어느덧 내가 차를 산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아직 차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몇 년 더 타도 괜찮을 것 같지만, 길거리에 SUV가 너무 흔해지는 바람에 그만 정이 떨어져 버렸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새로 들어온 차의 형태가 바로 해치백과 왜건이다. 


해치백은 세단의 트렁크를 자른 형태이고, 왜건은 세단의 트렁크 윗부분을 그대로 좌석 천장 높이까지 올린 형태이다. 둘 다 우리나라 자동차 브랜드에선 판매량이 저조해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점이 나에겐 아주 큰 매력이다. 


해치백과 왜건은 둘 다 유럽에서 사랑받고 있다. 덕분에 유명한 해치백과 왜건은 대부분 유럽의 자동차 회사에서 출시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에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해치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골프를 내놓고 있고, 독 3사로 불리는 BMW,  벤츠, 아우디에서도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성능을 갖춘 왜건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비록 중국에 넘어갔지만 여전히 북유럽 감성을 뽐내고 있는 볼보도 왜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다. 


그런데 이들 브랜드의 자동차를 머리에 한 번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차에 색깔을 입혀보자.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힌 색깔은 흰색, 은색, 검은색의 변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나가서 그 색상에 메탈릭이나 펄 같은 걸 추가한 정도겠지.


자 그럼 우리 다 같이 미니를 떠올려 보자. 3 도어든 5 도어든 클럽맨이든 컨트리맨이든 상관없다. 본인이 좋아하는 미니를 떠올려 보자. 그리고 그 미니에 색깔을 입혀보자. 그렇게 사람들 머리에 떠오른 미니를 쭉 일렬로 세우면 아마 색상 스펙트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미니는 다양한 유채색이 모두 잘 어울려서, 각자 머리에 떠올리는 색상이 제각각일 수 있는 멋진 브랜드다. 


미니만큼 다양한 유채색이 잘 어울리는 브랜드를 찾으려면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정도론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놈들은 이름부터 현실성이 떨어진다. 보통 인터넷에서 드림카를 말할 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부른다. 하나는 그냥 ‘드림카’이고 하나는 ‘현실 드림카’. 어감에서 바로 느낄 수 있듯, 그냥 드림카는 내 생애 소득과 상관없이 정말 꿈에서라도 한 번 타보고 싶은 차를 말하고, 현실 드림카는 지금 내 생애소득을 생각해 봤을 때 언젠가 한 번은 탈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지금이라도 좀 무리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차를 말한다. 즉, 아직 구매하진 못했지만 이번 생에 내가 현실적으로 목표로 삼을 만한 드림카가 바로 현실 드림카다. 

미니는 SUV가 지겨워진 나의 현실 드림카가 되었다. 그런데 세부 옵션은 때에 따라 바뀌고 있다. 3 도어였다가 뒷좌석 편의를 생각해 5 도어나 클럽맨으로 바꿨다가 다시 미니의 대표 모델인 3 도어로 돌아오기도 한다(이 와중에 SUV인 컨트리맨은 고려하지 않는다). 적당히 고성능인 S 버전을 골랐다가 본격 고성능인 JCW 버전을 고르기도 하고 선루프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 아예 소프트탑 컨버터블로 골랐다가 직물 소재인 소프트탑이 관리가 꽤 어렵다는 말에 다시 선루프만 달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상상 속에서 옵션을 바꾸는 와중에도 절대로 바꾸지 않는 옵션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바로 색상이다. 무슨 미니를 어떤 옵션으로 고르던 내가 미니를 산다면 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색상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미니는 빨강과 파랑은 물론 앞서 말한 무채색까지 전부 다 잘 어울리지만, 그래도 내 취향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으로 확고하다. 색상 자체도 아주 매력적인데 색상의 이름마저 영국 태생의 미니에게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가? 어쩌면 그 이름 덕을 본 걸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내 미니에는 무조건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색상을 입힐 거다. 


언젠가 내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미니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날을 기약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남에게는 엄격하게 나에게는 관대하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