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nugeun Nov 22. 2019

차 본 시계 - Glycine 에어맨 1953 빈티지

매장에서 직접 산 첫 번째 기계식 시계

늦은 사용기를 남긴다. 얼마나 늦은 거냐면, 이 시계를 중고 나라에 매물로 올려서 사무실 앞까지 차를 끌고 찾아온 어떤 중년 신사에게 판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그러니 사용기를 남기기엔 아주 늦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기고 싶어서 남겨본다.


결혼 준비를 계기로 아직도 세상에 태엽을 감아서 작동하는 손목 시계가 팔리고 있고, 심지어 그런 시계들이 내 취향의 관점에서 아주 멋지고 아름답다는 걸 께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결혼 예산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예물시계는 하지 않기로 아내와 결정했었다(참고로 아내는 하라고 했지만 내가 하지 말자고 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기계식 시계의 매력을 깨달아 버린 게 문제였다. 결국 결혼하고 6개월 정도 시계 앓이를 하다가 결국 난 용돈 40만원 정도를 투자해 MAGRETTE이란 마이크로 브랜드의 기계식 수동 크로노 그래프 시계를 중고로 하나 구매해서 차고 다녔다. 그게 내 첫 기계식 시계였다. 원래 생각엔 그런 거 하나 사서 차고 다니다 보면 시계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식힐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불을 지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기계식 시계 중에는 태엽뭉치를 볼 수 있도록 뒷면을 투명하게 만들어 놓는 시계가 많다. 바로 저 뒷 모습에 난 반하고 말았다. 디지털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기계적 아날로그 감성!

그렇게 차고 다니면서 기계식 시계의 맛을 보고나니, 기계식 손목 시계의 맛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다른 브랜드의 시계도 차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뒤로 몇 개월간 여러 중고 장터 - 중고나라와 플라이워치, 타임포럼 장터 - 를 전전하며 어디 마음에 드는 싸고 좋은 시계 매물 없나 알아보게 되었다. 밤이나 낮이나, 밥 먹을 때나 자기 전에나, 난 늘 휴대폰을 들고다니며 정말 계속 시계만 보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싸고 좋은 시계 매물이란 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나타난 매물은 내가 고민하는 사이 팔려 나가버리곤 했다. 그래서 내 시계 탐험 시간은 계속 질질 늘어지게 되었다.


그런 시간이 몇 개월 지속되자 매일 집에서 폰으로 시계 사진만 들여다보며 앉아 있는 나를 결국 아내가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 날 그녀는 나를 불러다 소파에 앉혀놓고 생활비에서 돈 얼마간 보태줄 테니 그냥 적당한 걸로 새 거 하나 사라고 말했다. 내가 눈을 번쩍 뜨며 쳐다보자, 대신 그러고 나선 집에서 시계 사진 그만 보겠다고 약속하라고 말했다.


이게 2014년에 있었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이다. 그리고 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난 주기적으로 새로운 시계를 갈구하며 좀비 같이 시계 사진을 보고 다녔고, 그 덕에 지금까지 거쳐간 시계가 거의 10개에 육박한다. 단순 계산으로 6개월에 한 번씩은 가지고 있던 시계를 팔고 새 시계를 들인 셈이다(결국 아내도 이 놈은 아무리 갈궈도 평생 시계를 들여다보고 살 놈이라는 걸 인정하고, 내가 좀비 모드에 돌입하면 그만 좀 보라고 말하는 대신 얼른 결정해서 팔든 사든 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좀비 상태의 기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노력한 측면도 있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하게 된 측면도 있다.


아무튼 그 당시 나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해, 그러니깐 2014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에 위치한 한 아울렛으로 나들이 가서 이런 저런 브랜드의 시계를 구경했다. 그곳에서 한참 동안 가용할 수 있는 자금과 내 취향의 사이에서 여러 번 저울질한 끝에, GLYCINE이란 브랜드와 Maurice Lacroix란 브랜드가 나란히 위치한 매장(지금은 없어졌다)에서 차 봤던 아래 사진 속 두 시계 중 하나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선택한 건 위 사진의 GLYCINE의 에어맨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땐 정말 기계식 시계면 다 좋았었나 보다. 위 두 개의 시계는 지금 내 기준에선 정말이지 다른 취향에 속하는 시계다. 그런 두 시계를 놓고 고민한다는 건, 딱히 본인 취향이 뭔지도 모르고 돈만 들고 시계를 사러 왔다는 뜻과 비슷하다. 디자인도 다르고 기능도 다르고 제치 스트랩의 재질도 다르다. 시계에 어울리는 옷 스타일도 다르다. 그저 내 예산에 맞는 시계라면 뭐든지 OK인 상태에서 시계를 보러 간 것이다. 그러니 고민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겠지. 사실 아래 사진의 시계도 적당히 괜찮은 시계이긴 하다. 지금 사진으로 봐도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은 아래 시계가 훨씬 나은 것 같다. 위 에어맨 사진을 보면 다이얼이 조금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에어맨을 선택한 건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 어떤 브랜드의 시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 아이덴티티가 있다는 것.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눈치채겠지만 에어맨은 시간 바늘이 하루에 한 바퀴만 돈다. 24시간계이기 때문이다. 보통 시계는 오후 3시에 그냥 3시를 가리키고 있겠지만 에어맨은 15시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베젤의 디자인과 작동 방식도 다른 시계 브랜드에선 찾을 수 없는 디자인과 작동 방식이다. 그땐 이런 특별한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들었었다. 


아래는 구매 후 집에 와서 촬영한, 이른바 풀박 사진이다. 당시 매장에서 챙겨줬던 모든 물품이 다 갖춰진 상태다. 리미티드 에디션 다운, 독특한 나무 시계 상자와 설명 책자는 물론 쇼핑백까지 소중하게 간수해 놓고 있었다.


에어맨의 기본적인 정보는 아래 사진과 같다. 시계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 각 항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금방 알 수 있을 거다. 

42mm의 적당한 크기에 두게도 11.8로 얇은 편이고, 방수도 20atm이나 지원해서 막 차고 다니기에 아주 좋은 시계였다. 아래 사진에는 안나오지만 러그 투 러그는 52mm정도 된다. 칼리버는 ETA 2893-2 기반으로 만든 GL293이다.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쓰긴 했는데 가져다가 특별히 수정을 했을 것 같진 않고 그냥 꼽았을 것 같다.


구매하면 시계가 들어있는 나무 상자와 GLYCINE 카탈로그, 에어맨 역사책을 GLYCINE 쇼핑백에 넣어준다. 자세한 설명을 하진 않겠지만, 에어맨 역사책은 꽤 퀄리티가 좋다. 커버도 하드커버고, 에어맨의 역사 설명과 함께 그 동안 출시된 에어맨의 고퀄 사진과 스펙 설명이 풀칼라로 나오는데 꽤 볼만했다.


시계가 담겨진 나무 상자는 굉장히 빈티지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무 자체의 질감은 매끈하고 부드러워서 꽤 좋은 편이었다. 미닫이 식으로 열리는 뚜껑의 한 쪽 면은 마치 우편 봉투 같이 주소를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론 뭘 쓰진 않았지만. 그 나무 상자 안에는 시계를 고정할 수 있는 고무줄과 시계를 고정한 뒤 위를 덮을 수 있는 덮개가 달린 가죽 홀더가 있었다. 그 뒤로 여러 브랜드의 시계 케이스를 볼 수 있었는데 여태껏 본 시계 케이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케이스였다. 

 

다이얼 색은 약간 아이보리 색감이 도는 화이트다. 그리고 시계 바늘은 의도적으로 누렇게 만든 야광 도료가 발려있었다. 보통 빈티지한 느낌을 주고 싶을 때 많이 사용하는 도료 색상이다. 다이얼은 앞서 말했듯 24시간계로 표시된다.시간을 표시하는 바늘이 하루에 한 바퀴만 돈다. 보통 시계라면 아래 사진이 10시 8분이겠지만 에어맨에선 20시 8분, 즉 저녁 8시 8분인 것이다.



사진 촬영 당시엔 제치로 나토 스트랩이 장착되어 있었다. 첨엔 나토 스트랩이 싸보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손목에 차보니 디자인뿐 아니라 착용감도 괜찮았다. 그래서 난 에어맨 이후로 여러 나토 스트랩을 구매해서 여러 이것 저것 바꿔가며 차고 다니곤 했다. 대충 1~2만원 짜리였는데, 여러 나토 스트랩을 착용해 보니 GLYCINE의 나토 스트랩이 꽤나 좋은 품질의 나토 스트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사진을 잘 보면 시계줄 구멍에 가죽도 덧대져있다. 


참고로 나토 스트랩이란 직물로 만들어서 아래와 같은 형태로 시계에 체결할 수 있는 스트랩을 말한다. 아래 두 개 사진을 보면 어떤 방식으로 시계에 줄을 체결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토 스트랩은 이렇게 시계 뒷면을 줄이 덮게 된다.
이런 구조다.

왜 이런 스트랩을 나토 스트랩이라고 부르냐면, 나토(NATO)군에서 파일럿들에게 시계를 지급할 때 이런 형태의 줄을 채워서 지급했었기 때문에 이런 줄을 나토 스트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내가 직접 사서 채워보았던 나토 스트랩들이다. 파일럿 시계다 보니 어지간한 나토 스트랩은 다 어울렸다. 

밀리터리 느낌이 물씬 나는 스트랩을 채워서 밀리터리 문양 패딩 조끼 위에 올려놓고 찍어봤다
이번엔 카키색 나토 스트랩. 스트랩에 달려있는 버클도 검은색으로 되어 있는 걸 샀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시계가 금방금방 지겨워져서 시계줄을 바꿔가며 그 지겨움을 극복하곤 했다. 그 결과가 아래와 같다.

시계줄 가는 도구를 하나 사서 틈만 나면 시계줄을 바꿔가며 차고 다녔다.
시계뿐 아니라 시계줄도 중고 장터에 올라온다. 위 시계줄은 리오스(rios) 브랜드의 시계줄이었다. 
이건 또 다른 시계줄. 이것도 리오스였던 것 같다.
길 가다가도 막 사진찍고 그랬다. 언뜻 다 비슷해 보이겠지만 이건 또 다른 시계줄이다.
심지어 나무에 걸어놓고 찍은 사진도 있다! 미친 것 같다!


가죽줄만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브레이슬릿(금속으로 된 시계줄은 특별히 브레이슬릿이라고 다들 부르더라, 팔찌 같은 느낌이 더 강해져서 그런가...)으로 차고 싶어서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GLYCINE 매장에서 아래 시계줄(20만원이었나... 아무튼 상당히 비쌌다)을 구해서 차고 다녔다. 


한참을 인터넷의 바다를 떠다니며 수소문했어야 하는 이유는 다이얼의 곡면을 따라 착 밀착되면서 러그 사이에 유격이 발생하지 않는 브레이슬릿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계마다 러그 디자인과 다이얼 디자인은 물론 러그에 뚫어놓은 구멍(시계줄을 시계에 고정시키는 스프링 바를 장착하는 구멍)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서, 처음부터 시계회사에서 그 모델에 맞는 브레이슬릿을 출시하지 않는 한, 그런 브레이슬릿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자세히 보면 딱 맞지 않는 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적당히 어울리는 브레이슬릿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뒷면을 보면 나름 로터에 비행기 그림도 새겨놓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깨알 디테일!!
GLYCINE 정품 브레이슬릿답게 자기네 로고도 양각으로 잘 만들어놨다.

아래는 메쉬(mesh) 브레이슬릿으로 부르는, 주로 여름에 많이 차고 다니는 줄이다. 딱 보면 왜 메쉬인지 알 것이다. 옆에 초록색, 빨간색 팔찌는 삼청동에서 산 팔찐데 팔찌를 사면 각 팔찌에 적힌 나라에 기부를 한다고 해서 샀던 팔찌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기부를 했을까? 아마 했겠지? 암튼 초록색은 나미비아, 빨간색은 사우스 아프리카라고 써있는 거다. 


아래는 내가 정말 좋아했던 아이스크림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아이스크림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이스크림을 두꺼운 마쉬멜로우로 덮은 다음 토치로 짧게 구워주어서 따뜻하게 잘 구워진 부드러운 마쉬멜로우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내 인생 아이스크림이었다. 그런데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하긴... 가격이 꽤 비쌌고 매장 위치가 아주 애매했던 탓에 손님이 많이 없긴 했었다. 


마지막으로 아들 손목에도 채워본 사진이다. 벌써 쑥쑥 큰 탓에 이젠 저런 애기 같은 손이 아니긴 하지만...



비록 이제 팔아버려서 없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시계였다. 정말 열심히 잘 차고 다녔다. 여기에 다 올리진 못했지만 찍은 사진도 엄청나게 많아서 여기에 올릴 걸 고르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되려나? 사실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예쁘긴 하지만, 세상엔 예쁜 시계가 너무 많아서 굳이 한 번 차본 걸 또 차보진 않을 것 같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차 보고 싶은 시계 -IWC 빅 파일럿과 폴베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