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nugeun Jan 06. 2020

문학잡지 Littor 20호 (노 키즈?) - 2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 인터뷰(feat. 정세랑 작가)

문학잡지 Littor 20호에 실렸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 인터뷰를 보고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보려고 한다.


릿터에 실린 사진




난 이 작가를 릿터 20호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처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책에 적혀있는 작가 소개를 그대로 옮겨 적겠다.


소설가. 1977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로 영연방 작가상과 허스턴 라이트 기념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장편소설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아메리카나’, 소설집 ‘숨통’, 에세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의 저서가 있다.


나는 잘 몰랐지만 인터뷰이로 나선 소설가 정세랑 님이 ‘먼 곳의 빛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중략 … 한국의 독자들은 아디치에 작가를 거의 국내 작가를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라고 언급하는 걸 보면 아주 유명한 작가인가 보다. 사실 처음엔 정세랑 작가의 표현이 내 기준에선 좀 호들갑스러운 수준이어서 반감에서 비롯되어 누군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극성스러운 표현으로 소개하는 걸까. 게다가 한국식 이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국식 이름도 아닌 것 같은 독특한 작가의 이름도 내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호들갑스러운 소개글 뒤로 이어진 아디치에 작가의 첫 대사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무언가 역동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직접 와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문학적 소양과 감성을 더 갖추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아디치에 작가의 말이 아직 나에겐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예전에 한 소믈리에(소믈리에 지망생이라고 해야 하나...)가 와인을 시음하고 나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열정적으로 탱고를 추고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잠깐 고민했다. 더 읽을까 말까.

아직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첫 문단에서 공감도 되지 않은 작가의 인터뷰를 읽는 건 시간 낭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시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난 지하철 안이었고, 가져온 책은 고작 이거 하나였으며, 당시 참여했던 독서 모임에선 하루에 무조건 15페이지 이상 읽고 인증했어야 했는데 중간을 건너뛰고 인증하는 게 개인적으로 꺼려졌다. 그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아주 다행스러운 문단을 읽을 수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던 문단이라 그대로 옮겨 오겠다.


...
이미 형성되어 있는 구조에 우리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정치적 역학 관계가 문학에도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많은 나이지리아 작가들이 미국에서 출판되기를 원해요. 미국의 인정을 받으면 나이지리아에서 입지가 올라가는 식입니다. 영미권이 가진 문화 권력은 굉장합니다. 문화계의 교류도 항공편이 운영되는 방식과 유사하지 않은지 가끔 떠올립니다. 한 아프리카 국가에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로 여행하려면 파리를 거쳐야 할 때가 있거든요. 제가 사는 라고스에서 앙골라를 가려면 곧바로 가지 못하고 유럽의 도시를 거쳐야 합니다.


비단 문학뿐일까. 현재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게 그럴 것이다. 물론 그런 현상이 마냥 비판해야만 하는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쇄국 정책과 사대주의는 한 끗 차이다. 그 사이에 서는 건 아주 세밀한 제어가 필요한 일이다. 작가 본인 역시 영연방 작가상으로 등단한 것은 물론이고, 드렉셀대학교(미국) 커뮤니케이션학, 정치학 >  이스턴코네티컷주립대학교(미국) 학사 > 존스홉킨스대학교(미국) 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 예일대학교(미국) 대학원 아프리카학 석사로 이어지는, 철저히 영미 기득권 문화에 속해서 공부해왔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다만 어떤 것이든, 그게 권력이든 돈이든 관심이든, 장시간 한쪽에 쏠려 있는 건 좋지 않으니 개선되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다만 그게 쉽진 않을 것이다. 후대에 ‘혁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변혁이 없는 한 모든 종류의 빈익빈 부익부란 참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니까.


이어진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아쉽게도 조금 부정적인 방향으로.


저의 부유한 삼촌 이야기를 비유 삼아 말씀드릴게요. 삼촌은 집을 돌보기 위해 운전기사, 정원사, 요리사, 청소부 등등을 고용했는데 고용인들에게 잘해 주지 않고 함부로 대했어요. 그런데 고용인들은 서로의 잘못을 삼촌에게 일러바치더라고요. 운전기사는 정원사를 고발하고, 요리사는 청소부를 지적하는 식이었지요. 그때 저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왜 서로 연대해서 제대로 된 대우를 요구하지 않는지 의아했고 혹 그 한계가 인간의 심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억압자에게 함께 항거하지 못하고 흩어져서, 오히려 억압자의 눈에 들고 싶어 몸부림치는 거죠.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가 연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


이 문단은 여러 면에서 날 자극했다.


첫 번째는 확률적으로, 또 정황상 분명히 작가 본인도 부유한 집 안의 자식이었을 텐데, 그래서 덕분에 그런 부에서 비롯된 모든 혜택, 이를 테면, 먹고 살 걱정 전혀 없이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래서 최초 학력이 나이지리아대학교 의학인데도 불구하고 문학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을 텐데 마치 자신은 그런 부의 혜택에서 비켜나 있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는 점이었다.


관련해서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봤던 ‘짤’이 생각났다. 제목은 ‘가짜 광기 vs 진짜 광기’였다.


가짜 광기


진짜 광기


두 번째는 ‘그 한계가 인간의 심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라는 말을 통해 고용인들의 문제를 현실적인 문제에서 각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로 아무렇지 않게 전환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작가의 이런 의식은 ‘오히려 억압자의 눈에 들고 싶어 몸부림치는 거죠’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평소에 지나친 선민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타고난 배경을 기반으로 그 위에 본인의 노력(이 노력 자체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을 곁들여 실질적인 성과를 이뤄낸 많은 사람들의 말이 그러하듯, 아디치에 작가의 말 역시 엄청난 설득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인터뷰이 역시 ‘스스로를 한계 짓게 하는 인간 심리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깊이 파고들어 봐야겠구나 마음먹었다.’라고 쓰기도 했고. 그래서 더 아쉬웠다.


게다가 그 뒤로 이어지는 정세랑 작가의 말도 아쉬웠다.


작가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인천 공항에서 아프리카의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그 줄의 다른 누구도 같은 요구를 받지 않았는데 작가와 작가의 형제만 요구를 받은 것이다.  … 나는 그저 얼굴이 뜨거워질 뿐이었다.


그게 작가가 얼굴이 뜨거워질 문제였을까. 공항에선 확률상의 문제로 특정 여권을 소지한 사람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설마 공항 직원이 작가를 알아보고 특혜를 주길 바랐던 것인가. 작가라면 그런 방식의 특혜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야기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나 역시 머리에 신경 쓰기 귀찮다는 이유로 반삭발하고 떠난 유럽 여행에서 여러 번 비슷한 상황에 처했었다. 일례로, 공연장에 들어갈 때 함께 한 일행 중 나만 가방 검사를 받았는데 가방에 항상 넣고 다니던 물병을 발견한 경비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셔보라고 해서 마신 적도 있었다. 액체 폭탄 같아 보였나 보다. 내가 물 맞다고 말하며 두어 모금 마시자 그제야 그녀는 안심했다. 그리곤 검은 바탕에 노란색 고딕 체로 'SECURITY'라고 써진 꽤 너비가 넓은 테이프를 내가 매고 있던 가방 외부에 대각선으로 길게 붙여 주었다. 당시 스티커를 붙여주던 그녀는 날 보고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면서 ‘이거 붙이고 있으면 누가 또 잡고 검사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떼지 마세요.’라고 굉장히 좋은 거 붙여주는 것처럼 말했다. 난 조금 놀라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공연장의 안전에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서 그 정도 감정과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내가 머리를 빡빡 깎은 동양의 젊은 청년이라서 검사를 했을 가능성이 99% 정도 될 것이다. 근데 그래서 내가 기분 나빠해야 하나? 하필 그런 외모의 청년이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이 많은 걸 어떡하나.


비슷한 예로 유럽 여행 중 국가 간 이동하려고 공항에 갔는데 나만 캐리어 전수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엔 나와 같이 이동하는 동양인이 많았는데 나만 콕 집어서 캐리어를 완전히 열고 속옷 파우치 하나까지 다 열어서 보여달라고 했었다. 심지어 직접 열지도 않았다. 장갑을 끼고 핀셋과 지시봉 같은 걸 들고 마치 굉장히 위험하고 불쾌한 걸 보고 있다는 표정으로 ‘저거 열어보세요, 저것도 열어보세요,’라고 했었다. 덕분에 난 내 손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내 속옷 취향을 강제로 공개했었지. 그 직원은 결국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쾌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는데 덕분에 그때는 상당히 불쾌하긴 했었다. 하지만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필요한 건 필요한 거다. 실제로 그런 물질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으니 검사했겠지.


게 중엔 진정으로 안전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검사원 개인의 성향에 의거한 인종차별적 검사도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인종차별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뉴스를 아직 듣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인종차별은 아주 당연하게도 분명히 모두가 의식하고 계도해서 줄여나가며 결국엔 근절시켜야 하는 행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검사를 없애기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크다. 몇 백명의 목숨이 걸려있다. 물론 검사 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면 최소한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줬으면 좋겠긴 하지만… 아무튼 필요한 건 필요한 거다. 일시적 감정에 휘둘려 언급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터뷰에는 아래와 같이 깊이 공감되는 말도 많았다.


일단은, 불안이 작가에게 좋은 자극이라고 생각해요. 불안과 불편과 불확정성에서 이야기들이 태어납니다. 창의성의 연료가 되지요.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문학에선 나쁜 결과를 낸다고 봅니다.


나도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다는 느낌은 주로 불안하거나 불편하거나 무언가 불확실할 때 발생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심지어 원하던 목표를 이루었을 때도 어딘가 불안한 마음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 거쳤던 힘든 과정을 얘기하며 이 목표가 얼마나 견고한 기반을 갖추고 있는 건지 재차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이런 문단들을 넘어가다 보면 드디어 내가 이 인터뷰 글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 나온다. 아다치에 작가의 말이 아니라 인터뷰이의 말인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대로 옮겨오겠다.


첨예하고 흥미로운 한국 문학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요즈음의 한국 독자들은 소설이나 다른 서사 창작물 안에서 연애와 성애 장면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 장면들이 폭력적이거나 뒤틀려 있지 않은 평범하고 다정한 연애-성애의 장면일 때에도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낀다는 점이 과거와의 차이점이다. 나는 그 이유가 한국의 여성 대상 범죄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G20 국가 중에서 살해 피해자의 여성 비율이 가장 높고,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등이 심각하다 보니 독자들이 친절하고 시민으로 기능하는 남성 캐릭터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 변한 것이다. 깊은 트라우마로 인한 체질 변화 앞에 창작자로서 고민이 깊어진다. 현실이 참혹할 때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선한 남성 캐릭터는 기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이성애적 연애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작가들도 여럿 등장했다. 한국 문학계의 이례적인 동향에 대해 아디치에 작가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정말 이게 한국 문학계의 동향인가. 그렇다면 정말 우리나라 문학계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수준인 것 같다. 인식과 결의의 수준이 동네 문학 동호회 수준이었다. 만약 어느 대학 문학 동아리의 동향이 이렇다고 밝혀졌다고 해도 실망할 것 같은데 등단한 소설가의 입에서 한국 문학계의 동향이 이렇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렇다면 정말 우리나라 문학계 동향이 그렇다는 것이 아닌가.


우선 가장 거슬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현혹되기 쉬운 G20 국가 중에서 살해 피해자의 여성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 대해 조사해 봤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니 관련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2016년 기사였다.

여성계“강남 묻지마 살인, 우발적 사건 아냐!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해”


기사 중 해당 내용을 발췌해보겠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연합)은 19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에 대해 “단지 ‘일탈한’ 개인이 저지른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한국은 살인사건 피해자 중 여성비율 51%로 G20 국가 중 1위(UNODC, 2008)를 차지하고 있다”며 “또한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비율 90.2%(경찰청, 2013)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어 여성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여성 살해’의 본질은 젠더 권력관계, 즉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인식이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신적, 물리적 폭력에 시달려 왔고, 살해당해왔다. 이를 젠더 불평등 문제로 인식하고 공감해 나가는 것이 또 다른 ‘여성 살해’를 막기 위한 출발선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사 자체도 3년 전 기사였는데 인용된 통계자료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2008년의 자료였다. 여기서 UNODC는 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의 약자로 UN 산하기관이다. 올해가 2020년이니 12년 전의 자료를 인용한 셈이다. ‘2008년 UNODC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과 같은 말을 붙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오래된 자료라서 인터뷰이가 출처를 밝히지 않았던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글을 쓰는 시점인 2019년 현재의 통계는 어떠한지 궁금해서 통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자료가 너무 많아 적절한 자료를 고르는 데 애먹었지만 그래도 값진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2019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찾다 보니 알게 되었는데 통계청 사이트는 아직도 https가 아닌 http였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실제 통계 자료가 엑셀 파일로 첨부되어 있다. 사이트 본문에는 통계 자료를 7가지 항목으로 요약, 정리해 놨는데 그중 7번째 항목이 아래와 같다.


7. 안전

○ 2018년 전반적인 사회 안전에 대하여 여성은 35.4%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남녀 차이가 가장 큰 유형은 '범죄 발생'임

○ 2017년 형법범 주요 범죄 중 성폭력 피해자는 여성(29,272명)이 남성(1,778명)보다 약 16배 많으나, 다른 범죄 피해자는 남성이 많음

○ 2018년 1366(여성긴급전화)을 이용한 상담 건수는 352,269건으로, 상담 내용 중 '가정폭력'이 189,057건이 가장 많음

 

위 두 번째 항목을 통해 성폭력을 제외한 다른 범죄의 피해자는 남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첨부된 자료 파일을 열어보았다. 자료는 굉장히 방대한 양이지만 목차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원하는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39번째 시트부터 43번 시트까지가 ‘사회안전’에 대한 자료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자료는 41번 ‘주요 범죄의 피해자’ 시트에 있었다. 대검찰청에서 제공한 자료로 형범법 중 주요 범죄의 피해자 현황(2006년~2017년)이 나와있는 자료다. 대검찰청에선 주요 범죄를 절도, 살인, 강도, 성폭력, 폭행, 상해, 사기로 나누고 있었다.


2017년 자료를 보면 성폭력을 제외한 모든 범죄 유형에서 남성 피해자가 여성 피해자보다 월등히 많다. 반면 성폭력에서는 여성 피해자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절도, 폭행, 상해, 사기는 사실 비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남성 피해자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교할 만한 숫자를 보이는 살인과 강도에 대해서만 그 이전 연도 숫자를 다시 비교해 보았다.


살인은 2005~2017년 전 기간에서 남성 피해자가 여성 피해자보다 많았다. 강도는 2005~2007년엔 여성 피해자가, 2008~2017년까지는 2014년 한 해를 제외하곤 남성 피해자가 많았다.


즉, 결과적으로 모든 주요 범죄 유형에서 거의 대부분 피해자의 숫자 자체는 남자가 많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살인의 피해자는 항상 남자가 많았다.


혹시나 싶어 UNODC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2019년 보고서를 찾을 수 있었다. 전체를 읽어볼 시간은 없어 키워드로 검색하다 보니 이런 챕터를 찾을 수 있었다.


The demographics of homicide victims(살인 피해자의 인구 통계 자료)


그리고 그 챕터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발견했다. 번역은 네이버 파파고를 이용했다.


 Globally, 81 per cent of homicide victims are male and the male global homicide rate (9.1 per 100,000 males) is roughly four times the female global homicide rate (2.0).55 As in other aspects of homicide, the picture varies greatly between and within regions around the world, particularly so in the case of male victimization. The highest male homicide rates can be observed in the Americas and Africa (31.2 and 21.5 per 100,000 males, respectively), while the lowest can be observed in Asia (3.1), Europe (4.3) and Oceania (3.9). By contrast, female homicide rates stay within a narrower range of between 4.5 per 100,000 females in Africa and 1.5 in Asia. Accordingly, the ratio between male and female homicide rates varies between 2.0 and 4.8 in all regions, except the Americas, where the male rate is over eight times the female rate.
(전 세계적으로, 살인 희생자의 81%는 남성이고, 전 세계 남성 살인율(10만 명당 9.1명)은 여성 전 세계 살인율(2.0명)의 약 4배이다. 가장 높은 남성 살인율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관찰될 수 있고(남자 10만 명당 각각 31.2명, 21.5명), 아시아(3.1명), 유럽(4.3명), 오세아니아(3.9명)에서 관찰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성 살인율은 아프리카에서 10만 명당 4.5명, 아시아에서는 1.5명이라는 좁은 범위에 머물러 있다. 이에 따라 남성 사망률과 여성 살인율의 비율은 2.0~4.8로 남성 사망률이 여성 사망률의 8배를 넘는 아메리카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차이가 난다.)


UNODC 보고서에서 캡처
Analysis of data for 132 countries around the world indicates that the male homicide rate is substantially higher than the female homicide rate in almost every country and subregion. The greatest disparity between male and female homicide rates is found in South America, Central America and the Caribbean, where male homicide rates are 8 to 11 times the female rates. Large disparities also exist in Central, South-East and Western Asia, and in Eastern Europe (figure 20).
(전 세계 132개국을 대상으로 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거의 모든 국가와 하위 지역에서 남성 살인율이 여성 살인율보다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서 남녀 살인율의 가장 큰 차이는 남성 살인율이 여성 살인율의 8배에서 11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아시아, 남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그림 20)에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UNODC 보고서에서 캡처


In general, the higher the homicide rate of a specific country, the greater the difference between the male and female homicide rates tends to be. This also means that the share of male homicide victims tends to increase in line with the total homicide rate and, conversely, that the share of female homicide victims is larger in countries with comparatively lower total homicide rates. This relationship holds true at the global level and in each of the five regions (figure 21). In fact, in some countries in Asia (e.g.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and Europe (e.g. Austria) with a total homicide rate under 1 per 100,000, women make up the majority of homicide victims.
(일반적으로 특정 국가의 살인율이 높을수록 남성 살인율과 여성 살인율의 차이가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또한 남성 살인 희생자의 비율이 전체 살인율에 따라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여성 살인 희생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들에서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글로벌 수준과 5개 지역(그림 21)에서 각각 적용된다. 실제로 총 살인율이 10만 명당 1명 미만인 아시아(예: 일본, 대한민국)와 유럽(오스트리아)의 일부 국가에서는 여성이 살인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The reason for these discrepancies in the demographics of homicide is that the predominant type of homicide changes depending on whether countries have high or low homicide rates. While the former group is dominated by male-to-male lethal violence, often between gang members, the latter group experiences much lower levels of male-to-male violence. On the other hand, intimate partner/familyrelated homicide, which is predominantly male-to-female violence, is at a relatively stable level across countries and regions. Thus, as the overall homicide level declines, this type of homicide accounts for a relatively larger share of the total.
(살인의 인구통계학적으로 이와 같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살인의 주요 유형은 국가별로 살인율이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전 그룹은 남성 대 남성으로, 종종 폭력단원들 사이에서, 남성 대 남성으로 지배되는 반면, 후자 그룹은 남성 대 남성으로 훨씬 낮은 수준의 폭력을 경험한다. 반면, 남녀 간 폭력적인 친밀한 동반자/가족과 관련된 살인은 국가 및 지역에서 비교적 안정된 수준이다. 따라서 전반적인 살인 수준이 감소함에 따라, 이러한 유형의 살인은 전체 살인의 비교적 큰 몫을 차지한다.)


This observation is not a new one: the Finnish scholar Veli Verkko formulated several laws in the 1920s to predict homicide rates and patterns. Verkko’s “static law” states that in countries with a high homicide rate, the proportion of female offenders and victims is small, whereas when the homicide rate is low, the proportion of female offenders and victims is larger. Verkko’s “dynamic law” refers to change: when the overall homicide rate is on the decrease, the change is driven by the decrease in male offending and victimization. In other words, the key to understanding overall trends in homicide is to focus on male-to-male homicides and on young males specifically.
(이 관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핀란드 학자 벨리 베르코는 살인율과 패턴을 예측하기 위해 1920년대에 여러 가지 법을 만들었다. 베르코의 "정적 법"은 살인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여성 범죄자와 피해자의 비율이 적은 반면, 살인율이 낮을 때는 여성 범죄자와 피해자의 비율이 더 크다고 규정하고 있다. 베르코의 "동적 법칙"은 변화를 의미한다: 전반적인 살인율이 감소하고 있을 때, 변화는 남성 불쾌감과 희생자의 감소로 인해 일어난다. 즉, 살인의 전반적인 추세를 이해하는 열쇠는 남성 대 남성 살인사건과 특히 젊은 남성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위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 세계의 모든 지역, 모든 국가를 살펴봐도 살해 피해자는 남성의 비율이 높다는 내용이다.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의 3년을 제외하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살해 자체의 빈도가 낮은 국가, 이를 테면 우리나라와 일본과 같은 일부 아시아 국가와 오스트리아와 같은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 살해 피해자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전체 살해 건수가 10만 명당 1명 수준으로 낮게 나타나는 국가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작가가 언급한 ‘G20 국가 중에서 살해 피해자의 여성 비율이 가장 높고’란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우리나라 여자가 전 세계적으로도 불쌍한 수준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통계 자료를 왜곡한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최초에 이 자료를 접한 사람은 분명 자료를 검토하면서 UN의 산하기구인 UNODC에서 그런 의도로 작성한 자료가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의도적으로 앞뒤를 자르고 남녀 편 가르기 놀이에 사용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현재 우리나라 문학계의 동향을 작가가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걸 보면 그 사람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사실 해당 자료엔 그 외에도 아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Men are not only more likely than women to be victims of homicide, but are also even more likely to be the perpetrators of homicide. This is especially true in the countries with the highest homicide rates, such as those in 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 When looking at the sex of homicide suspects brought into formal contact with the law, more than three quarters of the global total are male.
(남성은 여성보다 살인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살인 가해자가 될 가능성도 더 높다. 중남미나 카리브해처럼 살인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는 특히 그렇다. 법에 정식으로 접촉한 살인 용의자의 성별을 보면, 전 세계 전체에서 4분의 3 이상이 남성이다.)


외국만 그럴까? 아니다. 다시 우리나라 통계청 자료로 돌아와 보자. 42번 시트의 제목은 ‘주요 범죄의 범죄자’이다. 역시 대검찰청에서 제공한 자료로 동일한 기준으로 이번엔 주요 범죄의 범죄자 현황을 표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모든 범죄 유형에서 남성 범죄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높다. 정말 압도적이다. 여성 범죄자의 숫자는 비교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적다.


정세랑 작가는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사실에만 수동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본인 글을 좀 더 탄탄하게 받쳐줄 수 있는 중요한 통계 자료를 놓친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은 자료를 찾아내어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이라는 점을 부각해 우리 사회 대부분의 여성이 남성에게 가해를 당하는 입장이라는 프레임을 성공적으로 씌웠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바로 아래 부분이다.


독자들이 친절하고 시민으로 기능하는 남성 캐릭터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 변한 것이다. 깊은 트라우마로 인한 체질 변화 앞에 창작자로서 고민이 깊어진다. 현실이 참혹할 때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선한 남성 캐릭터는 기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이성애적 연애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작가들도 여럿 등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어떻게 정의 내린 것일까. 정세랑 작가와 그가 언급한 이른바 ‘한국 문학계 사람들’은 본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일부 사람들만 독자로 규정한 뒤 그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듣고 싶은 목소리만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많은 독자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도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현실이 참혹할 때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선한 남성 캐릭터’라는 워딩으로 인구의 절반을 구성하는 남성 전체를 악하다고 규정짓고 공격 대상으로 삼아서 남녀 간 싸움을 부추기는 건 작가가 취하기엔 너무 아쉬운 행태다.


아주 다행히도 이 질문에 대한 아디치에의 대답은 멋있었다. 글 첫머리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나 자신의 생각을 돌이켜 볼 정도로 훌륭한 답을 해주었는데 그대로 옮겨와 보겠다.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여성들은 강력한 성차별에 어떤 방식이든 원하는 방식으로, 최선이라 생각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죠. 다만 저의 경우엔 제 페미니즘이 너무 이념적으로 쏠려 실용성을 잃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전 사랑이라는 주제를 사랑해요.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요. 여성과 남성의 사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랑에 대해 쓰고 싶어요. 퀴어들의 사랑, 부모와 자식의 사랑, 친구들 사이의 사랑…. 사실 제가 쓴 거의 모든 소설들이 사랑 이야기인 듯합니다.

(중략)

저는 어릴 때 읽은 로맨스 소설들을 정말 좋아하지 않아요. 되돌아보니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더라고요. 여자는 원하지 않는데 남자가 확 잡아당기고, 그럼 여자가 남자의 넓은 가슴에 기대 녹아내리고…. 로맨스가 아니라 폭력이에요. 이제 와선 뺨을 찰싹 때려 주고 싶어요. 저는 여자 주인공이 자기 결정권을 가지는 사랑이야기를 원해요. 남자 주인공이 키가 크고 완벽한 것에서도 벗어나게 하고 싶고요. ‘아메리카나’의 남자 주인공 오빈제는 키가 작지요. 나이지리아 독자들이 오빈제가 키가 작은 것에 대해 대체 왜 그렇게 썼냐고 얼마나 불만을 호소해 왔는지 몰라요. 작을 수도 있죠. 키가 작은 남자도 매력적일 수 있어요. 남자 주인공은 완벽해야 한다는 바보스러운 아이디어에 집착할 필요 없잖아요. 지금껏 남자 주인공의 완벽한 외모가 그의 여성 혐오적인 면을 가리는 교묘한 변명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았나요?

(중략)

둘 사이에는 늘 권력 차이가 존재하죠. 남자에겐 거대한 저택이 있고 여자는 노동 계급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남자가 끌어안으면 저항하다가 안기고…. 말도 안 되죠. 저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여성 쪽이 남성의 상관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여성이 남성을 성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안 되나요? 지금껏 내내 남성이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했잖아요? 반대 종류의 이야기도 당연히 있어야죠. 전복할 거리들은 주변에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이야기를 전복시켜,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이야기들을 존재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한국 여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반해, 남성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 방향으로 간다면, 그건 해결책이 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수만 년 동안 존재해 온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일부예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매일 욕망을 품고 살아가고, 사랑을 원합니다. 남성들이 제거된, 혹은 연애나 성애에 대한 욕망이 제거된 세계는 제게는 SF나 판타지가 아닌 이상 진짜 세계가 되기 어렵습니다. 완벽한 왕자님 캐릭터만큼이나 진짜가 아니죠. 저는 진짜에 대해서만 쓰고 싶습니다.


나도 진심으로 진짜를 읽고, 진짜를 쓰고 싶다.


그동안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억압과 차별을 받아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를 인지한 많은 여성들이 분노에 휩싸이는 것도 당연하고, 그런 분노가 때때로 우리 사회가 도달해야 할 어떤 평등의 지점을 넘어 버리는 것도 (잠시 동안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공감력이 뛰어난 일부 사람들이 현재는 물론 과거의 타인에게 발생한 피해까지 마치 자신의 피해처럼 받아들인 결과, 이성을 잃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도 한편으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팩트를 왜곡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팩트를 왜곡하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을 생산하여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뿐이다.


그리고 성적 평등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두의 궁극적인 목적이 상대방을 아예 배제하거나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생하는 것이면 좋겠다. 우리는 결국엔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