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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Jan 14. 2020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독후감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직장 동료가 추천하면서 직접 책까지 빌려주어 읽게 되었는데, 빌려 읽는 도중 실수로 책이 물에 젖는 바람에 얼떨결에 소장까지 하게 되었다. 책과 내가 인연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이다. 1부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으로 구성되어 있고, 실제 작가는 5년에 걸쳐서 각 부를 한 권씩 출판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전체를 번역하고 출판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게 되면서 한 권으로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묶인 책이 560페이지짜리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배경


소설은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헝가리가 배경이다. 실제로 작가는 그 당시 오스트리아(당시 독일에 합병되어 있던)와 국경을 접한 헝가리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에 동원되어 가정을 떠났고, 어머니는 집에서 기르는 채소와 가축들에만 매달린 탓에 작가는 오빠와 남동생과 함께 독일군과 소련군의 시체가 쉽게 발견되는 들판을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작가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기에 묘사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이념과 이념이 충돌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 이념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존에 집중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짧고 간결한 문체로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이 그런 상황을 오롯이 겪으며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매력 - 1. 빠른 전개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극의 전개가 빠른 게 특징이다. 각 인물의 생각과 감정, 각 상황에서의 고민을 쓸데없이 길게 표현하며 질질 끌던 예전 드라마와는 달리, 상황을 압축하고 각 인물의 중요한 결정과 생각, 감정을 간결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표현하여 시청자가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쿨하거나 사이다 같은 느낌을 좋아하는 요즘 시청자의 입맛에 맞춘 것이다.


이 책이 딱 그렇다. 전개가 빠르다. 특히 책의 도입부인 1부는 한 두 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장을 주르륵 나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독자가 굉장히 짧고 빠른 호흡으로 책을 읽게 만든다. 마치 자극적으로 잘 만들어 낸 짧은 광고를 여러 편 보는 기분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방식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각 장에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만 짧고 강렬하게 묘사한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데 대부분의 장이 참혹한 전쟁과 그 속에서 아이들이 어떤 것들을 보고 배우며 자라나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열되어 있긴 하지만 드라마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순 없다. 이런 형태의 1부를 읽으면서 독자는 주인공들의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고, 그 덕분에 2부와 3부에서 주인공이 내리는 결정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만약 1부의 과정이 없다면 주인공의 반사회적이고 잔인한 성격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행동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부에선 전쟁 속에서 부모의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주인공이 자신의 생존 본능과 그에 따른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주인공은 가족을 얻고 사랑을 찾기도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전쟁만큼이나 비정상적이고 비극적이다.


2부부터는 1부와는 다르게 호흡이 길어진다. 전형적인 소설의 느낌이다. 다만 형식만 그렇게 바뀔 뿐 여전히 이야기는 속도감을 잃지 않고 진행되는데, 그렇게 진행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작중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거의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내적 갈등을 겪거나 어떤 사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주인공은 살면서 어떤 선택의 순간을 겪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라고 느끼며 고민할 만한 순간을 주인공은 선택의 순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순간에 이미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에 기반한 명확한 우선순위가 존재하며 그렇게 내린 우선순위를 거리낌 없이 실행한다. 설사 그 실행이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이나 자신이 잘해주고 싶은 특정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서슴없이 해를 끼치는데 (비록 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다고 해도) 그 행위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죄책감도 없다. 주인공의 성격이 이러하니 극의 전개가 빠를 수밖에 없다(어떻게 보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의 매력 - 2. 반대편 체험


2차 세계 대전에서 헝가리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편에 서서 참전했고 이후 '해방군'이라는 이름을 달고 침공해 온 소련에 패배하여 소련 공산당의 지배하에 살아가게 된다. 양 쪽 모두 우리나라 입장에선 이른바 '반대편'이어서 책을 읽으며 간접 체험하는 이들 사회의 모습이 신선하다. 



이 책의 매력 - 3. 반전


작가는 2부의 마지막 장에서 엄청난 복선을 던진 뒤 3부로 넘어간다. 그리고 3부에서 1부와 2부에서 독자의 머리에 쌓아둔 모든 사실을 뒤집으며 독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끊임없는 반전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모든 내용을 의심하고 복기하게 만드는 데 그 과정이 꽤나 즐겁고 짜릿하다.



조금 아쉬웠던 점


1부와 2부를 통틀어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나 고민이 드러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 소설 속에서 (아마도) 소련의 고위 당원으로 등장하는 페테르가 모국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본국으로 가기 전, 주인공과 인사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생존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주인공이 유일하게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데 그 내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넣게 된 계기를 책의 맨 뒤에 실린 작가와 작품 해설에 나오는 작가의 이력에서 찾을 수 있다.


1956년 소련의 탱크가 부다페스트로 밀고 들어오자, 반체제 운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조국을 탈출했다. 그녀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조국을 짓밟는 소련인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사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일체 드러내지 않던 주인공이 갑자기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대사를 읊을 때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계급이니, 인민을 대변한다느니, 부끄럽지 않냐느니 같은 대사는 주인공과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며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번뇌를 한 아름씩 안고 살아가다 죽는다. 다들 참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 참 안타까운 시대의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문득 궁금해져 세계 대전 전후의 헝가리 역사를 찾아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는 독일·이탈리아 측에 가담하였고 전쟁 말기가 되자 전 국토는 전쟁터로 변하였다. 전쟁은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나고 헝가리는 또다시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후 헝가리는 소련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략)

1949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어 라코시가 이끄는 근로자당(공산당)에 의하여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공산주의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라코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한 1956년의 헝가리 반공의거를 불러일으켰다.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약 10만의 시민이 봉기한 반소(反蘇)·반공 운동은 소련 군대의 개입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와 20만 명에 이르는 국외 망명자를 낸 채 진압되었다. 1956년 10월 헝가리 사태로 알려진 군중시위에 의해 개혁주의자인 I.너지가 정권을 잡았으나, 11월 3일 소련군의 개입으로 붕괴되고 친소 개혁주의자인 카다르가 집권하였다. 이때부터 근로자당은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33년간 1당 독재를 실시하였다.

(중략)

동구 공산권 중에서는 폭넓은 자유화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소련의 체코 침공에 가담함으로써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197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당의 지도적 위치를 명시하였으나 1975년에는 과도한 경제자유화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리 포크가 해임되고 라자르가 임명되어 카다르-라자르 체제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대전과 공산독재정권 (두산백과)


헝가리는 정치 개혁을 거쳐 1989년에 국가 사회주의를 마감하고, 이후 NATO와 EU에도 가입하며 현재에 이른다고 나온다(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민주주의의 출범 (두산백과)).


소련 침공 당시 헝가리를 탈출해 스위스에 정착한 작가는 하루에 10시간씩 시계 공장에서 일하면서 시를 쓰다가 이혼한 후 대학에 들어가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재혼한 뒤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11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작가에게 이런 헝가리의 역사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책 해설에 이런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이 소설에서 기술하고자 했던 것은 이별 - 조국과, 모국어와, 자신의 어린 시절과의 이별 - 의 아픔이다. 나는 가끔 헝가리에 가지만, 어린 시절의 낯익은 포근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는 느낌이 든다.


참 가슴 아픈 이별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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