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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Dec 20. 2019

문학잡지 Littor 20호 (노 키즈?)

오랜만에 읽어 본 문학잡지 독후감 

재작년에 우연히 ‘민음사’란 출판사에서 격월로 발행하는 문학잡지 ‘릿터(Littor)’를 알게 되었다. 

릿터에선 매번 주제 하나를 정해 그 주제와 관련해 작가들이 쓴 글-소설이든 에세이든-을 커버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지면 앞쪽에 실어주는데 이게 아주 흥미롭다. 커버스토리로 뽑히는 주제를 통해 요즘 문학계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고, 예민한 작가들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어서 좋다. 


커버스토리뿐 아니라 소설, 시, 에세이 등 온갖 장르의 글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점도 좋다.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글들은 일상에서 잘 접하지 않게 되는데(다른 장르의 책은 사질 않으니깐…) 릿터를 통해서 오랜만에 다양한 장르를 읽으며 각 장르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국내 작가의 글뿐 아니라 외국 작가의 글도 읽을 수 있고, 이런 잡지에 실리는 글은 대체로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말을 꺼낸 김에 오랜만에 각 장르를 접한 감상을 짧게 적어 보자면, 아직 시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더라. 학교 다닐 때 국어나 작문 시간에 읽었던 시는 그래도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적당히 읽다 보면 전체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릿터에 실리는 대부분의 시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현대 설치 미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앞에 서서 구석구석 세밀하게 보다가, 이게 아닌가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 전체를 조망해 봐도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들고, 그래서 작품 앞에 높인 해설판을 봤는데 해설마저 공감하기 어려운 거대한 조형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 그래도 업무와 육아로 점철된 힘든 하루를 마치고 보는 건데… 이해할 수 없으니 재미가 없었고 재미가 없으니 자꾸 건너뛰게 됐다. 에너지 넘치는 주말에나 한 번씩 도전해 봤고, 그마저도 쉽게 관뒀다. 그래서 시는 다시 조금 멀어졌다. 문학 장르 중 가장 천재성이 엿보이는 게 시라고 누가 그랬는데 아무래도 내 안목이 아직 부족한가 보다.


반면 리뷰, 소설, 산문, 인터뷰는 아주 재밌게 읽었다. 특히 이번 호에 실린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인터뷰는 나에게 여러모로 깊은 감명을 주었는데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다음 글에 제대로 적어보려고 한다. 

  

소설은 아주 짧은 단편이 통째로 실리기도 했고 조금 긴 중편이 여러 번에 걸쳐서 연재되기도 했다. 국내 작가의 글도 있었고 외국 작가의 글도 있었다. 어떤 호에선 실린 글의 수준 차이가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어느 작가의 어느 글이든 읽는 맛이 있었다. 


처음엔 편견을 갖고 읽기 시작했던 연예인 인터뷰도 의외로 재밌었다. 내 예상보다 그들의 문학적 취향이 괜찮았고, 그래서 인터뷰도 생각보다 재밌었다.  


여러모로 작년 한 해 정기 구독해서 재밌게 잘 보았다. 그런데 이게 잡지답지 않게 가볍게 보기 힘들어서 다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읽다 보니 한 권을 다 읽는데 몇 주가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잡지 외에 다른 책을 읽을 시간이 잘 나질 않아서 올해는 정기 구독을 신청하지 않고 다시 읽고 싶은 소설을 읽는데 집중했는데, 우연히 최근에 2019 10/11, 20호의 커버스토리 주제가 ‘노 키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애 둘을 키우며 늘 노 키즈 문화에 신경 쓰며 살고 있는 입장에서 안 살 수가 없었다. 과연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들은 최근의 노 키즈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우선 잡지의 첫머리에 실린 에디터 서효인 님의 말을 옮겨 적어보겠다.


의아한 마음에 물음표를 달아보았다. 노 키즈? 도무지 성립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말인데, 종종 쓰인다.

그렇다고 하여 이번 호 <<릿터>>가 이른바 ‘노 키즈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다. 혹자는 현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아 생길 우리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고는 한다. 또 누구는 아이를 둘 이상 낳는 것을 두고 애국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정작 태어나 자라는 아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호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 여기에 함께해야 할 약한 존재들.

역시. 이 정도 잡지의 에디터는 내가 늘 대충 뭉뚱그려서 머리에 쑤셔 넣고 다니던 의문과 감정을 이렇게 멋지고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해 줄 수 있구나. 내가 하고 싶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실려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단숨에 검색해서 결제 비밀번호를 누르게 되었다. 며칠 뒤 집으로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어 표지 디자인을 살펴봤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이윽고 표지 디자인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책 표지 사진을 보자.



   

보이는가? 책의 앞면 그림은 그야말로 ‘노 키즈 존’이다. 길거리 어디를 봐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뒷면을 보자.



여기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뒷면에 몰려 있다. 노 키즈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표지 디자인이다.


릿터에 실렸던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글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짧게 적어보았다.


칼럼니스트 최지은은 ‘예쁜, 여자, 아이라는 굴레’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최근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배스킨라빈스의 광고를 비롯해 요즘 온라인과 방송에서 자주 나타나는 여성 아동의 성적 대상화와 더불어 미디어에서 아이를 소비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이 칼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옮겨와 봤다. 최근에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출된 환경과 편집의 개입을 통해 성인 시청자가 ‘귀엽다’는 감상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전시되는 아동의 모습이 대표성을 띠는 사이, ‘귀엽지 않은’ 현실의 아동은 늘어나는 ‘노 키즈 존’과 함께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
그러나 양육자가 아동의 소음과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즉시 ‘맘충’이라 호명하며 아동은 숨 쉬듯 민폐 끼치는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아동은 언제든 꺼 버릴 수 있는 모니터 안에서만 사랑받을 수 있다.


최근에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아이가 나오는 예능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얻는 것과 동시에 맘충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노 키즈 존이 늘어나고 있다니. 요즘의 우리 사회는 저출산이 문제라는 점에는 공감하고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그 속의 아이들은 아주 귀여워하면서 정작 일상에선 아이들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에서는 이런저런 논리를 앞세워 내가 살아가는 데 거치적거리지 않게 아이들을 일상의 뒷면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자기가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만 아이를 소비하는 그들이 참 야속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런 글을 만나게 되어 아주 반가웠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문화가 점점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 대놓고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생존에 기계적인 생산성보다 창의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창의력의 근간이 되는 다양성과 그런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상호 존중 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물론 아직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사람들은 편협하고 고지식하며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이른바 ‘꼰대’로 매도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일은 줄어들고 있다. 올바르지 않은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대놓고 하지 못하게 하면 속으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게 되면서 결국엔 그런 생각 자체가 소멸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직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도록 우리 사회의 문화가 꾸준히 반대 방향의 압력을 행사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사회의 각 구성원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데 이 점은 현재 상황으로 봐서(이런 주제로 문학잡지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한동안 문제없이 잘 진행될 것 같다.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어 생존 자체가 문제라고 인식되었던 지난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의 취향은 존중받기 힘들었다. 특히나 몇십 년에 걸쳐 경제 발전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철저하게 무시했던 우리 사회는, 구성원에게 효율적이지 않은 취향은 사치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리는 대다수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인식하는 취향에 따르기를 강제받았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와 맞지 않는 취향은 사치라고 생각하고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을 사치스러운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모습과 같은 생각으로 한 몸처럼 달려가는 방법만을 배우게 되었는데 여기서 같은 모습과 같은 생각의 기준이 되는 사람은 대략적으로 성인 남성이었다. 대부분의 사회 제도와 장치, 상품 등이 사회적으로 가장 생산성이 높다고 여겨지는(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여겨지는) 성인 남성이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또한 그들의 취향에 맞춰서만 구비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시대를 벗어나고 있다. ‘느리게 걷기’, ‘슬로시티’와 같이 효율과 배치되는 키워드가 유행하고, ‘혼밥’, ‘혼술’ 문화가 사회적 공감을 얻으며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나 ‘개인주의자 선언’과 같은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 발전만큼이나 각 구성원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움트면서 문제를 해결할 때 효율적인 방법보다 모두를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런 얘기를 거창하게 하는 이유는, 이런 사고방식과 문화의 발전이 일부 사회 구성원이 퍼뜨리고 있는 ‘노 키즈’ 문화를 막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양성과 상호 존중은 필연적으로 개개인의 불편함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동성 간 결혼을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데 따르는 비용은 이성애자인 데다가 이미 결혼을 한 나에겐 평생 이용하지 않을 법과 제도를 논의하는 데 내 세금(법과 제도 정비를 검토하는 데 필요한 공적 인력의 업무 시간 등)을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좁은 시야로 바라본다면 난 그런 쓸데없는 것 논하는데 비용 낭비하지 말고 당장 나에게 쓸모 있는 부분(민식이 법이나 타다 금지법)에 집중해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넓게 보면 그들의 행복이 곧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사회 각 구성원이 행복해야 그들이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와 존중으로 이 사회를 채워줄 수 있을 테고, 그래야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고 따뜻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가 합리적 관점에서 최대한 각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 기꺼이 내 세금과 시간을 사용할 의사가 있는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는 사회는 그 이전에 모든 상품과 제도 측면에서 ‘사회 전반의 표준’에 해당하는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은 불편함이 더해지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이 겉으로 불편한 내색을 표현하거나 속으로 그런 심정을 품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만약 내가 아이가 없었다면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렇게 했을 수도 있으니깐. 하지만 그러면 안된다. 더 넓고 멀리 보며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욱 따뜻하고 안전한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


말을 더 잇기 전에, 위 칼럼에 나온 말의 일부를 다시 인용해 보겠다. 


그러나 양육자가 아동의 소음과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즉시 ‘맘충’이라 호명하며 아동은 숨 쉬듯 민폐 끼치는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불쾌한 단어인 ‘맘충’이란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뜻하는 ‘맘’과 벌레를 뜻하는 ‘충’이 합쳐진 이 말은 아이의 양육자를 엄마로 한정 지어 버리는 ‘맘’이라는 부분에서도 불쾌하고 사력을 다해 우리 사회의 일원을 키워내고 있는 양육자를 벌레 취급하는 ‘충’이라는 부분에서도 불쾌하다. 차라리 시끄럽게 굴거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며 1차원적으로 욕하는 게 낫다. ‘애들은 그럴 수 있지’라고 인정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남들에게 민폐 끼치지 못하게 부모가 통제했어야지, 이 맘충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훨씬 더 설득하기 어렵고 상대하기 까다롭다.  


아이는 필연적으로 시끄럽게 떠들고 뛰어다니는 존재다. 유명한 아동 교육 전문가나 아동 심리학과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정신적, 혹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라고 얘기한다. 소아과에 진료받으러 가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아이가 평소와 달리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지 않았냐는 질문이다. 분명하게 말하는 데 어떤 아이가 앞에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올려놓지 않았는 데도(사실 그런 것을 올려놔도 길어야 1시간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하고 묵직하게 앉아있다면 그 아이는 교육을 잘 받은 게 아니라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감기 같은 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정서적으로 불필요하게 강한 압력 혹은 학대를 받고 있는 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아이가 뛰어다니며 떠든다는 것은 누군가 숨을 쉬고 먹을 것을 먹는다와 완전히 같은 맥락의 문장이다. 아이는 떠들어 대면서 뛰어다니게 설계된 존재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알겠다. 아이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고, 길거리나 운송 수단(비행기, 버스, 지하철) 같이 살아가기 위해 이용할 수밖에 없는, 대안이 없는 공간에서는 애들이 그렇게 행동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다. 그런데 요즘 사회에서 카페나 특정 식당이 생존에 필수인 공간은 아니잖아? 애들이 이용하기 편하게 만든 식당이나 키즈 카페에 가면 되잖아? 이미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데 왜 자꾸 서로 불편하게 이런 카페에 와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서로 불편할 수 있으니 그런 공간을 노 키즈로 지정하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안 오면 되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래서 그런 공간에 잘 데려가지 않는다. 커피와 같이 뜨거운 액체가 미적 감각을 위해 어느 정도 안정성을 포기한 가구 위에 올려져 있는 이른바 요즘 핫한 카페와 같은 공간은 내가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제어하는 게 조금 힘들기 때문에 잘 데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공간 자체를 노 키즈로 설정하는 것엔 극구 반대한다. 국가에서 사회적 합의를 거쳐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과, 특정 업주가 그런 합의 절차 없이 자의적 판단으로 아이가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법적으로 누군가의 출입이 제한된 공간은 모두에게 출입을 허용함으로 발생되는 사회적 손실이 출입을 제한함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이득보다 크다는 것이 다방면으로 명백하게 증명되었기 때문에 출입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는 것으로 초래되는 불편함을 감수할 명분과 근거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노 키즈 존은 그런 명분이나 근거가 없다. 근거란 게 고작 몇 번의 극단적 사례(비양심적인 소수의 양육자가 만들어 낸 사례) 일뿐이다. 그런 빈약한 근거로 지레 모두가 그럴 것이라 짐작하여 누군가의 출입을 막는 것은 명백한 차별 사례고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 행위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국 우리 사회는 아이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인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변호인을 봤다면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에서 곽도원 배우가 분했던 차동영이 “변호사라는 사람이 국가가 뭔지 몰라?”라고 묻자 송강호가 연기했던 송우석 변호사가 “압니다. 너무 잘 알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는 국민입니다”라고 답하는 장면. 


2017년에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직접 끌어내린 뒤 구치소에 수감시킨 역사를 갖고 있는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감히 ‘국가는 국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명제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그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범주엔 쓸데없이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자꾸 눈에 거슬리고 나를 방해하는 것 같은 바로 그 아이도 포함된다. 단지 사회적 합의에 의해 여러 가지 권한을 제한시킨 것일 뿐이다. 아이는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할 어엿한 국민이다. 


게다가 사실 아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국가가 성립하기 위한 3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다. 아이가 줄어든다는 건 국민이 줄어든다는 것과 같고, 그건 국가의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위협받는다는 것과 같다. 국가는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 어떻게든 국민을, 국민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고 자연히 아이와 아이의 양육자에게 관심을 갖고 시간과 예산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대세를 거스르는 건 무모한 짓이다. 노 키즈 문화는 결국 사라지게 될 문화다. 


이 사회는 결국 아이를 배려하고, 장애인을 배려하고,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을 배려하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배려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배려하고,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등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게 민주주의의 순리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랑을 할 때 그 사람의 단점까지 사랑하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힘든 일인가를 알 수 있다. 가장 뜨겁고 강렬한 사랑 중 하나인 이성 간의 사랑에서도 상대방의 단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토록 힘든데 하물며 내가 오늘 처음 보는 아이의 시끄럽고 불편한 모습을 참아내는 건 여간해선 쉽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당연히 한다.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 입장에서 이 점을 가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의가 계속되니 내 권리였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들이 어떤 배려를 하고 있는지 잊지 않아야 한다. 나와 내 아이를 위해 이 사회를 따뜻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그들의 고마운 마음 씀씀이와 노력을 잊으면 안 된다.


얘기가 조금 길어졌는데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글이 있다. ‘너무 늦게 왔지만 그래도 늦지 않았어 (다문화 어린이를 위한 서점 ‘라운드 테이블 북스’)’라는 제목의 글이다. 


런던 브릭스턴 지역에 위치한 ‘라운드 테이블 북스’라는 다문화 어린이를 위한 서점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아직 다문화에 익숙지 않은 나에게 아주 많은 화두를 던져준 글이었다. 참고로 런던의 브릭스턴이란 지역은 2015년 기준으로 유색인종이 전체 인구의 무려 44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다문화가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라고 한다. 


책 속에 나온 문장 몇 개를 인용하겠다. 딱히 덧붙일 말은 없다. 인용문에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깔끔하게 적혀있다.


‘흑인 우주인 이야기가 없으면 흑인 어린이만 불행한 게 아니에요. 많은 연구에서 아이들은 책 속 주인공을 자신의 친구로 인식한다고 하거든요. 설령 평생 흑인을 만나 본 적이 없대도 책에서 읽었다면 서로 이해할 확률이 높아요. 하지만 흑인을 듣도 보도 못한 아이들은 혐오나 편견을 갖기 쉽죠.’ - 카디야 오스만 서점 책임자


이 서점엔 필리핀의 마약 문제처럼 동시대 문제를 숨기지 않고 보여 주는 책들이 보기 좋은 곳에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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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위험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죠. 하지만 어떤 지식도 차단해선 안됩니다. 아이들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야 해요. 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질문은 하나도 없어요.’


오스만에게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한국의)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모두가 자신의 가족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각기 다른 방식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저 밖의 아이들이 조금 더 쉽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해 봤으면 해요.’


우리 모두가 이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꼭 한 번씩 생각해 봤으면 하는 화두였다. 


아무쪼록 우리 사회가 서로서로를 조금씩 더 배려할 수 있는 사회로 발전하길 간절히 바라며(정말 간절하다)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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