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하지 말라.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니 헤밍웨이의 소설을 더 읽고 싶어 졌다. 그래서 예전부터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 중 하나를 보기로 결정했다. 둘 다 내용은 전혀 몰랐다. 뭘 먼저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를 먼저 보기로 결정했다. 셋 중에서 가장 늦게 발표된 노인과 바다로 시작했으니 발표 역순으로 읽어보면서 헤밍웨이의 사고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 작문 실력과 표현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느껴보고 싶었다.
위에 언급한 세 책을 헤밍웨이가 발표한 순서대로 놓아보면 아래와 같다. 대략 10년 터울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1929년)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년) - ‘노인과 바다’(1952년)
무기여 잘 있거라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이 벌어지던 당시의 이탈리아가 배경이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1936~1939년) 당시의 스페인 세고비아 남쪽이 배경이다. 노인과 바다는 작품을 쓰던 당시의 시점에서 쿠바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코히마르(Cojimar)라는 어촌이 배경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려면 책이 있어야지. 왠지 소장하고 싶어서 그냥 질러버렸다.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깊게 생각하지 않고 표지 디자인이 제일 마음에 들었던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으로 사서 읽었다.
일러스트가 소설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거친 느낌이 작가와도, 소설의 내용과도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많이들 그렇겠지만 겉표지는 이쁘기만 할 뿐 실제 책을 읽을 때는 불편해서 그냥 일러스트만 한 번 구경한 뒤 벗겨서 책장에 잘 모셔두었다. 그리고 읽을 때는 이렇게 노란 속표지 상태로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궁금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소설 속 배경을 좀 더 찾아봤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이 끝나던 1939년에 집필을 시작했고, 1940년에 출판됐다. 1936년의 스페인은 공화파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발하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군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내전으로 확대된 전쟁이다. 헤밍웨이는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스페인 공화파에 가담하였고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헤밍웨이는 앰뷸런스 운전기사로 참전하는데 폭격을 받아 부상을 입게 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두산백과))
스페인 내전 관련해서는 네이버 지식 백과를 참고하길 바란다. 잘 정리되어 있어서 먼저 읽고 소설을 읽으면 더 풍부하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노인과 바다’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소설이다. 둘 다 헤밍웨이가 쓴 소설이란 걸 모르고 본다면, 같은 작가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뭘 읽어도 하루키의 느낌이 나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읽으면 뭘 읽어도 파울로 코엘료의 느낌이 나고, 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으면 뭘 읽어도 기욤 뮈소의 느낌이 나는데 헤밍웨이의 이 두 소설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내가 그런 느낌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인 로버트 조던과 그와 사랑에 빠지는 마리아와의 정사를 묘사하는 부분이 너무 괴상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아주 별로였다.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해서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감정적 변화를 비유로 묘사하는 부분은 그럭저럭 읽을만했다. 문제는 그 둘이 나누는 대화였다. 실제로 저 시대의 사람들은 성행위 중 저런 대사를 뱉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현재의 내가 듣기에는 너무나도 오그라드는 대사였다. 덕분에 감정이입이 전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의 토끼’라니! 로버트 조던이 자꾸 마리아를 나의 토끼라고 부르는 데 나중에 짜증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떻게 보면 너무도 참신해서 처음에는 그들이 정사를 벌인 건지 인지하지도 못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분위기를 띄우다 정사 직전에서 멈춘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독후감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영 별로다.
굳이 얘기가 나왔으니 또 짚고 넘어가자면,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요즘 느낌과는 잘 맞지 않았다. 특히 마리아라는 인물은 예전 남성 위주의 문화에서 전형적으로 소비되던 딱 그런 유형의 여성이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남성의 사랑만을 갈구하며 철없이 행동한다는 느낌을 주는 여성. 요즘 시대에 출판되었다면 크게 비판받았을 부분이다. 그런 마리아를 대하는 로버트 조던의 대사 중에서도 문제가 있는 대사가 있다. 지금 떠오르는 건 ‘조금 전에 당신이 뭐라고 말했더라면 아마 당신을 때렸을지도 몰라. 사내란 화가 나면 짐승과 매한가지거든.’이라는 대사다. 잠들어 있는 마리아를 옆에 두고 이런 독백을 뱉으며 마리아를 끌어안는 장면인데 대사가 너무 충격적이라 몰입이 순식간에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쓰다 보니 단점부터 나열한 것 같은데 위와 같은 단점을 빼면 내용은 재밌다. 소설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필라르를 통해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념에 따라 갈라선 마을 주민들이 겪는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도 흥미로웠고, 적 후방에서 소규모로 동굴에 숨어 살며 게릴라 전을 펼치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아주 재밌었다. 적어도 읽는 시간이 아까운 소설은 아니었다. 장점이 너무 짧나? 그냥 위에서 언급한 단점 외의 다른 모든 부분은 장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꽤 긴 소설이다.
마리아와의 사랑 장면 외의 다른 부분에선 강하고 직선적이고 건조한 이른바 헤밍웨이식 문체가 어느 정도 느껴진다(정사 장면은 빼고, 계속 언급하고 싶을 정도로 빼고 싶다). 특히 다리 폭파 작전에 임하는 로버트 조던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얼핏 노인과 바다에서의 노인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로버트 조던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현실로 잡아 끌어내리는 장면이다.
그때 무엇엔가 굴복당하듯, 그는 비현실적인 세계로 빠져들고 싶은 사치스러운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조던은 종종 전쟁 이후의 삶을 상상하며 현실 도피에 빠진다. 특히 마리아와 사랑에 빠진 이후엔 마리아와 함께하는 전쟁 이후의 삶을 머릿속에 그리며 잠시 현실을 잊고 행복한 상상으로 도피한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깨닫고 스스로 ‘사치’라고 정의 내린 상상에서 빠져나와 마음을 다잡으며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모습은 바로 전에 읽었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모습과 대비되는 모습이었고, 출퇴근 시간에 툭하면 상상의 나래를 펼친 뒤 그 속에 푹 빠져있는 나와도 대비되는 모습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생각하다 보니 또 재밌는 문장이 생각났다.
개새끼라는 욕을 외국어로 말한다면 그 느낌이 훨씬 무뎌지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겠지.
우리는 종종 욕이 가장 잘 발달한 언어는 각자가 쓰는 모국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바로 위 문장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뇌는 외국어를 직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번역이나 통역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될 테니깐.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영어엔 젬병인 내가 누군가한테 ‘개새끼’를 들을 때와 ‘son of a bitch’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감정이 똑같을 수는 없다. 영어는 듣는 순간 머리에서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끼어들면서 내가 욕에서 느끼는 감정이 순화되고 만다. 외국어를 못할 때 누릴 수 있는 장점이 하나 생겼다. 욕을 들었을 때 기분이 ‘덜’ 나쁠 수 있다. 야호 신난다. 아주 신나서 눈물이 나온다. 나는 언제쯤 영어로 욕을 들어도 한국어로 들었을 때와 ‘똑같이’ 기분 나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I love you’를 들었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머리가 하얘지며 심장이 귀 옆으로 올라와 쿵쾅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영어 타령은 그만두고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이 소설의 첫 장에 쓰여있는 시를 소개하고 싶다.
아무도 자신만으로 완전한 섬이 되지는 않는 것이니, 모든 사람이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라. 한 줌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나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더 작아지는 것이리라. 이는 하나의 곶이 씻겨 나가고 그대의 친구, 그대의 영지가 씻겨 나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리라. 나 자신이 이 인류의 한 부분이니, 친구의 죽음은 곧 나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하지 말라. 그것은 곧 너 자신을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존 던
정말 멋진 시다. 다른 언어의 독자에게도 이 정도 감흥을 주는 시라니. 이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음미하면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하게 느껴지는 시다. 어쩌다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면, 꼭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음미하길 바란다.
그럼 소설 속에서 나온 대사로 빌려 이 소설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걸로 독후감을 마치겠다.
하지만 그가 어색해하는 것은 헤어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다시 만날지 어쩔지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작별 인사에서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재회에 대해서 그가 느끼는 어색함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