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더클래식의 미니미니북 시리즈로 읽은 세계 문학 중 감명 깊었던 소설 중 하나인 데미안의 독후감이다. 미니미니북은 손바닥만한 크기여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며 출퇴근 시간에 읽기에 아주 좋다. 정가가 3900원이고, 이런저런 할인 혜택을 찾아 적용하면 그야말로 커피 한 잔 값도 안되는 가격이라 지르기도 좋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던 시대에서 창의력과 혁신을 강조하는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을 몸소 겪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위 구절을 들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창의력과 혁신을 강조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구절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데미안은 몰랐지만 위 구절은 알고 있었고, 한때 가슴에 품고 살기도 했었다. 그 당시엔 이 문구가 옛 소설에서 나온 문장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당시에 쓸데없이 서점에 넘쳐났던 어느 자기 계발서에 적혀있었거나, 혹은 그런 자기 계발서의 내용과 비슷한 강의를 하고 다니던 한물 간 기업가나,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자기 계발 강의로 ‘부자’가 되었으면서 마치 다른 대단한 것으로 ‘성공’한 냥 떠들어 대는 어떤 자기 계발 강사가 했던 말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래서 뻔한 자기계발서 시장에서 이런 괜찮은 문구가 나오기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다.
위 구절은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싱클레어에게 그의 인생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친구 데미안이 건네 주었던 쪽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사실 쪽지에는 뒤에 두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쪽지의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뒤에 적힌 두 문장 덕분에 구절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어딘가 종교적인 색채가 더해졌고, 대신 창의력과 혁신의 의미가 조금 옅어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이 문구를 창의력과 혁신을 강조하는 문구로 사용할 때 뒤의 두 문장을 잘라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데미안이라는 이름 자체도 데몬(daemon)과 같은 뜻으로 사실은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있다(난 이 사실을 모르고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바로 이 느낌이 내가 데미안을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데미안에도 창의력이나 혁신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 내용이 존재하긴 하지만, IT 스타트업으로 대변되는,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창의력과 혁신을 생각했을 때 머리에 떠오를 그런 어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창의력과 혁신이다.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소설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데미안을 써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우리에겐 3.1 운동으로 기억되는 그 해)에 출판했다고 한다. 데미안을 쓰기 전에도 이미 유명한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당시 세계 대전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비난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않아서(참고), 혹은 자신의 유명세를 버리고 소설 자체만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이유(참고)로(어느 이유가 맞는건지 모르겠고, 혹 둘 다 맞거나 둘 다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데미안을 집필한 뒤 익명으로 출판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익명으로 발표한 소설이 당시 독일 청년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출판 1년 뒤에 결국 헤르만 헤세가 쓴 소설이라고 밝혀졌고, 그렇게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소설가가 꿈인 나에게는 정말이지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은 철저히 한 개인의 내면의 성장에만 집중한 소설이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강렬하고 긴박했을 당시의 집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대적 배경이 소설에 나타나는 건 마지막 잠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내용은 에밀 싱클레어란 소년이 프란츠 크로머란 소년과 데미안이라는 소년, 피스토리우스라는 목사와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만나면서 몇 가지 사건을 겪고, 그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생각과 감정의 에너지가 폭발하듯이 커지는 것을 느끼다가, 어느덧 너무 커져버린 에너지에 휘둘리며 방황하기도 하다가, 결국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닫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 모습이 득도의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자기 혁신의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소설 전반에서 상당히 많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는데 그 정점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인 것 같다. 이 구문을 이해하려면 ‘아브락사스’가 어떤 신인지 알아야 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이런 저런 뜻이 나오는데 위 구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작가가 소설에서 설명한 그대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작가는 작중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의 학교 선생님을 통해 아브락사스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 그러나 아브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개괄적으로 이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 역할을 하는 일종의 신의 이름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는 표현이다. 소설 초반부에 싱클레어의 가족은 종교적 선함과 밝음의 대명사처럼 묘사된다. 가족의 품에서 세상의 선함과 밝음만 보고 자란 싱클레어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 점점 커가면서 집과 가정 밖으로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혀가다가 결국엔 악과 마주하게 된다. 그 악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싱클레어의 인생 멘토, 데미안이라고 할 수 있다. 작중에서 싱클레어를 직접적으로 괴롭혔던 프란츠 크로머는 그저 마중물이나 계기 정도 였을 뿐이다. 싱클레어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싱클레어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어떻게든 감추려고 했던 악을 이끌어 내어 자각하게 만든 뒤, 각고의 과정을 거쳐 그 자체를 싱클레어 내부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선한 영역과 결합시켜 결국엔 싱클레어 그 자체로 녹여내고 체화시킨 인물은 바로 데미안이다.
싱클레어는 이 과정을 거치며 내부적으로 훌쩍 성장한다. 그리고 그 성장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데미안을 매개체로 에바(eve) 부인과 입맞추는 장면이다. 여기서 에바 부인은 데미안의 모친이다. 데미안과 함께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싱클레어는 전쟁 중 부상을 입고 누워있는 와중에 에바 부인의 키스를 데미안의 입술을 통해 전달받는다. 데미안이 에바 부인이 부탁한 입맞춤을 싱클레어에게 전달하면서 내뱉는 대사는 아래와 같다.
그럴 때 너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너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될거야. 알겠어?
이 대사를 통해 싱클레어의 내면이 어느덧 자신의 멘토였던 데미안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은 그런 자신을 깨닫는 싱클레어의 모습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지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특이한 소설이었다. 지극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이나 데미안이나 하나같이 쓸데없는 생각으로 몇 년을 보내다가 어떤 광기에 휩싸여 ‘기쁘게’ 참전하는 이상한 소설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이 소설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가 없다. 이 소설의 핵심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자각한 뒤 효과적으로 다스려 나가는 방법을 터득하여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토대를 마련하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독보적인 소설인 것 같다.
이 소설을 읽다가 떠오른 소설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또 하나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떠올랐던 이유는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 때문이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데미안보다 먼저 읽었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마치 동일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비슷한 느낌이었고 소설의 줄거리를 떠나 두 장면 모두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다음으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떠오른 이유는 두 소설 모두 전쟁과 관련된 소설인데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전쟁의 분위기와 전쟁에 참여하는 주인공의 동기, 전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을 다룬 소설은 훨씬 많지만 최근에 읽은 게 이 두 소설이어서 더 비교하게 되었던 것도 같다.
데미안에서 전쟁은 자기 성찰의 한 과정으로 느껴진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자기 성찰 중 세상의 변화를 눈치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것이 전쟁임을 알게 되고 ‘모험과 거친 운명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며 기꺼이 참전한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기뻐하는데 이와 관련해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너는 이 사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볼 수 있을 거야!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 되겠지. 지금도 사람들은 벌써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어. 그들에겐 생활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었단 말이지.’ 전쟁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이루겠다는 사람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마치 자아 성찰과 자기 내면 탐구를 완성시켜주는 하나의 수단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전쟁이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참혹함과 무자비함은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전쟁마저도 어떤 비유나 상징 정도로 소비되는 것 같은 느낌. 당시 독일 사람들이 어떤 확신을 갖고 전쟁에 나섰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반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표현되는 전쟁은 데미안과는 사뭇 다르다. 이 소설에선 전쟁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앞에 펼쳐진 잔혹한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를 상세하게 표현하는데 이를 통해 전쟁의 잔인함과 참혹함, 무자비함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수시로 전쟁 후의 나날을 상상하고 기약하며 현실에서 도피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목숨을 걸고 헤쳐나가야 하는 현실의 상황이지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자아 성찰의 과정 같은 게 아니다. 데미안에 나오는 표현처럼 ‘거대한 한 마리의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있는데, 그 알은 이 세계와 같은 것이므로 이 세계는 산산조각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라고 철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자신이 죽는 것 뿐 아니라 적군을 죽일 때 마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에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이렇듯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두 소설을 비슷한 시기에 읽을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비록 내 현실은 팍팍했지만 소설을 읽는 순간만큼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잠실에서 서현으로 가는 지하철 속에서, 다시 서현에서 송파로 오는 지하철 속에서 나는 싱클레어가 되어 베아트리체와 에바 부인을 갈망했고, 로버트 조던이 되어 마리아를 갈망했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소설을 좀 일찍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만약 20년 전에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내 삶이 조금 바뀌었을 것 같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 데미안을 읽었다면 인생을 바라보는 내 가치관이 조금 달라졌을 것 같다. 특히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 같다. 나중에 내 자녀들에겐 꼭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해 줄 생각이다.
그리고 또 든 생각은, 소설가를 꿈꾸는 입장에서 데미안 같이 비현실적인 인물을 이토록 현실감 있게 그려낸 헤르만 헤세의 능력이 부럽다는 것이다.
난 언제쯤 내가 창작한 그럴듯한 세상에서 내가 창작한 설득력 있는 인물들이 각자의 동인에 따라 살아 숨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