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nugeun Nov 24. 2019

다시, 노인과 바다

20년이 지난 뒤 다시 읽어 본 노인과 바다의 독후감

약 4달 전, 날이 막 더워지기 시작할 때쯤에 볼일이 있어서 한 대형 서점을 찾아갔었다.  그러다 ‘더 클래식’이란 출판사에서 ‘세계 문학 미니미니북’이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세계 문학 작품 몇 점을 아주 콤팩트한 크기의 책으로 출시한 걸 발견했다. 미니미니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책 한 권이 내 손바닥(손 전체가 아니라 손가락을 뺀, 정말 손바닥만 한) 정도의 크기였다. 당시 전시되어 있던 책은 노인과 바다와 이방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간실격,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이걸 살까 말까. 하나 들어서 펼쳐보니 종이의 질감은 나쁘지 않았다. 더 클래식이란 출판사는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였지만(사실 내가 아는 출판사 자체가 많지 않다. 기껏해야 민음사, 열린 책들, 펭귄클래식 정도), 크기에 비해 만듦새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마치 예전에 아주 작은 크기의 해적판으로 출시된 일본 불법 만화책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그 자리에서 조금 읽어보았다. 그런데 번역 품질도 괜찮았다. 사도 괜찮겠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e북 리더기를 들고 다닌다고 해서 출퇴근 길에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 읽지도 않았다. 그럼 그보다 가볍고 작아서 심지어 청바지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이 책을 안 살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그 자리에서 노인과 바다를 충동구매했다. 가격도 4천 원이 채 되지 않아서 아무 부담이 없었다. 노인과 바다를 고른 이유는 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그날따라 제일 끌려서였다.

그리고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이 크기의 책에 매력을 느껴서 추가로 4권을 더 구매했다.


오즈의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 집에 그림책 버전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몇 번 읽어주었는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정작 나는 이 두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샀고, 데미안과 이방인은 어디서 제목은 들어본 유명한 소설인 것 같은데 역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샀다. 아무래도 아이들 시선에 맞춘 오즈의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굳이 독후감을 남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이방인은 독후감을 남길지 말지 고민되는 수준이다. 반면 데미안은 꼭 한 번 독후감을 남기고 싶다. 별생각 없이 읽게 되었는데 노인과 바다만큼이나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노인과 바다를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줄거리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고기 잡으러 나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다가 기껏 커다란 물고기 하나 잡았는데 결국 상어에게 다 뜯기고 뼈만 가지고 돌아오는 이 허무한 줄거리의 소설이 도대체 왜 그토록 유명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의 난 노인이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음…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힘든 과정을 거쳤어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남지 않았다면 그 과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해야 맞겠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만약 나처럼 언젠가 오래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봤었는데 그때는 이 책이 왜 그렇게 유명한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면, 가볍게 한 번 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별로 길지도 않다. 노인과 바다는 소설 중에선 짧은 편에 속한다. 게다가 이미 읽었던 소설이라면 한 번 더 읽어보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한 번 더 읽어보시라.


난 이제야 왜 헤밍웨이가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쥘 수 있었는지 조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발하는 청소년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말하겠다. 어떤 사정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치열하게 사회에 내던져져 온몸으로 냉혹한 현실을 느끼게 된 사람들에겐 다를 수도 있겠다. 세상엔 나보다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훨씬 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더라. 정말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는데 많다. 그리고 그런 청소년에겐 어울린다. 슬프게도 그런 애어른들에겐 어울리는 소설이다. 하지만 난 운 좋게도 가정과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적절한 배려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당시엔 노인과 바다가 품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한참이나 지나서,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이 두 번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정글 같은 사회에 뛰어들어 꿈과 희망에 부풀어서 당찬 걸음으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점차 내 능력의 크기가 현실이라는 장벽의 크기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처절하게 체감한 뒤에 찾아오는 좌절과 슬픔을 오롯이 느껴본 사람이어야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자만에 빠졌다가 사실 내가 이번 생에 가질 수 있는 건 어린 시절에 꿈꿔왔던 것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과 마주한 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혹은 어떻게든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 치고 몸부림쳐 본 사람이어야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아직도 나는 이 소설에 그려진 노인의 감정선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인생을 덜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나를 그 선 위의 한 지점에 올려본다면, 이젠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쪽으로 좀 옮겨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딱히 내가 원하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곳으로 조금씩 옮겨간 것 같다. 그래서 헤밍웨이가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슬프다.


기쁜 점은, 내가 대가의 소설을 이제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음… 그 정도인 것 같다.


슬픈 점은, 난 사실 딱히 그런 감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런 감정을 전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감정을 나보다 먼저 이해한 뒤 나에게 그 감정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을 멀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알 것 같다. 말하고 싶었겠지. 아마 어지간히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그들은 동지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와 같은 예감을 하고, 자기와 같은 슬픔을 느낀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꾸 말을 꺼냈겠지. 이 슬픔을 너도 느껴보았냐고. 어쩌면 부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우리 아닐 수도 있잖아. 우리는 온전히 노력의 결과를 누릴 수도 있잖아. 그런 얘기를 건네면서 내 동의를 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난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사람을 멀리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알겠다. 그래서 슬프다. 무한히 커져가기만 했던 내 꿈의 크기를 이제 줄여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예전엔 마치 바다를 보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난 무한히 멀리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한 고기를 잡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끝이 없는 바다 같던 내 꿈의 한계가 이제 저 멀리에 보이는 것 같다. 저 멀리 나타나 버린 것 같다. 내가 이 인생의 바다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제 보이는 것 같다. 그게 신기루였으면 좋겠는데, 내 온몸의 감각이 그게 신기루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저 멀리 나타난 내 인생의 경계선을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곳에서 잡을 수 있는 거라곤, 늘 식탁에서 만났던 고등어나 아니면 기껏해야 갈치 정도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슬프다. 그런데 더 절망적인 건, 난 그마저도 잘 잡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가까운 바다에 낚시 연습하러 갔는데 빌어먹을 난 그마저도 잘 낚지 못하는 것 같다. 난 도무지 낚시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슬프다. 때때로 청승맞게 울기도 한다. 그렇게 이 소설을 조금 이해하게 된 내가 한심하고 슬프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는 절대 절망적이고 슬픈 소설이 아니다. 소설 속의 노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죽을 고생을 해서 멋진 고기를 잡은 것도 잠시, 항구로 가져오는 길에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든 상어 떼와 승산 없는 사투를 벌이면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바랐고, 그래서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며 노력한 끝에 간신히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온전히 손에 넣은 줄 알았던 결과물을 약탈자들에게 한 덩이씩 빼앗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이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저항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인생을 건 싸움에서 결국 내가 질 것이라는 걸 체감하면서도 끝까지 덤벼들었다.


이제 내가 나아가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결국엔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 절망감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 난 이렇게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지점까지 나아가야 노인과 바다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난 아직 이 지점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난 아직도 이 소설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까지 나아가야 다시 인생의 한 걸음을 내딛을 힘이 생길 것이다. 그저 슬픔에 푹 빠져버린 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면, 난 이번 생에서 내가 응당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은 물론 내가 기필코 이뤄야 했던 것들도 허무하게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난 더 성장해야 한다. 인생에 수도 없이 찾아오는 무의미한 싸움 속에서 진짜 날 걸어보아야 할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하고, 그 싸움 끝에 간신히 맛본 행복을 사정없이 찢어버리고 찾아오는 위기를 담대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결국 그 위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지레 먼저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는 용기를 배워야 한다.


난 그 지점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뒤 운이 좋다면, 난 이 소설의 마지막 같은 풍경을 맞이할 수 있겠지.


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런 풍경을 맞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노인과 바다의 끝에 그려지는 항구의 풍경은 나에겐 환상 같은 풍경이다. 항구의 사람들은 뼈만 남은 고기를 끌고 온 노인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비록 뼈만 남은 결과일지라도 노인의 용기와 투지를 인정하며 경의를 표시해 주었다. 특히 그 소년은 아직 소년이라고 불릴 만큼 어린 나이에도 노인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배려해주고 아껴주었다. 그 소년이라면 노인과 바다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겠지. 나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소년이었다.


나에게 이 소설에서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다고 느껴진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그 항구의 풍경이다. 특히나 요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겐 정말이지 생경한 풍경이다. 아이들 입에서 휴먼 거지라는 말이 나오는 경이로운 사회를 이룩한 병신 같은 사람들이 가시만 남은 물고기를 배에 매달고 온 노인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을 것인가.


쓰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남 말할 처진가. 난 과연 그런 사람인가. 난 노인과 같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었는가. 노인과 바다의 소년처럼 진심으로 그들을 안아주고 인정해주었는가.


결국 노인의 입장이든 소년의 입장이든. 먼저 바꿔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노인과 같이 인생을 살면서 소년과 같이 다른 사람을 돌보며 항구와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멀었다. 내가 죽기 전에 노인과 소년에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려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