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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Jan 05. 2022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독서록

법복을 벗은 판사의 인간적인 이야기

 우연히 알쓸범잡이라는 방송을 보고 정재민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방송은 1회밖에 못 봤지만 판사 출신 작가 겸 방송인이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기억에 남았는데 어느 날 사내 행사에 강연자로 등장하셨다. 평소에 법조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서 사전 질문을 올렸는데 운 좋게 그 질문이 뽑혀서 이 책을 받았다.

 사실 행사는 몇 달 전이었고 행사가 끝난 후 운영 팀에서 책을 사무실 빌딩 11층 안내 데스크에 맡겨둔 지도 꽤 됐는데 재택근무가 시작된 후 사무실에 갈 일이 없어서 책을 받으러 가지 못하고 있었다. 편도로 근 두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애들 등하원까지 조절해야 해서 포기하고 있다가 업무 장비를 교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야 했을 때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그냥 책만 주는 줄 알았는데 친절하게 이름을 넣은 사인까지 해주셔서 받는 기쁨이 배가 됐다.

 내가 올린 질문은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중 정재민 님의 선택은?’이었다. 강연 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에 내 질문이 채택됐고 대답은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저는 성익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익에 따라 움직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틀을 깨는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인간 본성의 민낯을 많이 접했던 사람이자 그 본성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파악한 뒤 판결을 내리던 사람의 대답이라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작가가 10여 년의 짧지 않은 판사 생활을 거치며 가슴에 남았던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낸 책이다. 판사들이 어떤 프로세스로,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일하는지 마치 견학시켜주는 듯한 얘기도 있고, 기억에 남았던 사건이나 사람들을 돌아보는 얘기도 있으며,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실태를 짚어보며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부분도 있다.


 흥미롭게 읽었거나 공감했던 내용 위주로 독서록을 남겨 본다.


직업으로서의 판사

 보통 법정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이미지로만 연상되는 판사들의 일상적인 업무 얘기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왠지 늘 정확한 언어만 구사할 것 같은 판사들도 은어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장날(재판하는 날을 가리키는 판사들 사이의 은어)’이면 보통 25건 정도 재판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재판하면 50건이다. 이틀을 종일 재판에 쓰고 나면, 근무일 중 남은 날은 사흘이 된다. 사흘 동안 재판 50건을 준비해야 한다. 한건당 기록이 보통 수백 페이지이고,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것도 흔하다. 기록이 사만 페이지에 달하는 사건을 판결한 적도 있다. 사건이 오래된 것일수록 쟁점이 많고, 쟁점이 많을수록 기록이 두껍다. 이런 사건을 판사들은 ‘깡치’라고 한다.

 

 또한 판사들도 나름의 실적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법원에는 정밀한 사건통계관리시스템이 있다. 판사들이 만든 시스템답게 치밀하고 꼼꼼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번만 클릭하면 어떤 판사가 일을 얼마나 열심히, 정확히 하고 있는지를 다각도로 볼 수 있다. 날짜의 흐름에 따라 접수된 사건 중 처리한 사건이 몇 퍼센트인지(사건처리율), 그중에서 항소된 사건이 몇 퍼센트인지(항소율), 항소된 사건 중에 몇 퍼센트가 파기되는지(파기율), 쉬운 사건(가령 당사자들이 자백하는 사건)과 어려운 사건의 처리율이 어떻게 다른지, 쉬운 사건은 얼마나 빨리 처리하고 어려운 사건은 얼마나 느리게 처리하는지, 첫 기일에 종료되는 사건과 둘째 기일에 종료되는 사건과 셋째 기일에 종료되는 사건의 비율은 각각 어떠한지 등등.


 이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법원에 시스템을 납품하는 SI 프로젝트가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들었던 게 저런 것이었을까 문득 궁금했다. SI 프로젝트는 보통 고객사 건물이나 그 근처에 임시로 사무실을 얻어서 고객과 밀착한 상태로 진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내에 고객에 대한 평판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도는데 그때 판사 고객 님들은 평판이 어떠했을까도 궁금해졌다.


소통

 작가가 소통을 생각하는 방식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잘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보통이라 생각한다. 서로 살아온 환경과 그로 인해 구축된 성격이 제각각 다른데 소통이 되는 것이 정상인가. 공감, 이해와 같은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며 우리 서로 소통하자고, 소통을 해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덤벼드는 사람과는 소통이 된 적도 없고, 사실 소통하고 싶지도 않다.


 나 역시 강박적으로 소통하려고 하는 조직과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나는 그저 만남 자체가 삶의 살아 있는 순간이고, 사는 듯 사는 삶의 중요한 순간이라 여기는 것뿐이다. 내가 만남을 중시한다고 해서 다른 판사들에 비해서 피고인과 소통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남들과 소통을 잘할 자신이 없다. 사실 그리 잘하고 싶지도 않다. 역량이 남으면 그저 내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나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우니까.
 나는 소통이나 이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타인에게 지옥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한때 법원이 정책적으로 가장 강조해온 것이 ‘국민과의 소통’이었다.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법원이 경쟁적으로 ‘소통 행사’를 벌인 적도 있다. 소통은 개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집단적으로 소통 행사를 자주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저런 갈등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난이도 높은 소통보다 불통인 사람들과 공존하는 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공존을 위한 기본은 섣불리 소통하려 나서는 것보다 오히려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함부로 남의 감정은 넘겨짚지 않고 상대의 말부터 듣는 것이다. 내가 감히 당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하지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꺼이 들어주겠다. 듣되 선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타인에게 전하지 않고, 당신의 불행을 내 행복의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저 내 가슴속 서랍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가 당신이 민망할 때쯤 깨끗이 잊어주겠노라는 마음으로.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만 소통하면 될 것 같은데 지나치게 소통을 강조하며 거기에만 매달리는 트렌드에 많이 지쳐가고 있던 차에 내가 뭉뚱그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감정과 생각을 잘 정리된 글로 만날 수 있어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편안한 문체로 적힌 아슬아슬한 내용들

 판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부분에서는 조금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용도 나온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형량이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판사가 아닌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같은 죄에 대해서 판사마다 형량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같은 판사가 같은 죄에 대해서 나이와 경력에 따라 선고하는 형량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가령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피고인에게 선고하는 형량이 약해진다.
 경력이 짧던 판사 시절에는 선배 판사들이 선고하는 형량이 약한 것이 불만이었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더 엄하게 처벌하지 않으니 법질서가 제대로 서지 않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마음도 있었다. 피고인들의 범죄를 보면 분노가 일었고 그 분노를 정의감이라 착각했다. 판결을 통해서 그런 분노를 화염방사기처럼 방사하는 것이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라 착각했다. 그 분노가 내 무의식에 잠복하고 있는 트라우마나 피해의식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혹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반듯하게 제 자리를 잡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범생 특유의 완벽주의적 강박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심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형량이 약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고결함과 위대함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고결하다거나 선하다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간혹 그런 인간이 출현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여건이 맞아서 그런 업적이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은 그저 그렇다. 나쁘다기보다는 유약하다.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젊음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다. 몸도 정신도 약하다. 그래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  
 이렇게나 흉폭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만성난치병에 걸린 환자처럼 그 본성을 달래가면서, 본성의 끔찍한 면이 크게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살아가는 정도가 인간으로서는 꽤 훌륭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찬찬히 읽어보면 작가가 하려는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는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사법 체계를 애써 구축해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같은 죄에 대해서는 같은 처벌을 내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작가 역시 책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아무리 정확하게 천명을 처벌하더라도 한 명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이전의 천명이 억울해진다. 이것은 불의다. 정의의 본질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의 나이나 경력에 따라서 같은 죄에 내리는 형량이 달라질 수 있다면 누가 우리의 사법 체계가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판사 개인적으로 인간이 고결하고 위대하다는 기대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에 형량이 줄어들 수 있다면, 판사가 알고 지내던 변호사가 사석에서 사람 다 그런 것 아니겠냐고, 인간이 고결하고 위대하다는 기대를 버리라고 조언했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이유로 형량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 것 같다.

 물론 실제로 완전히 같은 상황에서의 같은 죄라는 것은 있기 어려울 것이고, 시대가 변하면서 같은 죄라도 처벌이 달라질 수 있겠으며, 모든 죄를 단순히 결과만 보고 일반화시켜 기계적으로 처벌하는 것을 원하는 것 또한 아니지만 그럼에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또한 작가는 비인간적인 범죄와 관련된 보도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형이 너무 가볍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의견을 밝히고 있다.


 언론에 오르내린 사건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면, 형이 너무 가볍다는 의견이 많다.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괴리되었다고 지적받기도 한다. 물론 그런 지적이 옳을 때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피고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대개 언론의 짧은 기사일 뿐이다. 다 읽는 데 채 일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 기사는 피고인 인생의 최악의 단면만을 보여준다. … 게다가 피고인이 선처받을 때는 십중팔구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경우다.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거나 선처를 원하는데, 제삼자가 강력한 처벌을 원하면서 관여하는 것이 피해자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국 경제학자 아이작 에를리히도 통계적 분석을 통해서 범인검거율이 높으면 범죄발생률이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반면, 처벌을 강하게 한다고 해서 범죄발생률이 낮아진다는 근거는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사형이 무기형보다 범죄를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는가에 관한 연구 결과도 부정적으로 나온 경우가 많다. 언론에 범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우리나라의 형이 미국보다 낮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미국은 오히려 강력범죄가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
 이런 사람들을 그저 기계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 처벌하기보다 이런 사람들이 적법한 방식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는 일(물론 이쪽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에 더 힘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에게 상습적인 도벽이 있다는 이유로 법률에 따라 엄한 형을 선고해야만 한다. 이럴 때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가 나는 기분이다.


 나 역시 그동안 처벌 강도와 범죄발생률이 실제로 관련이 있는 것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위 문단을 읽고도 의문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만약 위 문단에 인용된 미국 경제학자 아이작 에를리히의 연구 결과처럼 처벌 강도와 범죄발생률이 별로 관련이 없다면 현재의 사법 제도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검거율이 중요하지 처벌 강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면 범죄의 경중을 신중하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데 투입하고 있는 수많은 공적 인력을 범인을 검거하는 데 투입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금처럼 처벌 강도가 아니라 검거하는 데 투입하는 인력으로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게 될 것이고, 무거운 범죄일수록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 검거율을 올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범죄발생률을 낮출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조금 단순하게 생각해서, 만약 살인에 대한 처벌이 지금처럼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아니라 징역 1년이라면, 아니 극단적으로 벌금이나 사회봉사명령에 그친다면, 그래도 살인 범죄발생률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까? 강간에 대한 처벌을 벌금이나 사회봉사명령으로 낮춰도 과연 발생률에서 차이가 없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한편, 도덕주의적인 사회를 지양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도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정의가 어느 깊은 동굴에 숨겨진 빛나는 보석처럼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그 무엇이라고 여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실 오늘날 정의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파편적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이 핵심이다. 그러나 정의의 문제에서는 대화와 타협이 어려워진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반하는 것은 불의가 되고, 불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과격하고 선명한 입장을 가진 쪽이 보다 정의로워 보인다. 중도적 입장이나 사안별로 타협책을 찾는 입장은 정의롭지 못한 기회주의처럼 인식된다. 역사가 발전하며 정의의 중심이 칼에서 저울로 이동한 것처럼, 우리 사회도 정의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의가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무엇이 아니라 시대에 발맞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적어도 법의 형태로 확립된 정의에 대해서는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말하는 상대적 개념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정의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들까지 싸잡아 정의라고 부르는 게 문제인 것이지 정의 자체를 타협의 영역으로 끌고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래와 같은 문단을 보면 나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작가가 표현하는 방식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이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이런 차원에서다. 재판에서 약자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법에서 특정 약자들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약자의 입장에 처할 수 있는데, 그때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마구 짓누르지 못하도록 법이라는 장치를 설정해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조차 도로교통법을 무시하고 임이 센 운전자가 힘이 약한 보행자를 위협하면서 지나다니는 나라에서, 갑질이 없고, 소수자가 보호되고, 법이 지켜지는 문화가 과연 정착될 수 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


사는 듯 사는 삶

 작가는 책 전반에 걸쳐서 ‘사는 듯 사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중에서 편안함과 자기 신뢰에 대한 얘기는 나에게도 깊이 와닿았다.


 편안함의 가치를 청년 시절에는 잘 몰랐다. 편안해지는 것이 별 대수롭지 않은,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심지어 편안한 사람이 지루하고 유약한 사람인 줄 알았다. 피가 뜨겁던 시절이다 보니 치열하고, 특별하고, 강한 매력과 개성을 가진 사람에게 끌렸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가를 절감한다.
 여기서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은 강박증도, 일중독도, 열등감도, 인정중독도, 결벽증도, 불안으로 인한 조급증도, 피해의식도, 날카로운 공격성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편안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편안하고 싶어진 후에야 알았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늘 마음에 폭풍이 몰아친다. 불안해서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라는 구절은 그날 이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안전하다는 길만 좇아온 것이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혼자 힘으로 가보는 데까지 가보는 시기가 있어야만 제 자신에게 덜 미안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 이름보다 무거운 판사 직함을 서둘러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 년 뒤 부장판사가 되고 나면 몸이 더 무거워져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결기도, 기회도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 그 과정에서 저의 단점과 한계를 발견할 때마다 오히려 제 자신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고, 삶의 여정이 당초 계획한 궤도에서 멀어질수록 ‘에라 모르겠다’식의 홀가분한 체념과 무모한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혼자 힘으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지만 아직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래 문단이 와닿았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왜곡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모순된 것이 공존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해서조차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나도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못 잡을 때가 허다하다. 사람은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을 계속 반복하기도 한다. 사람은 때때로 모순적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살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편안하게 스스로를 믿으며 살아가려면 어쩌면 나라는 사람이 때때로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인생이 부드럽게 잘 굴러가도록 만들려고 애쓸 게 아니라 인생이란 게 원래 종종 우당탕탕 제 멋대로 굴러가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 연말연시를 따분하지 않게 보냈다. 문득 작가가 책 속에서 언급한 <냉정과 열정 사이>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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