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
하버드 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있는 두 정치학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자블렛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바라보며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치고 있으며 왜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밝혀 놓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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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쓴 시점(2018)은 트럼프가 물러나고 바이든이 당선되기 전(2020)이다. 책 말미에 트럼프 정권이 어떤 방식으로 끝나는 것이 좋을지, 또한 그에 따라 미국 사회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에 대해 예측해 놓은 부분이 있다. 책을 늦게 읽은 덕분에(?) 두 저자의 예측과 결과를 동시에 살펴볼 수 있어서 뜻밖의 재미를 얻었다.
책에서는 먼저 민주주의 국가였다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독재 국가로 바뀐 사례들을 언급한다. 생각보다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군사 쿠데타와 같은 방법으로 한 순간에 독재 국가로 바뀐 사례도 있지만 합법적인 방법을 조금씩 쌓아나가면서 조용하게 독재 국가로 바뀐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혹은 군부 통치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쿠데타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권력 장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로 죽어간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물론 조지아, 헝가리,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스리랑카, 터키 우크라이나에서도 선거로 추대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국가는 분명 민주적인 절차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했다. 하지만 그렇게 선출된 지도자가 사법부와 정보기관, 국세청 같은 심판을 매수하고, 이를 이용해 야당과 언론을 매수하거나 탄압하며, 선거구를 변경하거나 선거 방식을 변경하는 등 게임의 규칙을 변경해 운동장을 기울이는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조금씩 무너뜨려서 마침내 독재자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이 과정은 형식적으로는 전부 합법이어서 국민들은 자신의 국가가 독재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많은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전복 시도는 의회나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다. 심지어 사법부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혹은 선거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개선’하려고까지 한다. 신문은 똑같이 발행되지만, 정권의 회유나 협박은 자체 검열을 강요한다. 시민들은 정부를 비판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세무조사를 받거나 소송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혼란을 불러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한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 이러한 경우 쿠데타나 계엄령 선포, 혹은 헌정 질서의 중단처럼 독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순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비상벨은 울리지 않는다.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사람들 대부분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책에서 설명한 여러 국가에서 사용한 방법 중 몇 가지는 우리나라 신문 기사에서도 본 적이 있어서 아주 흥미로웠다.
저자는 국민의 뜻과 능력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예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들었다.
벨기에, 영국, 코스타리카, 핀란드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 역시 대중 선동가의 위협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그 인물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잘 막아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던 것일까? 사람들은 그 이유를 국민의 집단 지성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벨기에와 코스타리카 국민이 독일이나 이탈리아 국민보다 더 민주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국가의 운명이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즉, 국민이 민주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것이다. 반면 전제주의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민주주의는 곧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틀렸다. 이러한 입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며 그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192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유권자 대다수가 전제주의를 지지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기 전에 이들 정당의 당원은 전체 인구의 2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서 과반을 득표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권자 대다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세력에 반대했다. 적어도 두 아웃사이더가 정치 야망에 눈이 먼 기성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의 뜻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 기성 정치인들이 선동가의 길을 닦아준 덕분에 나치와 파시스트의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기성 정치인들이 힘을 보태주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와 같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단주의자나 선동가는 늘 등장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정당 중심의 현재 정치 제도에서는 그런 위험 인물을 걸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정당이 맡아야 한다고 한다.
잠재적 대중 선동가는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며, 때로 그들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 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물론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인 셈이다.
책에 나온 선동가들의 사례 중에는 ‘국민의 뜻’이라는 말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해 헌법을 무시하려고 한 사례가 나온다.
그로부터 10년 후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를 앞세워 인기몰이를 했다. 놀랍게도 1968년과 1972년 대선에서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들리에 따르면 월리스는 “미국 사회의 오래 묵은 분노”를 천재적으로 이용했다. 월리스는 종종 폭력을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고,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헌법 질서를 경멸했다.
헌법보다 더 강한 것이 하나 있다. (...) 그것은 바로 국민의 뜻이다. 대체 헌법이란 무엇인가? 그건 국민이 만든 것이다. 국민은 권력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 그들의 뜻에 따라 헌법을 없애버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마치 자기가 국민 전부를 대변하는 양 ‘국민의 뜻’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특히 요즘처럼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자꾸 소통하게 되는 사회에서는 이런 말에 넘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저자는 민주주의 정신을 성문화한 헌법도 민주주의를 지키기엔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그 예로 헌법을 치밀하게 설계했지만 결국 나치에게 무너졌던 독일과, 미국의 헌법을 거의 그대로 차용했지만 독재의 길로 접어든 여러 남미 국가를 얘기한다.
그런데 헌법이라고 하는 보호 장치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지키기에 충분한 것일까? 우리 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이라고 해도 때로는 실패한다. 가령 독일의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국가 최고 법률가들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의 유서 깊고 존중받는 ‘법치국가Rechtsstaat’라는 개념만으로도 지도자의 권력 남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과 공화국은 1933년 히틀러의 권력 강탈에 무너지고 말았다. … 남미 국가들 역시 미국을 모델로 삼아 카피했지만 실패했다.
저자는 살면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법에 기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은 다소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법의 각 조항을 기계적으로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우선 모든 헌법은 불완전하다. 여러 다양한 규칙과 마찬가지로 헌법 안에는 수많은 공백과 애매모호함이 존재한다. 구체적인 방법을 기술한 운영 지침도 우연히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설명해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헌법 조항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할 경우, 법의 취지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가령 최근 가장 혁신적인 형태의 파업은 ‘준법투쟁’이다. 여기서 근로자는 계약서나 업무지시에 규정된 대로만 움직인다. 즉, 성문화된 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이럴 경우 생산 현장은 실질적으로 가동을 멈추게 된다.
핵심은 국민의 뜻과 글로 써놓은 법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를 살펴볼 때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면 성문화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지켜왔던 규범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련해서 저자는 두 가지 규범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상호 관용이고 두 번째는 제도적 자제다.
먼저 상호 관용이란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 역시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 물론 경쟁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 주장을 혐오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정당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경쟁자가 올바르고, 국가를 사랑하고, 법을 존중하는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걱정하고 헌법을 존중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상호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한다.
상호 관용의 규범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이한다. 한 진영이 경쟁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볼 때 선거에서 그들에게 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전제적인 방안까지 고려할 것이다. 범죄자나 불온한 인물이라고 꼬리표가 붙은 정치인들을 모두 투옥하려 들 것이다. 혹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권을 전복하려 들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이런 상호 관용이 메말라 버린 것 같다. 비단 정치인뿐 아니라 그들의 지지자들 역시 상대방을 정당한 경쟁 상대로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한쪽에선 틈만 나면 상대방을 우리나라를 통째로 북한과 중국에 갖다 바치려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다른 쪽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친일 적폐 세력으로 몰아붙인다. 물론 그런 위험 인물이 한두 명 있을 수도 있지만 그 한두 명을 집는 게 아니라 자꾸 전체를 그렇게 매도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는 정상적인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파행으로 치달을 뿐이다.
두 번째는 제도적 자제다. 자신의 권한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두 번째 규범은 우리가 ‘제도적 자제’라 부르는 개념이다. ‘자제’란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또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자제 규범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 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왕이 권력을 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던 시대에(신권은 왕권의 토대였다) 어떤 법도 왕권을 제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유럽의 많은 군주는 권력 행사를 자제했다. 어쨌든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지혜와 절제의 덕목을 갖춰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역사극에서 리처드 3세가 왕의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는 폭군으로 등장했을 때 그 왕이 어긴 것은 법이 아니라 관습이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내용이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둘은 때로 서로를 강화한다. 정치인이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자제의 규범도 기꺼이 실천하려 든다. 또한 경쟁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정치인은 상대를 권력 경쟁에서 퇴출시키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자제 규범의 실천(가령 민주당 대통령이 제시한 연방대법원 판사 임명안을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통과시킨 것처럼)은 스스로 관용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줌으로써 선순환을 이뤄낸다.
그러나 상황은 얼마든지 반대로 흐를 수 있다. 상호 관용의 규범이 허물어질 때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정당이 서로를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할 때 정치 갈등은 심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 패배는 일상적인 정치 과정의 일부가 아니라 재앙이 된다. 패배의 대가가 심각한 절망일 때 정치인들은 자제 규범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넘어간다. 헌법적 강경 태도는 관용의 규범을 허물어뜨림으로써 경쟁자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키운다.
양당 간의 갈등이 끝을 모르고 깊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정치인들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끊임없이 음모를 제기하며 매 순간 자기가 가진 권한을 최대한 사용해 버리면 지지자들 그 기세에 휘둘려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갈라서게 된다.
이처럼 극단적 정치 분열은 민주주의 규범에 위협이 된다. 정치판이 세계관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 인종적, 종교적 갈등으로 배타적인 진영으로 분열될 때 그 사회는 관용의 규범을 유지하기 힘들다. 물론 어느 정도의 갈등은 민주주의에 무해하고, 때로는 꼭 필요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서구 유럽의 민주주의 역사는 정당들이 이념 차이로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사회규범은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치집단이 서로 간 공존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분열될 때, 특히 구성원끼리 교류가 부족하고 고립이 심해질 때 정상적인 정당 경쟁이 사라지고 적대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상호 관용이 사라지면서 정치인들은 자제의 규범까지 저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 집단이 등장한다.
각자 자신의 정당이 극단주의로 빠져드는 걸 피하면서 동시에 상대 정당 역시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집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 권한을 신중하게 행사해야 하고 제발, 제발 말도 신중하게 뱉어야 한다. 정치인들의 막말 잔치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꼭 알아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승패가 명확하게 갈리는 게임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가족 소유의 기업과 군대는 명령에 따라 수직적으로 움직이지만,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협상과 양보, 타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이다. 대통령이 발의한 법안은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거나, 사법부의 반대로 무산될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제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비판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점을 꼭 알아두어야 가슴에 화가 쌓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자꾸 모든 상황에서 완벽한 승리만을 바라면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고 실제로 얻은 것이 있음에도 자꾸 얻지 못했거나 잃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가슴에 화를 쌓게 된다.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 그렇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인 분노가 여기저기서 고름처럼 터져 나오는 것 같다. 모두가 감정 과잉 상태다. 지나치게 밝고 즐겁거나 지나치게 우울하고 슬프거나 지나치게 화가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실 나 역시 요즘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나 요즘과 같이 사회 전반의 기조가 자꾸 무한 경쟁으로 흘러갈 때는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덕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잘 안 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 뭉쳤다가 헤어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정치인도 아닌데 굳이 양당 정치의 프레임에 갇혀서 상대방을 적 대하듯 대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 영원한 적은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낙태에 관해서는 이웃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의료보험에 대해서는 같을 수 있다. 그리고 이민자에 대한 이웃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합을 통해 우리는 상호 관용 규범을 구축하고 강화할 수 있다. 정치인이 일부 사안에 경쟁자와 뜻을 같이할 때 그들은 상대를 위험한 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정이나 의리보다 중요한 가치가 많다. 정치인이 자꾸 사사로운 정이나 의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지자들도 자꾸 그들을 ‘배신’의 프레임에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큰 물에 보내줬으면 다른 물고기도 포용하며 제대로 헤엄치게 해 줘야지 기껏 큰 물에 보내 놓고 가두리 양식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논쟁이 상대의 멸망이 아니라 공존과 발전을 향했으면 좋겠다. 굉장히 나이브한 얘기 같지만 이런 얘기가 나이브하지 않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