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1. 보랏빛 설렘이 머무는 수평선
오후 3시의 바다는 잔잔한 호수 같다. 수평선 끝자락에 걸린 해가 바다 위에 잘게 부서진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눈부시다. 바람은 따스한 남서풍으로 바뀌어 유리창을 부드럽게 간질이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누군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콧노래처럼 들린다.
레스토랑 ‘3시의 요새’의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오늘따라 유독 서정적이다. 하늘은 옅은 보랏빛을 머금은 채 점점 깊어지고, 그 아래로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바다가 살아 숨 쉬는 박동처럼 느껴진다. 이런 날은 왠지 모르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지만, 우리 식당의 주방만큼은 그 예감을 비웃듯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오늘 ‘그녀’가 오기 때문이다.
2. 고기가 되고 싶은 셰프
“와타시와… 아나타노… 고기데스까(나는 당신의 고기입니까)?”
‘푸하하—!’
주방 보조 곰탱 아저씨가 입에 머금고 있던 시원한 보리차를 그대로 바닥에 뿜어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장팔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진지하다 못해 비장한 표정으로 손때 묻은 낡은 일본어 회화책을 쥐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태풍 사장의 포마드를 얼마나 훔쳐 발랐는지, 파리가 앉았다가 낙상 사고를 당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아저씨, ‘고기’가 아니라 ‘코이(사랑)’겠죠. 그리고 ‘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면 문장 자체가 완전히 틀렸어요. 대체 그 꼴로 누구한테 고백을 하겠다는 거예요? 제발 국격 좀 생각하세요.”
나의 한심하다는 눈빛에도 장팔 아저씨는 묵주 반지를 정성스럽게 닦으며 대답했다.
“오늘 유미 씨가 온다. 후쿠오카에서 온 그 천사 같은 미소….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한 점의 잘 익은 고기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 지수야, 사랑은 희생이야. 알겠냐?”
“사기꾼 친구 곁에 너무 오래 있더니 비유가 아주 저질이 됐네. 고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태풍 사장이 홀에서 촛불 성의 촛농을 다듬으며 낄낄거렸다. 사장은 오늘 유독 장팔을 놀려먹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사실 오늘 예약 명단에 ‘유미’라는 이름이 뜬 순간부터 이 식당의 공기는 핑크빛이라기보다 불길한 잿빛에 가까웠다. 장팔이 사랑에 빠지면 요리가 평소보다 3배는 더 예민해지고, 그만큼 우리들의 고생도 3배가 되기 때문이다.
“야, 장팔. 유미 씨가 한국말 잘한다며? 그냥 한국말로 해. 네 일본어는 듣는 사람 인권 침해 수준이야. 고소당하고 싶냐?”
“시끄러워! 마음은 그 나라의 언어로 전해야 진심이 닿는 법이다. 지수야, 오늘 메인은 ‘꼬꼬뱅(Coq au Vin)’이다. 레드와인에 푹 젖어든, 내 심장처럼 진하고 뜨거운 맛!”
장팔 아저씨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더니 비장하게 닭고기를 잡았다.
“꼬꼬뱅은 말이다, 지수야. 인내와 헌신이 만드는 요리야. 질긴 수탉의 살결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좋은 와인에 하룻밤을 꼬박 재워야 하지. 와인의 산도가 고기의 조직을 파고들어 마음을 열게 만드는 과정, 그게 핵심이야. 불 위에서 은근하게, 아주 오랫동안 졸여내야만 비로소 그 깊은 보랏빛 진심이 드러나거든. 내 짝사랑도 지금 이 냄비 속에서 끓고 있다.”
그는 베이컨과 양송이, 작은 양파들을 정성껏 볶았다. 와인 육수가 고기에 깊게 배어들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장팔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프라이팬을 던져 사장을 잡던 그 기세는 어디 가고, 짝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사춘기 소년의 손만 남은 듯했다.
3. “나는 맛있습니까?”
오후 7시 정각. 파도 소리를 뚫고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밝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유미 씨가 들어왔다. 그녀가 웃으며 인사하자 식당 안이 마치 조명을 켠 듯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콘니치와! 또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유창한 한국말에 장팔 아저씨는 주방 입구에서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렸다. 태풍 사장이 0.1초 만에 달려 나가 그녀의 코트를 받아 들었다.
“유미 씨!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셰프가 유미 씨를 위해 주방에서 일본어 사전을 통째로 씹어 먹고 있었습니다. 거의 일본인이 다 됐어요.”
“에? 정말요? 장팔 씨, 안녕하세요!”
유미 씨가 주방 쪽을 향해 손을 흔들자, 장팔 아저씨는 황급히 일본어 책을 뒤로 숨기며 튀어나왔다.
“아… 유미 상. 와타시와… 오이시이… 데스까(나는 맛있습니까)?”
식당 안은 순식간에 진공상태가 된 듯 정적이 휩싸였다. 곰탱 아저씨는 아예 고개를 돌려 어깨를 들썩였고, 나는 내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유미 씨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네! 장팔 씨 요리, 정말 맛있어요(오이시이 데스)! 장팔 씨도 아주 맛있어 보이네요!”
유미 씨의 재치 있는 대답에 장팔 아저씨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그녀가 웃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방으로 돌아가 미친 듯이 소스를 저었다. 와인 소스가 루(Roux)와 어우러져 벨벳처럼 매끄럽고 진하게 완성되었다.
만찬이 중반을 넘어갈 무렵, 드디어 대망의 꼬꼬뱅이 나올 시간이 되었다. 장팔 아저씨는 냄비 앞에서 거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주여, 제발 소스가 타지 않게 하소서. 제 사랑이 이 와인 빛깔보다 더 진하게 전해지게 하소서. 아멘.”
냄비 뚜껑이 열리고, 갓 조리된 꼬꼬뱅이 등장했다. 진한 보랏빛 소스에 촉촉하게 젖은 닭다리와 향긋한 타임의 향기. 그것은 장팔 아저씨의 지독하고 무거운 짝사랑이 형상화된 듯했다. 아저씨는 그 위에 신선한 파슬리를 뿌리고 유미 씨의 테이블로 직접 나갔다.
“유미 씨, 이건 꼬꼬뱅입니다. 식기 전에, 제 마음이 식기 전에 드세요.”
유미 씨가 나이프로 부드러운 고기 결을 살짝 갈랐다. 와인 향이 듬뿍 밴 고기 사이로 뜨거운 김과 함께 진한 풍미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한 입 먹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와… 정말 깊은 맛이 나요. 따뜻하고, 묵직하고… 오랫동안 정성을 들였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는 맛이에요.”
4. 24시간 꺼지지 않는 꼬꼬뱅
장팔 아저씨는 그 말 한마디에 완전히 넋이 나갔다. 그는 유미 씨 옆에 멍하니 서서 그녀가 먹는 모습만 바라봤다. 태풍 사장이 슬쩍 다가가 장팔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셰프. 뭐라도 멋있는 말 좀 해봐. 아까 연습한 거 있잖아.”
장팔 아저씨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유미 씨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유미 씨! 와타시노… 코코로와… 꼬꼬뱅데스(내 마음은 꼬꼬뱅입니다)!”
유미 씨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꼬꼬뱅은 와인에 푹 젖어 있잖아요. 장팔 씨 마음도 그렇게 사랑에 취해 있는 건가요?”
“아, 아뇨! 절대 아닙니다! 제 꼬꼬뱅은… 24시간 동안 졸여도 짜지 않게 과학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제 심장은 무쇠 솥이라 안 식어요!”
식당 안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유미 씨는 웃으며 장팔 아저씨의 거친 손을 살짝 잡았다.
“장팔 씨, 일본어 공부 안 하셔도 돼요. 요리가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걸요. 그냥 한국말로 하세요. 제가 다 알아들을게요.”
밤 11시. 유미 씨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떠난 뒤, 식당에는 다시 세 남자와 나만 남았다. 장팔 아저씨는 유미 씨가 먹다 남긴 꼬꼬뱅 접시를 마치 성배라도 되는 양 보물처럼 닦고 있었다.
“야, 장팔. 너 아까 진짜 병신 같았어. ‘나는 맛있습니까’가 뭐냐? 내가 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더라.”
태풍 사장이 남은 와인을 들이키며 놀려댔다.
“닥쳐. 그녀가 웃었으면 된 거야. 지수야, 봤지? 이게 바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단백질’의 힘이다. 너도 공부만 하지 말고 사랑을 해라.”
장팔 아저씨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평소엔 그 냄새가 지독했는데, 오늘따라 연기가 촛불 성 주변에서 몽환적으로 흩어졌다. 곰탱 아저씨는 구석에서 남은 꼬꼬뱅 소스에 빵을 찍어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지수야, 너도 누군가를 위해 꼬꼬뱅처럼 뭉근하게 졸여본 적 있니?”
태풍 사장의 질문에 나는 창밖의 어두운 밤바다를 봤다.
“글쎄요. 저는 그냥 통장에 돈 입금될 때가 제일 뭉근하게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근데 오늘 장팔 아저씨 보니까, 저렇게 바보같이 구는 게 진짜 사람 사는 냄새 같긴 하네요.”
촛불 성의 불이 꺼지고, 3시의 요새는 다시 고요에 잠겼다. 장팔 아저씨는 내일 유미 씨에게 보낼 카톡 메시지를 작성하느라 번역기를 돌리고 있었다. ‘내일 파도가 높습니다’를 번역했는데 ‘내일 내 키가 큽니다’라는 결과가 나온 줄도 모르고 말이다.
바다 너머 일본 쪽 하늘에서 별빛이 유독 반짝였다. 사랑은 엉터리 언어 속에서도, 냄비 속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그리고 지랄 맞은 부엌의 프라이팬 소리 속에서도 소리 없이 뭉근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오늘의 요리]
메뉴: 와인에 빠진 붉은 진심, '꼬꼬뱅(Coq au Vin)'
1. 기다림이 빚어낸 부드러움
장팔 아저씨가 어제부터 닭고기를 와인에 재워두며 유난을 떨던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았다. 꼬꼬뱅은 본래 질긴 수탉을 맛있게 먹기 위해 고안된 요리다. 산도가 높은 와인이 고기의 섬유질을 끊어내는 시간, 그 '기다림'이 없으면 절대 이 맛이 안 난다. 아저씨의 짝사랑도 저 닭고기처럼 와인 향에 푹 절여져서 부드러워진 게 아닐까 싶다.
2. 보랏빛 마법, 와인 소스의 농축
졸이고 졸여서 만든 그 진한 보랏빛 소스는 예술이었다. 닭고기에서 나온 육즙과 와인의 타닌, 그리고 각종 채소의 단맛이 냄비 안에서 뒤섞여 하나가 되는 과정. 장팔 아저씨는 이걸 '영혼의 결합'이라고 불렀다. 곰탱 아저씨가 볶아낸 베이컨의 짭조름한 풍미가 신의 한 수였다.
3. 사랑은 '뭉근한' 불 위에서
"구름을 먹는 것" 같은 수플레보다, 오늘 이 꼬꼬뱅이 더 장팔 아저씨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플레처럼 화려하게 부풀어 올랐다 금방 꺼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고 진해지는 맛. "내 심장은 무쇠 솥이라 안 식는다"는 아저씨의 그 촌스러운 말이 왠지 오늘은 사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늘, 장팔 아저씨의 꼬꼬뱅 사랑이 유미 씨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오늘의 요리]
와인에 빠진 수탉, 꼬꼬뱅(Coq au Vin)
꼬꼬뱅은 프랑스어로 '와인(Vin) 속의 수탉(Coq)'이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가정식 요리이자, 장팔 아저씨 같은 정통 셰프들이 자신의 인내심을 증명할 때 즐겨 만드는 '슬로 푸드'의 대명사죠.
1. 왜 하필 '수탉'일까?
옛날 프랑스 농가에서 알을 낳지 못하거나 너무 늙어 살이 질겨진 수탉을 버리지 않고 맛있게 먹기 위해 고안된 요리입니다. 질긴 고기를 연하게 만들기 위해 산도가 있는 와인에 오랫동안 재워두고, 낮은 온도에서 뭉근하게 졸이는 방식을 택한 것이죠.
장팔 아저씨의 사랑이 '질긴 수탉' 같다면, 유미 씨를 향한 정성은 그 살을 녹여내는 '와인'인 셈입니다.
2. 맛의 핵심 요소
레드 와인: 주로 버건디(피노 누아) 스타일의 와인을 사용합니다. 와인이 졸아들면서 고기에 보랏빛 광택과 함께 깊은 산미와 풍미를 입힙니다.
부재료의 조화: 짭조름한 베이컨(팡세타), 향긋한 양송이버섯, 달큰한 미니 양파(펄 어니언)가 소스에 녹아들어 복합적인 맛을 냅니다.
부케 가르니(Bouquet Garni): 타임, 월계수 잎, 파슬리 등을 묶어 넣어 고기 잡내를 잡고 이국적인 향을 더합니다.
3. 요리 포인트: '기다림'
꼬꼬뱅은 불의 세기보다 '시간'이 요리합니다.
마리네이드: 최소 하룻밤은 와인에 담가두어야 고기 속까지 와인의 향이 배어듭니다.
브레이징(Braising): 볶은 고기와 와인을 함께 넣고 약불에서 천천히 익히는 이 과정에서 단단했던 단백질이 젤라틴화되어 입안에서 녹는 식감이 완성됩니다.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팁
꼬꼬뱅은 갓 만들었을 때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다시 데워 먹을 때가 가장 맛있다고들 합니다. 소스가 고기 결 사이사이에 완전히 정착하기 때문이죠.
마치 유미 씨를 향한 장팔 아저씨의 마음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