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1. 요새를 뒤흔든 지팡이의 습격
오후 3시 20분. 바다는 평온했고, 유리창 너머의 햇살은 게으르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3시의 요새’의 평화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살 났다. 평소보다 20분 늦게 일어난 태풍 사장이 채 왁스를 바르기도 전이었고, 장폴 아저씨가 식후 첫 담배를 반도 태우지 못했을 때였다.
‘쾅—!’
식당의 육중한 나무 문이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열렸다. 아니, 걷어차였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 먼지바람을 뚫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우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평소 쓰시던 지팡이를 마치 삼국지의 장비가 휘두르는 장팔사모처럼 허공에 휘두르며 주방 입구까지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 건달 놈들! 당장 내 손녀딸 내놓지 못해!”
할아버지의 사자후에 베르나르는 소스라치게 놀라 캣타워 꼭대기로 도망갔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놓칠 뻔했다.
“할아버지!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리고 건달이라니요, 여긴 어엿한 프랑스 레스토랑이라고요!”
내가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막아섰지만, 할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장팔 아저씨의 하얀 조리복과 번들거리는 머리를 가리켰다.
“프랑스? 이름부터가 장팔이가 뭐냐, 장팔이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대낮까지 잠이나 퍼자고, 밤마다 불 켜놓고 수상한 짓거리나 하는 놈들이! 내 귀한 손녀가 여기서 설거지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야! 당장 짐 싸!”
장폴 아저씨는 입에 문 담배가 툭 떨어질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곧 묵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프라이팬이 공중곡예를 했겠지만, 상대는 알바생의 조부이자 이 마을에서 호랑이로 통하는 최고령 어르신이었다. 장폴은 조용히 담배를 비벼 끄고는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어르신, 오해십니다. 저희는 수상한 놈들이 아니라, 신의 섭리를 요리하는 예술가들입니다. 건달은 저 옆에 있는 사장 놈 하나면 충분합니다.”
“예술?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이놈들이 말만 번지르르해가지고!”
2. K-할아버지 맞춤형 에스카르고
그때, 부스스한 머리로 뒤늦게 홀에 나타난 태풍 사장이 본능적으로 ‘위기관리 모드’에 돌입했다.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사기꾼 미소를 장착하고는 할아버지의 거친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아이고, 어르신! 지수가 매일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그 정정하신 할아버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왕 오신 거, 저희가 오늘 저녁 손님들께 낼 특별한 별미를 먼저 맛보고 가시죠. 지수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에서 일하는지 직접 보셔야 저희도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완강했다. 하지만 태풍 사장의 화려한 언변과 교묘한 이끌림에 결국 촛불 성 앞 상석에 앉으셨다. 장폴 아저씨는 내게 눈짓을 보내더니 비장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지수야, 할아버지 식성이 어떻게 되시지? 맵고 짠 거 좋아하시냐?”
“할아버지는 평생 된장국이랑 생선구이만 드셨어요. 서양 음식은 느끼해서 돈 줘도 안 드신다고 질색하시는데… 아저씨, 어쩌시려고요?”
장폴 아저씨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검은 보석 같은 상자를 꺼냈다.
“오늘은 ‘에스카르고(Escargot)’다. 하지만 프랑스식이 아니라 ‘K-할아버지’ 맞춤형으로 변주를 주지. 이건 식재료의 ‘현지화와 지방(Fat)의 마술’이야.”
식폴 아저씨는 원래 쓰려던 식용 달팽이 대신, 새벽에 해녀들이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참소라를 꺼냈다. 그리고는 버터에 다진 마늘을 산더미처럼 넣고, 여기에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들기름’을 한 방울 섞었다.
“지수야, 잘 봐라. 서양의 버터와 동양의 들기름은 분자 구조상 발연점이 다르지만,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섞으면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에멀전’ 소스가 되지. 마늘의 알리신 성분은 버터의 느끼함을 단칼에 잡고 소라의 단백질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단다. 이건 요리가 아니라, 동서양의 화합이자 9시 뉴스에 나올 만한 평화 협정이야.”
장폴 아저씨는 소라 껍데기 안에 마늘 들기름 버터를 가득 채우고 오븐에 구워냈다. 잠시 후, 고소하다 못해 치명적인 냄새가 식당 안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무슨 냄새가 이렇게 구수하냐”며 슬그머니 지팡이를 내려놓고 헛기침을 하셨다.
3. 건달들의 기막힌 밥상
장폴 아저씨가 직접 요리를 서빙했다.
“어르신, 이건 이 바다의 정기를 담은 ‘참소라 버터 구이’입니다. 한 입 드셔보시고 그래도 저희가 건달 같으면, 제가 저 사장 놈 멱살을 잡아서라도 지수 월급에 퇴직금까지 두둑이 얹어서 곱게 보내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라 알맹이를 쏙 빼서 입에 넣으셨다. 쫄깃한 소라 살이 씹히고 마늘과 들기름의 풍미가 입안을 감돌자 할아버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허… 이거 참. 희한하게 맛이 좋네? 된장 바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구수해? 너희들 여기다 뭐 탔냐?”
“들기름을 조금 넣었습니다. 어르신이 평생 드셔 온 그 고향의 맛을 버터라는 놈이 부드럽게 안아주도록 설계했거든요.”
태풍 사장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차갑게 칠링 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이건 서양의 ‘약주’라고 생각하고 드십시오. 소라의 풍미를 씻어내고 입안을 개운하게 해 줄 겁니다. 할아버님처럼 정정하신 분들께 딱입니다.”
할아버지는 와인을 원샷하더니 “캬아, 술맛도 달다! 이거 앉은뱅이 술이구먼!”
이라며 좋아하셨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소라 한 판을 게 눈 감추듯 비우고, 곰탱 아저씨가 내온 한우 안심 스테이크까지 ‘미디엄 레어’로 완벽하게 해치우셨다.
“야, 장팔아. 너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내 살다 살다 이런 고기 맛은 처음 본다. 네가 우리 동네 소 잡는 김 씨보다 낫다!”
“장팔이 아니라 장 폴(Jean-Paul)입니다, 어르신….”
장폴 아저씨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할아버지는 어느덧 태풍 사장과 의형제라도 맺을 기세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태풍이 너도 참 사람이 됐다. 우리 지수가 이런 실력 있는 놈들 밑에서 배우는 거라면 내가 안심이지. 근데 너희들, 낮에는 좀 일찍 일어나서 마당 청소도 좀 하고 그래라! 젊은 놈들이 꿈이 있어야지!”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내일부터 새벽같이 일어날게요!”
4. 공짜 밥의 최후와 새로운 이름
밤 11시. 할아버지는 태풍 사장과 어깨동무를 하고 식당을 나서며 내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지수야, 저놈들 건달은 아닌데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야. 근데 밥은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여기서 공짜 밥 많이 얻어먹어라. 사장 놈이 좀 맹해 보이니까 네가 싹싹 긁어먹어. 나도 안주 생각나면 가끔 들를 테니까.”
할아버지가 비틀거리며 돌아가신 뒤, 식당에는 태풍이 지나간 듯 허탈한 정적이 흘렀다. 장폴 아저씨는 남은 소라 껍데기 더미를 보며 허탈하게 담배를 물었다.
“야, 태풍. 나 오늘 어르신한테 ‘장팔이’라고 불린 게 제일 충격이었어. 프랑스 미슐랭 주방에서 날리던 내 이름이 어쩌다 장팔이가 됐냐….”
“어울려, 인마. 장팔이가 딱이야. 정감 있네. 지수야, 너희 할아버지 덕분에 저녁 예약 손님들한테 나갈 소라 다 떨어졌다. 곰탱이랑 같이 당장 물질이라도 해와야겠어. 이게 다 네가 할아버지 관리를 못한 탓이다.”
사실 아저씨의 본명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자부심 있게 써온 '장 폴(Jean-Paul)'이었다. 하지만 오늘 할아버지의 강렬한 습격과 '장팔이'라는 구수한 호통 덕분에, 세련된 프랑스 이름은 영원히 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우리 식당의 공식 이름은 '장팔'로 굳어져 버렸다.
곰탱 아저씨는 구석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스테이크 뼈를 뜯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수야, 너희 할아버지 정말 멋지시더라. ‘건달 놈들’이라고 할 때 우리 정체성을 아주 정확히 꿰뚫어 보셨어. 소름 돋았다니까.”
나는 설거지통 앞에 서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요란한 습격으로 시작된 하루는 결국 장폴 아저씨의 ‘K-분자 요리’와 태풍 사장의 ‘넉살’에 무너졌다. 지랄 맞은 세 남자와 우리 할아버지.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이들이 촛불 성 아래에서 소라 소스처럼 부드럽게 섞인 날이었다.
나는 오늘 하루 알바 일지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늘의 성과: 할아버지의 요새 승인 완료. 부작용: 세련된 '장 폴' 셰프는 죽고, 구수한 '장팔' 아저씨가 탄생함.]
바다 위로 달빛이 은화처럼 부서지고, 식당은 다시 3시의 고요를 향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오늘의 요리]
메뉴: 프랑스 귀족과 K-할아버지의 극적 화해, '에스카르고(Escargot) 스타일 참소라구이'
1. 에스카르고(Escargot)의 변신
원래 에스카르고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전채 요리로, 식용 달팽이를 버터, 마늘, 파슬리와 함께 구워내는 요리다. 장팔 아저씨는 오늘 할아버지의 '지팡이 공격'을 막기 위해 달팽이 대신 이 동네 바다의 자존심인 참소라를 택했다. 달팽이의 부드러움과는 또 다른, 참소라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할아버지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한 셈이다.
2. 버터와 들기름의 평화 협정
프랑스 요리의 핵심이 '버터'라면, 우리 할아버지 식단의 핵심은 '들기름'이다. 장팔 아저씨는 서양 버터의 느끼함을 잡기 위해 다진 마늘을 폭탄급으로 투하했고, 여기에 들기름 한 방울을 섞어 '구수한 풍미'라는 다리를 놓았다. 서로 다른 두 지방 성분이 열을 만나 하나로 섞이는 에멀전(Emulsion) 과정은, 흡사 건달이라 욕하던 할아버지와 태풍 사장이 술잔을 맞대는 풍경과 닮아 있었다.
3. 9시 뉴스에 나올 만한 감칠맛
오븐에서 지글지글 끓으며 나온 소라 껍데기 속에는 알리신(마늘)의 알싸함과 버터의 고소함, 소라의 짭조름한 바다 향이 농축되어 있었다. 서양 요리는 느끼해서 못 드신다던 할아버지가 와인을 약주처럼 들이켜게 만든 건, 결국 '익숙함' 속에 숨겨진 장팔 아저씨의 '섬세한 계산' 덕분이었다.
[지수의 사담: 03:00 PM 뒷이야기]
결국 장폴 아저씨는 '장팔이'가 되었다. 미슐랭의 자부심도 할아버지의 지팡이 앞에서는 무력했다.
태풍 사장은 옆에서 "장팔이가 훨씬 입에 착 붙는다"며 낄낄대고, 곰탱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남긴 고기 뼈를 보며 "우리 정체를 들켰다"라고 좋아한다.
경영학적으로 보면 오늘 영업은 '원가율 폭망'에 '지인 공짜 식사'라는 최악의 사례지만, 할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촛불 성의 촛농처럼 묵직하게 쌓인 걸 보니 나쁘지 않은 투자였던 것 같다.
"장팔 아저씨, 너무 상심 마세요. 이름은 구수해졌어도 요리 실력은 여전히 미슐랭이니까. 근데 내일은 진짜 마당 청소 좀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