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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Aug 21. 2022

Less known : 경포대, 대관령, 6번 국도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사람들이 경포대에 경포대가 있는 줄 잘 모르더라구.”

“그래? 그럼 가봐. 가보고 나한테도 좀 알려줘!”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곳들이 있다. 경포대가 그렇고, 대관령이 그렇고, 그곳들로 가는 6번 국도가 그렇다. 경포대라고 말할 때 대개는 경포호를 뜻한다. 경포호에 경포대가 있는 줄을 잘 모른다. 대관령이라고 할 땐 대관령 고원을 대관령으로 올라서 대관령으로 내려가겠거니 생각한다. 싸리재로 올라서 대관령으로 내려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관령과 경포대로 가는 6번 국도는 다녀본 사람은 많아도, 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적다.


‘경포대에 경포대가 있다’는 농담 같은 말로 시작된 여정이다. 길은 아주 단순하다. 서울을 벗어나 삼패사거리에서 6번 국도를 만나고, 그 길로 곧장 강릉까지 간다. 사람들이 다녀서 자연히 생겨난 길들이 연결되어 도로체계가 된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번호를 가진 도로만으로 200km가 넘는 여정을 간다는 건 드문 일이다.


6번 국도는 좀 특별하다. 인천 월미도 옆 중구에서 강릉 연곡까지 한반도를 거의 정확하게 동서로 가로지른다. 서울도 마곡부터 신촌, 광화문, 종로, 동대문, 청량리를 거쳐 망우고개까지를 동서로 횡단한다. 작은 특별함을 더하는 뜻으로 집 옆에 있는 동대문에서 출발한다.


군자교, 아차산로를 거처 아천 IC에서 강변북로로 접어든다. 뒤에서 아침 해를 받는 한강이 눈부시다.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하다. 삼패사거리에서 6번 국도를 만난다. 덕소 고가차도 위에서 보는 강은 잔물결 하나 없이 잠든 듯 고요하다. 멀리 왼쪽으로 예봉산, 오른쪽으로 검단산이 팔당 한강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양수리를 지나 용담대교에 오른다. 차들의 흐름이 빨라진다. 자세를 낮추고, 하체를 바르고 단단히 하고, 상체에 힘을 빼고, 기어를 올린다.


횡성 추동교차로다. 높고 검푸른 연봉들이 멀리서 앞을 막아서듯 일자로 펼쳐진다. 장대하다. 태백산맥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금초등학교를 지나서부터 길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길 가에 집들도 사라진다. 산악 구간이 시작된다. S자 급커브 고개를 2단과 3단으로 기어를 바꿔가며 오른다. ‘황재 정상입니다. 해발 500m’ 표지판을 지난다.


뭔가 좀 이상하다. 큰 고개를 올라왔으면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지를 않는다. 정상에서부터 평탄면이 펼쳐지고, 고원의 밭들 사이로 뻗은 부드러운 길이 같은 눈높이로 보인다. 물결을 타듯 둔내 고원을 지난다. 능선에 풍력발전기가 서있는 높은 산이 보인다. 태기산이다. 양두구미재로 접어든다. S자 코너들이 끝이 없다. 속도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몸에 감각을 집중한다. 정상에 도착한다. 980m다. 시동을 유지한 채 잠시 정차하고 뒤를 돌아본다. 긴 산 연봉 연봉들이 파도 일렁이는 바다 같이, 물결이 출렁이는 강물 같이 한이 없다.


계속 간다. 이번에도 이상하다. 정상에서 잠깐 내려가는 듯하던 길이 이내 평탄해진다. 봉평, 장평, 용평을 지나 대관령 발치 마지막 마을 진부에 이를 때까지 밋밋한 오르막 평탄로가 계속된다. 이제 알겠다. 6번 국도 태백산맥의 큰 고개들은 넘어가는 고개가 아니다. 올라서는 고개다. 황재에서 한 턱 올라서고, 양두구미재에서 또 한 턱 올라서고, 싸리재에서 마지막 한 턱을 올라선다. 올라설 때마다 둔내 고원, 봉평 장평 용평 고원, 대관령 고원이 순서대로 평탄하게 열린다. 그러고 보니 봉평, 장평, 용평의 평은 모두 편평하고 넓게 트인 땅이라는 뜻이다.


진부 시내로 들어선다. 대관령 고원에 오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다. 첫인상은 부드러움이다. 태백산맥 깊은 산중 마을이지만, 지극히 원만하다. 맑고 깨끗하다. 아늑하고 소박한 속에 활기도 있다. 쇠잔, 퇴락, 망각의 기미가 없다. 마을 앞으로 오대천이 흐른다. 개울가에 기세 좋은 미루나무 세 그루가 하늘을 향해 서서 일렁이고 있다. 잘생긴 미루나무를 본 것이 아주 오랜만이다.


오대산 월정삼거리에서 6번 국도를 벗어나 456번 지방도로 달린다. 6번 국도가 아니지만, 6번 국도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6번 국도가 진고개를 거쳐 북강릉 연곡으로 우회하기 전까지는 이 길이 6번 국도였다. 그때 이 길은 대관령을 통해 강릉 시내로 바로 들어갔었다. 2001년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 확장이 있기 전에는 고속도로로 쓰이기도 했었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를 모두 경험했으니 이 길의 팔자가 질기고 세다.


싸리재를 오른다. 여기를 올라가면 대관령 고원이다. 헤어핀도, 커브도, 심한 경사도 없이 곧고 완만하다. 지세와 풍경도 담담하고 만만하다. 정상에 올라서니 평탄한 대지에 완만한 구릉들이 넌출거린다. 가까운 산들은 자락이 넓고 봉우리가 봉긋하다. 서쪽 사리재 정상이 800m, 동쪽 대관령 정상이 832m고, 그 사이에 평탄한 대지가 놓여 있다. 언덕인 듯 산인 듯 한 야산에 듬성듬성 소나무를 남긴 초지에서 급할 것 없는 소들이 꼬리를 흔들며 풀을 뜯는다. 맞은편 넓은 구릉 밭에 배추가 싯푸르다. 그 사이 이차선 도로를 달린다. 양편에 전나무가 줄지어 섰다. 아름답다. 높고 순하고 굳세다.


커다란 바위에 새긴 ‘대관령’이 보인다.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시동을 끈다. 고개 끝에 서자 평탄 지대가 단애로 바뀐다. 단애 밑으로 첩첩의 산들이 고도를 낮추며 멀어지면서 양편으로 벌어진다. 멀어지고 벌어진 산들 속 삼각주 모양 평지에 강릉이 자리했다. 강릉 너머로 동해가 일자로 펼쳐진다. 거대하고 푸른 인피니티 풀 같다. 편안하고, 넉넉하다. 서에서 동으로 바람이 거세다. 사진을 찍는 손이 흔들려 초점이 어긋난다. 바람을 따라 눕는 억새윤이난다.


경사가 급한 와인딩 길을 굽이치며 내려간다. 숲과 나무와 풀향이 헬멧 안에서도 느껴진다. 고도가 낮아지자 길 양편으로 곧고 붉은 줄기를 가진 소나무들이 보인다. 소나무 아래 널찍한 그늘마다 서너 사람씩 김밥, 사발면, 과일을 먹으며 다. 한 때의 고속도로가 이제 피크닉 장소로도 쓰인다.


경포대 주차장에 모터사이클을 세운다. 경포대로 향한다. 소나무 그늘 언덕길이 시원하다. 부츠를 벗고 정자에 오른다. 경포호가 기름한 타원 모양으로 펼쳐지고, 호수 너머로는 짙푸른 바다다. 잔물결이 이는 경포호도 바다 같이 넓다. 정자 너머 경포호 끝으로 멀리 호수와 바다 사이에 씨마크호텔이 하얗게 빛난다. 등대 같다. 바다에서 산 쪽으로 바람이 시원하다. 마루에 앉는다. 편안하고 느긋해진다. 몸도, 감각도, 감정도, 생각도 느슨해진다. 호흡도 바람의 결대로 깊고 부드러워진다. ‘제일강산’ 편액이 빈말이 아니다.


호숫가로 내려간다. 호수길을 따라 가시연습지로 간다. 입구에 습지 설명과 함께 사진들이 있다. 놀랍다. 1966년 사진의 경포호는 바로 옆 김홍도의 경포대 그림과 똑같다. 넓은 호수를 더 넓은 습지가 둘러싸고, 그 바깥을 소나무 숲과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다. 호수와 바다는 희고 얇은 모래 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는 그것뿐이다. 사진에도 그렇고, 그림에도 그렇다. 적어도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래 왔다.  


사진과 그림 속의 경포호는 1970년대에 달라졌다. 경포 습지가 식량증산을 위해 모두 논으로 개간되었다. 습지 복원 전 2008년 사진에서 경포호는 반듯반듯 구획된 논들로 빠듯하게 에워쌓여 있다. 그 논에서 50년 가까이 벼농사가 이루어졌다. 농사를 짓는 동안 습지에서 자생하던 가시연은 자취를 감췄다. 그래도 사람들 말은 이어져서 ‘예전에 이곳에 가시연이 자랐었다’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후반 농지 일부가 습지 복원을 위해 매입되었고, 농사가 중단되어 논은 묵논이 되었다. 그 묵논에서 50년 가까이 땅 속에 씨앗으로 묻혀있던 가시연들이 다시 자연 발아했다. 가시연은 이제 복원된 습지 전역에서 자란다.


가시연의 자연발아가 다시 최초로 일어났던 곳에 작은 연못이 만들어졌다. 습지 연못에 쟁반만한 가시연 잎들이 빼곡하다. 수면이 보이지 않는다. 진흙 바닥에서 솟는 기포 터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새끼 맹꽁이 같기도 하고, 새끼 개구리 같기도 한 소리로 숨을 쉰다. 호수와 습지에서 가마우지들이 자맥질을 한다. 평화롭고, 아름답고, 경이롭다.


오후 4시다. 대관령과 진고개 머리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굵은 빗방물이 떨어진다. 오후 늦게 온다던 비가 빨라진 것 같다. 서둘러 시동을 건다. 잠깐 생각하다 대관령을 포기하고 진고개로 방향을 잡는다. 빗속에 넘기에는 진고개가 낫다. 연곡교차로에서 서쪽으로 시발하는 6번 국도를 탄다. 비가 거세진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속도를 줄일 수도 없다. 폭우가 되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 한다. 피부에 꽂히는 빗줄기가 따갑고 아프다. 진고개 넘어 진부, 용평, 장평, 봉평, 둔내 쪽에도 내내 비가 내린다면 큰일이다. 여름이지만 태백산맥 구간을 비 맞고 넘자면 한 시간 넘게 오한에 떨어야 한다. 진고개 아래 부연동길 입구에서 계기판을 보니 대기 온도는 이미 22도까지 떨어졌다. 체감온도로는 초겨울 같다.


6번 국도 진고개길을 올라간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다. 1m 앞이 겨우 보인다. 아주 춥고, 셔츠 바지 부츠가 모두 젖었다.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걱정이 커진다. 주변에 눈을 줄 여유가 없다. 갖가지 복귀 시나리오로 생각이 복잡해진다.


960m 고개 정상에 올라선다. 서쪽 하늘이 밝고 파랗다. 다행이다. 월정사 방향으로 내려오는 동안 거짓말처럼 비가 잦아든다. 월정삼거리에 도착할 때 완전히 그친다. 온도도 올라간다. 마음이 놓이고, 생각이 단순해진다. 주변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유가 찾아든다.


돌아오는 동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사람들이 삼사백억 큰돈을 들여 경포 습지를 되살리는 까닭이 뭘까?’ 범람을 막기 위한 유수지 조성을 위해? 생태 보전을 위해? 경관을 개선하기 위해서? 더 많은 방문객을 모으기 위해서? 옛 모습에 가깝게 되살리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라서? 어쩌면 이 모두?


2022년 초 경포호에 추가 습지 복원이 결정되었다. 2013년 가시연습지 31만 제곱미터가 복원된 후 10년 만에 그 두 배인 60만 5,553 제곱미터의 습지가 복원된다. 나는 복원된 가시연습지를 보는 게 기쁘다. 경포호 주변에 습지가 더 만들어지면 더 기쁠 것 같다. 이 기쁜 마음에는 먹는 일을 위해 논이 되었던 습지의 상처와 그 상처 속에 50년을 웅크렸다 다시 싹을 낸 가시연 씨앗의 인고에 대한 동일시와 연민이 섞여있다. 원형의 아름다움에 대한 낭만도 섞였다.


복원 예정지의 토지, 상가, 주택 소유주들은 지금 반발하고 있다. 예정지의 강제 수용 계획을 철회하고, 금지된 건축행위를 즉각 허용하라는 요구다*. 습지가 복원되기 전 50년 동안 그곳 논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경포호가 보이는 곳에서 아직도 논인 곳에서는 농사를 짓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팔고, 카페에서는 커피를 판다. 살기 위한 활동에 중단은 없다.


상처, 발아, 원형에 대한 공감과 낭만, 쌀과 돈과 만들어 쌓는 일의 노고와 필요, 무엇이 답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으니, 그 사이 어디쯤들을 잇는 길을 더듬어 가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 강원도민일보 2022. 1. 18.

  매일경제. 2022.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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