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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Aug 20. 2023

나와의 조용한 하루: 오대산과 월정사, 선재길, 상원사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갈 곳을 정하는 건 떠나기 전의 마음인 듯싶다. 마음이 밝고 가벼울 땐, 44번 국도를 타고 양양이나 속초로 간다.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짜릿하게 넘고, 파란 바다와 하얀 설악산에 감동한다. 마음이 어둡고 진득할 땐, 길게 42번 국도를 따라 동해나 삼척엘 간다. 아침 조양강의 찬란함과 백복령 동해바다의 장쾌함에 환해진다. 심사가 꼬이고 날카로워질 때면, 6번 국도를 타고 강릉으로 간다. 오대산과 진고개의 아늑함과 송정 솔숲 바람의 다정함에 부드러워진다.


35도 언저리의 뜨거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종일 뜨겁게 말들을 쏟아내야 하는 날들도 계속 돼왔다. 뜨거운 날들은 끝날 기미가 없지만, 열에 들뜬 감정과 생각에는 진정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오대산 월정사, 선재길, 상원사로 가기로 한다. 오대산은 숲이 깊고, 월정사 선재길 상원사는 느낌이 깊다. 세 장소 모두 해발 700미터부터 850미터 고지대에 걸쳐 있으니 시원할 것도 같다. 나와의 서늘한 하루를 보내기에 더없이 좋을 듯하다. 가는 길조차 복잡할 것이 없다. 덕소에서 월정사까지 180여 킬로미터가 6번 국도 하나로 이어진다.


월정사로 가는 길은 단순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여정은 단순하지 않다. 높은 경지인만큼, 월정사 권역에 들려면 도둑머리고개(300미터), 황재(500미터), 양두구미재(980미터), 속사재(777미터) 네 개의 고개를 넘으며 차츰 고도를 높여야 한다. 고도를 높이는 동안에는 성격이 다른 세 개의 구간을 통과하게 된다.


덕소부터 양평까지 50여 킬로미터는 물의 세상이다. 빼곡한 수직의 도시 풍경이 하늘을 향해 완만하게 열린 산들과 그 산들 사이를 가득 채운 드넓은 물의 공간으로 바뀐다. 오른쪽으로 강을 두고 강의 속도로 달리면, 개방감과 이완감이 몸에 가득 차와서 편안하고 느긋해진다. 이 구간은 노동과 생활의 부산한 일상을 뒤로하고 침묵과 정돈의 고요한 하루로 진입하는 의례처럼 느껴진다.


양평부터 횡성까지 50여 킬로미터는 양평까지의 한강 구간과 횡성부터의 산악 구간을 연결하는 통로다. 멀리 물러나 앉은 산들 사이의 넓은 들, 좁아진 산들 사이를 흐르는 계곡천과 천변의 밭, 낮아진 산자락들이 만드는 언덕과 구릉이 다양한 풍경을 만든다. 들과 계곡, 고개와 언덕을 크루징 하듯이 달리면,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구간은 물의 세상으로부터 산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이행의 과정 같다.


횡성부터 월정사까지 80여 킬로미터는 산의 세상이다. 사방의 검푸른 산, 성벽 같이 막아서는 준령들의 산맥, 원경으로 너울져가는 산능선들의 아득함과 광활함이 풍경을 이룬다. 해발 500미터 이상 산간 고원지대의 적막 속을 달리면, 높고 깊은 곳의 한 점 존재와 고독이 느껴진다. 이 구간은 속계의 끝이자 선계의 초입, 어쩌면 두 세계의 공존 같다.


이 세 단계를 모두 거치면 월정사가 나오고, 월정사를 지나면 선재길을 걷게 되고, 선재길을 다 걸으면 상원사가 나온다.


아침이 이른데도 열기가 느껴진다. 안전하고 두터운 것보다 가볍고 시원한 것들로 골라서 장비를 챙긴다. 넘어지는 것도 위험이지만, 너무 뜨거운 것도 위험이다. 도심을 달리는 동안 대시보드 온도계는 28도와 30도 사이를 오르내린다. 덕소에서 한강 구간으로 올라선다. 완벽한 무풍 속에 소리 없는 열기가 내린다. 키 큰 미루나무 높은 가지에서 이파리들은 미동도 없다. 강가 버드나무 군락도 정적일 뿐이다. 아침해를 받는 한강은 섬세하게 어른거리는 비단빛으로 매끈하다.


양평을 지나 횡성에 들어선다. 온도는 이미 33도를 넘어가고 있다. 산간 고원지대로 올라서는 황재를 넘는다. 시원함이 느껴진다. 온도계를 보니 26도다. 횡성의 끝 양두구미재도 넘는다. 봉평이다. 온도가 더 떨어져 25도가 된다. 몸의 열기가 내리니 살만하다. 정신도 돌아온다. 몸이 살아야 정신도 산다.


오대천 옆 드넓은 간평들을 지난다. 해발 700미터 고지대의 수만 평 평지밭은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다. 그늘이 깊어 어둑하고 서늘한 전나무 숲길을 천천히 달린다. 월정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금강교를 건넌다. 짧은 오르막을 지나 천왕문 아래를 통과한다. 전경이 들어온다. 이번에도 첫인상은 친근하고 편안하다. 절집들은 너무 낮아서 고만고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높아서 날카롭거나 사납지도 않은 능선들에 안겨있다. 절터는 큰 단차 없이 평평하고, 모든 절집들은 높낮이 위계 없이 같은 높이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곳에서 호령하는 집도 없도, 낮은 곳에서 우러러보는 집도 없다. 기둥, 지붕, 단청에서는 쇠락의 기미보다는 새것의 단정함이 느껴진다.


경내의 연등들은 앙증맞은 미니 연등들이다. 마당의 나무들마다 열매들처럼 알록달록 달려있다. ’난다나‘라는 카페도 있다. 절에서 커피는 금기 아니었나? 신선하다! 템플스테이 구역의 건물들은 전통적 스타일을 유지한 가운데 모던한 느낌도 분명하다. 완고함, 엄숙함, 근엄함, 위압감, 무게감보다는 경쾌하고 밝은 느낌이 가득하다. 현대적 경영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람들이 원하는데 안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용기 있는 자문과 자답의 과정이 왜 없었을까 싶다.


‘난다나’는 센스 있는 이름이다. "환희의 동산으로 초대합니다", 난다나를 열 때 월정사 홈페이지에 올린 공지문의 제목이다. 공지의 설명에 따르면, 욕계 천상에는 여러 개의 하늘이 있다. 그중 처음 나오는 하늘이 사천왕천이고, 사천왕천 다음에 자리한 하늘이 도리천이다. 도리천에는 정원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난다나다. 난다나는 그래서 하늘의 정원이자 환희의 동산이고 천상의 동산이다.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라고 하늘 사람들은 노래한다고 한다. 월정사의 난다나도 천왕문 바로 다음에 자리하고, 커피를 마시는 테이블들은 오대천을 굽어보는 높다란 야외 데크 위에 놓여 있다. 불교의 논리는 난다나에서 물리가 된다.


높은 전나무와 소나무 아래의 유리집 난다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산다. 야외 데크 테이블들 중 오대천과 금강연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아름드리 단풍나무, 전나무,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린다. 서너 길 아래 오대천 바위 계곡을 흘러가던 물이 금강연 머리의 흰 반석에서 떨어지며 하얗게 부서진다. 단풍나무 잎들이 미풍에 일렁이는 사이로 물소리가 시원하다. 단풍잎만 한 참새들과 동고비들제몸만한 단풍잎들 사이 가지에 앉아있다. 난다나를 보아서인가, 편안하고 행복하다.


월정사 북쪽 끝에서 오대천을 건넌다. 다리 위에 선재길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표지판의 키워드는 깨달음과 치유다. 월정사에서는 ‘나를 찾아 떠나는 선재길‘이라는 플래카드를 봤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이고, 치유고, 발견일까. 플래카드는 깨달음, 치유, 발견이 지향할 곳이 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선재길은 나무와 물의 길이다. 설악산이 바위의 산이듯, 오대산은 나무의 산이다. 선재길은 숲이 깊은 오대산의 깊은 계곡을 따라 나있다. 전나무 숲길로 들어선다. 시원하고 서늘하다. 검푸른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길 양편에 도열한 채 원경으로 멀어져 간다. 경이롭다. 육중한 힘과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서늘한 어둑함이 가시는가 싶더니 오른편으로 환하게 계곡천이 열린다. 바위 계곡을 부딪쳐가는 물소리는 시원하고, 여울과 소에서 부서지는 빛은 계곡에 가득하다. 환한 물가를 걷는다. 전나무가 듬성듬성해진다. 가지와 잎이 넓은 신갈나무, 단풍나무, 피나무가 자리를 채운다. 모두 연륜이 깊어 보이는 나무들이다. 허리와 머리를 하늘을 향해 젖혀야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만큼 키들이 크다.  


길이 더욱 좁아진다. 노면을 다듬지 않은 돌길이다. 사람이 걸어서 낸 길에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나란히 걸을 수 없어 앞뒤로 걷는다. 걷는 동안 저절로 말이 잦아든다. 계곡의 물소리와 숲의 고요함을 깨는 것이 어색하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말없이 몸을 틀어 길을 내준다. 한 번 걷는다고 깨달아지지는 않겠지만, 이 길을 왜 깨달음과 치유와 발견을 구하는 사람들이 걷는지는 알 것도 같다.


선재길이 끝나고 상원사에 이른다. 수직이다시피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가파른 접근의 첫인상과 달리 절 마당에 도착하니 고압적인 면이 없다. 높은 지대에 자리를 잡았지만, 절터에 올라서고 보니 절집들이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절집들을 경사가 급한 산사면 지형대로 층지어 앉히지 않고 평탄하게 터를 닦아 앞뒤로 옆으로 배치했다.


마주 보던 시선을 거두어 뒤로 돌아서니, 상원사의 시선이 향하는 쪽 전경이 열린다. 오대산의 줄기들이 점차 낮아져 가는 근경 너머로 멀리 태백산맥의 가장 높고 힘찬 산군들의 장대한 원경이 펼쳐진다. 넓지 않은 터지만, 그 터에서 느껴지는 기상은 힘차고 드넓다. 상원사에서는 좀스런 기도나 맥 빠진 수도가 애초에 불가능할 것 같다. 이 터의 생각 스케일은 세상 전체나 우주를 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깊은 산중 외딴 절이지만, 상원사도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없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감각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청풍루에는 '깨어있는 마음', ‘오대광명 받으세요’라고 한글로 현판을 달아놓았다. 작은 미술관에는 ‘몸과 마음이 기뻐지는 곳’, 공양실에는 '몸과 생각이 풍요로워지는 곳'이라고 써놨다. 찻집 청량다원에서는 아메리카노와 라떼는 물론 핫초코, 에스프레소에 드립커피도 판다. 오래된 에고를 부리기보다는 찾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세심하다.


오늘 뜨거운 철의 정점에서 서늘한 한때를 보냈다. 많은 말들 끝에 말없는 하루를 보냈다. 깨달음 참된 나 발견은 없었다. 다만, 나와의 조용한 하루가 있었다. 몸의 열기가 얼마간 내렸다. 


월정사 옆 금강연에는 열목어가 사는데, 열목어는 한여름에도 수온이 20도씨 이하인  곳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한다. 금강연 옆 열목어 복원 안내판에 그렇게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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