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먼 곳이다. 실제로도 멀지만, 안 가본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실제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모터사이클로 정선에 다녀왔다고 말하면 ‘하루 만에 거길 갔다 올 수 있느냐’ 묻는 사람들이 많다. 멀지만 아름다운 곳이고, 그래서 멀어도 또 가게 되는 곳이다.
정선이 아름다운 건 그곳이 목적지로서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선에 이르는 여정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선에는 덕산기 계곡, 소금강, 벌문재, 오두재 같이 라이더들이 좋아하는 특별하게 아름다운 곳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크고 놀라운 아름다움을 가진 동강이 있다. 정선에 이르는 여정은 횡성과 평창의 풍수원, 안흥, 운교리, 방림, 미탄 같은 장소들과 이 장소들을 잇는 길과 고개들을 거친다. 이 장소들과 길들은 야단스럽지 않게, 나지막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정선의 아름다움은 특별하고 놀라운 아름다움이고 정선에 이르는 여정의 아름다움은 별스러울 게 없는 아름다움이지만, 이 두 아름다움은 매끄럽게 하나로 이어진다. 모두 자연의 아름다움이고, 정선 여정에 포함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멀기는 하지만, 정선으로 가는 경로는 간단하다. 어떤 길로든 동쪽 방향으로 서울 시내를 벗어난다. 어디서든 6번 국도를 만나면, 그 길로 횡성 추동교차로까지 100km를 달린다. 추동교차로에서 442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새말교차로까지 잠깐 간다. 8km 정도 거리다. 새말교차로에서 42번 국도를 만나 동쪽 방향으로 갈아탄다. 그 길을 따라 100km를 가면 정선이다. 서울부터 190km 길의 반은 6번 국도, 나머지 반은 42번 국도를 탄다는 느낌으로 가면 된다. 조용하게 자연 속을 달릴 수 있는 길이다. 혼자 정선에 갈 때면 늘 이 길로 간다.
정선에 이르는 경로는 간단하지만, 여정은 풍요롭다. 아침 7시 집을 떠나 용마터널과 강변북로를 거쳐 삼패사거리에서 6번 국도를 만난다. 계기판에 표시된 대기온도가 30도지만, 팔당으로 이어지는 한강변 고가도로 위에서 막힘없이 달리는 동안 시원함이 느껴진다. 장마 뒤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이지만, 강원도의 산과 강을 따라 달리는 오늘의 여정은 시원하겠다는 기대가 든다.
덕소, 팔당, 양수리, 양평까지 한강을 끼고 막힘 없이 달린다. 긴 장마가 끝나가는 때라서 한강 양쪽 둑 끝까지 물이 차올랐다. 강 양안의 퇴적지 버드나무들은 줄기가 모두 물에 잠겼다. 가지와 잎들만 물 위에 반원으로 떠있다. 버드나무 푸른 반원들이 다도해의 섬들 같다. 그 섬들 앞에 오리들이 떼로, 또 홀로 떠 있다.
용두교차로에서 우회전 램프를 타면서 6번 국도를 유지한다. 길을 타는 감각과 도로 번호가 달라서 착각하기 쉬운 곳이다. 서울부터 타고 오던 6번 국도를 달리던 방향대로 이어 달리면 6번이 아니라 44번 국도가 된다. 홍천, 인제, 한계령을 거쳐 양양으로 간다. 6번 국도를 계속 타려면 우회전 램프를 타고 P 턴을 하듯 내려와 좌회전을 해야 한다. 이제는 익숙해져 저절로 길이 타지지만, 초보 때는 길을 잘못 든 적이 몇 번 있다. 교차로 갓길에 한국인 두 명, 외국인 한 명이 멈춰 서서 길을 찾고 있는 듯 보인다. 얘기를 들어보고 방향을 알려줄까 하다가 공연한 짓 같아서 그냥 지나간다.
용두교차로에서 6번 국도에 접어드니 경기도 땅인데도 강원도에 들어선 듯하다. 넓은 들을 달리던 왕복 4차선 도로가 2차선으로 줄었다. 가드레일이 없는 길이 좁은 계곡 개울을 따라 굽이지며 이어진다. 모터사이클을 좌우로 부드럽게 넘겨가며 달리는 마음이 흥겹다.
10여 km를 달려 도덕고개에 이른다.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횡성의 경계다. 예전에는 각도가 큰 S자 커브길에 모터사이클을 크게 눕히며 올랐었다. 도계를 이룰 만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한 도로 개선으로 지금은 터널을 통해 직선으로 빠르게 통과한다. 도간 경계를 몸으로 느끼기 어렵다.
길만 바뀐 게 아니다. 도덕터널이 생기기 전 고개 이름은 ‘도둑고개’, ‘도둑머리고개’였다*. 인근의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불렀고, 살아생전 아버지도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표지판에 ‘도덕고개’로 쓰여있다. 고개 아래를 통과하는 터널도 ‘도덕터널’이다. 아직도 터널을 우회해서 도둑고개로 도계를 넘을 수 있지만, 작심을 하지 않는 한 도덕터널을 통해서 강릉이나 정선으로 가곤 한다. 오늘도 터널을 통한다. 동네 어른들은 아직 이곳을 도둑고개라고 부른다.
도덕터널을 지나 좌회전하니 풍수원성당이다. 오래되고, 소박하고, 아름답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아름답다.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지금은 푸른 잎들이 하늘 가득하다. 가을에는 노란 단풍이 하늘과 마당에 가득해질 것이다. 막막해서 혼자 아버지 산소에 갈 때나 올 때 들르기도 한다. 주차장이 성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좋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도 덜 미안하기 때문이다.
성당을 먼발치로 보고 지나친다. 대신 성당이 앉은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높은 산으로 둘러 쌓인 작고 좁은 계곡이다. 분지라고 부를 수도 없이 그냥 산이고, 산중 계곡이다. 높은 곳은 산 경사대로 만든 비탈밭이고, 그 아래는 층층의 평평한 밭이다. 가장 낮은 곳에 층층의 다랑논이 있다. 논은 모두 해서 1천 평이나 될까 싶다. 사람이 살지 않는대도 이상할 게 없는 땅이다. 이런 곳에 오래되고 존중받는 성당이 있고, 집들이 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풍수원성당 신자들이다**. 좁고 척박한 곳이지만, 옹색하거나 궁핍하다는 느낌이 든 적이 없다.
풍수원에서 횡성읍으로 넘어가는 한 고갯마루에서 마주오는 세 명의 라이더를 만난다. 셋 모두 칼라가 선명한 슈퍼커브를 타고 있다. 길 오른쪽은 이제 막 홍조가 들기 시작하는 사과밭이다. 맨 앞의 라이더가 발랄하게 손을 흔든다. 뒤따르던 라이더들도 같은 동작으로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마주 흔들어준다.
추동교차로에서 442번 지방도를 타고 새말교차로로 향한다. 오던 길로 6번 국도를 계속 가면 강릉에 이를 수 있지만, 미련 없이 갈아탄다. 길 옆으로는 넓은 들에 포도밭, 복숭아밭, 논이 푸르게 가득하다. 5분 만에 새말교차로에 이르러서 42번 국도로 갈아탄다.
42번 국도에 들어서자마자 전재가 막아선다. 횡성 우천면과 안흥면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전재 오른쪽으로는 매화산이 우뚝하다. 전재는 지금까지 넘은 고개들 중 ‘재’가 붙은 첫 번째 고개다. 매화산은 높이가 1,085m다. 어렸을 때 봄가을 햇볕이 좋은 날 마루에 걸터앉아 멀리 매화산과 전재를 보곤 했다. 비가 오는 여름에는 안개와 구름에 쌓인 매화산과 전재를 봤다. 60년 전 젊었던 아버지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전재 계곡의 넓고 판판한 바윗장을 떼어다 구들을 놓고 집을 지었다. 나는 그 집에 태어났다.
전재를 넘어 안흥에 닿는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인 아늑한 분지다. 한가운데로 주천강 상류가 흐른다. 편안하고 흥한다는 뜻을 가진 동네다. 안흥을 지나 횡성과 평창의 군계를 이루는 문재로 향한다. 문재로 가는 길에서 높고 깊은 강원도 산간 지방으로 들어간다는 걸 체감한다. 길 양편의 산들이 높고, 산자락은 길을 바짝 조여든다. 집들이 산비탈에 바짝 대거나 산비탈 중간을 파고 낮게 들어앉았다. 문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와인딩이 심하다. 길가 마을에 방지둔, 관터들, 돌투반이, 칡사리 같은 표지판들이 서있다. 산간 지역이 아니면 듣기 힘든 이름들이다. 문재 정상에서 보니 높이가 800m다. 문재에 올라보니 알겠다. 안흥은 편안하고 번성하는 곳이 아니다. 전재와 문재 사이에서 편안하고, 일어서는 생활을 언제 한 번 해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문재에서 평창으로 내려가는 길 경사가 급하다. ‘이륜차 사망사고 잦은 곳’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급경사 구간을 다 내려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하게 틀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트니 개울이 흐르는 계곡의 저점에 닿는다. 개울 양쪽으로 비스듬한 산자락에 집들과 밭들이 자리를 잡았다.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전원주택 단지도 보인다.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 마을이다. 해발이 500m다.
운교리 끝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진 고개를 오른다. 높이는 있지만 사납지 않다. 고갯길 양편으로 산자락이 부드럽다. 오른쪽 산자락에 배추밭과 낮은 집 한 채가, 왼쪽 비얄에는 사과밭, 살림집, 카페가 있다. 그 사이로 고갯길이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휜 큰 호 모양으로 지나간다. 표지판을 보니 여우재다. 여우재, 여우고개는 강원도 길 곳곳에 있다. 여우고개들은 외지고 높긴 하지만, 대개 부드러운 느낌을 갖는다. 여우가 자주 나와서 여우고개인지, 고개의 생김 때문에 여우고개인지 늘 궁금하지만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강원도에서 지금까지 늑대고개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다.
여우고개를 넘어 방림이다. 꽃 같은 숲, 향기 나는 숲이다. 풍경과 이름이 어울린다. 문재 정상부터 내리막길을 억센 악력으로 조여들던 양편의 산들이 방림에 이르러 기세를 풀고 물러난다. 물러난 산들 사이에 들이 넓다. 그 들에 논과 밭이 반듯하고 정연하다. 마을과 들 앞에 잘 생긴 바위 봉우리를 가진 산이 있고, 그 아래로 깨끗한 강이 흐른다. 평창강 상류다. 서쪽 백덕산에서 내려온 개울과 동쪽 대화면에서 흘러온 평창강이 방림에서 합수해서 평창읍으로 내려간다.
뱃재를 넘으니 평창읍이다. 평창읍에서는 큰 산들은 까마득히 물러나고 작은 산들만 들과 집에 가깝다. 방림에서 내려오는 평창강이 읍을 디긋(ㄷ) 자 모양으로 서에서 동으로, 다시 동에서 서로 크게 감싸 안고 휘돌아 나간다. 휘도는 평창강 안에 자리 잡은 읍내 앞에서 강은 넓고 차분하다. 백로와 왜가리가 정적 같이 서있다. 강 앞 천변리 도로 가에 500년 된 느릅나무 거목 가지가 바람에 일렁인다. 전재부터 한 시간 가까이 좁은 계곡과 분지에 익숙해진 눈에 평창읍은 광활하고 넉넉하다. 평평하고 창성한 곳이다.
멧둔재를 넘으니 왼쪽 먼발치로 미탄이 보인다. ‘정선에 다 왔구나’ 싶다. 미탄은 평창에 속하지만, 미탄부터는 길이 좋아 잠깐이면 정선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평창부터 정선까지 길이 멀고 오래 걸렸다. 산굽이를 돌고, 계곡을 따라 흐르고, 급하고 험한 고개들을 넘었다. 멀고 험해도, 라이더들은 S자로, 낙타등으로 산간 마을들과 깊은 계곡들과 높은 고개들을 잇는 그 길을 좋아했었다. 기억 속에 그 길은 40-50분 거리였다. 이제 그 길은 서쪽 산과 동쪽 산을 높은 고가도로로 이어서 계곡을 가로지른다. 큰 산의 서쪽 자락부터 동쪽 자락까지를 터널로 뚫어 곧게 통과한다. 평창과 정선의 군계를 이루던 비행기재는 이제 비행기재터널로 통과하는데, 터널로만 다닌 사람들은 여기가 왜 비행기재인지 묻곤 한다. 가장 굽었던 길이 가장 곧아졌다. 차 없고 신호등 드문 길을 시원하게 달려 20분 만에 정선에 도착한다.
* 도둑고개는 예전에 도둑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횡성뉴스, 2017. 4.1.)
네이버 지도에는 ‘도둑머리고개’로 표시됨(2022. 8. 7. 기준)
인근의 어른들은 ‘도둑고개’, ‘도둑머리고개’, ‘도둑무리고개’라고 부름
** 풍수원성당은 초가집 성당에 1888년 처음으로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부임함.
현재 풍수원성당은 두 번째로 부임한 한국인 정규하 신부가 1905년 착공하여 1907년 준공함.
강원도의 첫 성당이고, 한국의 네 번째 성당이며, 한국에서 한국인 신부가 건축한 첫 번째 성당임.
마을 주민의 90%가 풍수원성당 신자임 (횡성군청 홈페이지/www.hs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