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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Jun 26. 2022

외지고 순하고 아늑한 : 진부령과 화진포

늘 마음 속에 있다.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바닷가에 이르는 라이딩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진부령을 넘어 화진포에 갔던 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섯 번이 넘는 데도 그렇다. 오늘의 라이딩을 위해 지난 며칠 간 여러 경로와 행선지를 검토했었다. 쓸 수 있는 시간, 날씨, 경비, 동행자 여부와 같은 요인들이 고려되었지만, 결정은 결국 한 순간 마음이 기울어진 ‘거기’다. 꼽아 보니 바닷가 장소로 라이딩했던 마지막이 일년도 넘었다. 많은 길들과 장소들 중 진부령과 화진포인 것이 그러니 당연하다.


오늘은 당일 라이딩이다. 챙겨야 할 옷과 장비가 많지는 않지만 세심한 준비는 필요하다. 라이딩 검토 리스트를 짚어 가며 챙길 것과 뺄 것을 고른다. 여름 라이딩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이 복장이다. 더울 것 같아 얇게 입으면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떨게 되고, 추울까봐 두텁게 입으면 이내 멈춰서 옷을 갈아 입게 된다. 집을 나서기 전 날씨를 확인하니 오늘 라이딩 시간대 최저 기온은 28도, 최고 기온은 32도다. 라이딩 진, 반팔 셔츠, 메쉬 자켓을 입고, 여름용 글러브와 숏부츠를 착용한다. 추위를 대비해서 긴팔 셔츠, 방풍 점퍼, 삼계절용 글러브를, 비를 대비해서 레인 자켓을 따로 챙겨가기로 한다. 갈 때 떠오르는 해를, 돌아올 때 지는 해를 안고 달리게 되니 라이딩용 선글라스도 넣는다.


화진포까지 220km, 4시간 길이다. 왕십리에서 용마터널, 덕소, 양수리, 양평, 홍천, 인제, 원통, 진부령, 간성을 거쳐 화진포에 닿는 경로다. 8시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핸드폰을 핸들바 거치대에 꽂았지만 네비게이션 앱은 켜지 않는다. 네비게이션 없이 달릴 때 길과 마을들, 산과 강, 대기와 하늘, 모터사이클과 나 자신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장안교, 용마터널을 지나 아천 IC에서 램프를 타고 크게 휘돌아 강변북로로 접어들자 시야가 크게 열린다. 오른 쪽으로 한강, 그 너머 광나루와 고덕생태공원의 버드나무들이 보인다. 라이딩 장비들을 점검하고, 어린이보호구역과 노인보호구역이 있는 시내 구간을 통과하면서 모아지고 조여졌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린다.


삼패사거리에서 6번국도를 만나 덕소에 이른다. 시야는 물론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오른 편 앞쪽으로 한강, 미사리 강하장, 팔당대교, 팔당댐과 검단산, 그 너머로 넓고 길게 상류로 뻗어 가는 한강이 장대한 스케일의 원경으로 들어온다. 한강이 여러 강들의 하류라는 사실을 다시 체감한다.


양수리는 동해안 어느 곳으로 가든 마음 속 첫 이정표다. 그 곳에 들어설 때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눈이 아니라 물의 고장인 것이 다를 뿐이다. 팔당댐을 지나 팔당 1, 2, 3, 4 터널을 연달아 통과한 후 마지막으로 봉안터널을 빠져 나오니 '아!' 하고 양수리다. 좁고 어두운 터널 끝에 반전처럼 넓고 환한 물의 세상이다. 아찔한 순간을 지나가면 오른 쪽으로는 남한강이 너르게 가득히 펼쳐진다. 그 너머로 부드럽고 듬직한 산들이 남동쪽으로 겹겹이 멀어진다. 왼 쪽으로는 북한강이 열려있고, 그 강 양안에서 산들이 첩첩으로 포개지면서 북동쪽으로 물러서고 있다.


"여기를 보면 지구가 아름다운 행성이라는 걸 느껴"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슴이 커다랗게 부풀었어! 행복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양수리에서 남한강 위로 놓인 2차선 고가도로를 달린다. 시야는 여전히 초광각을 유지한다. 평일 아침이라 정체가 없다. 백미러와 속도계를 확인하지 않고 흐름 대로 달린다. 1차로를 두고 2차로 가장자리를 유지하며 간다. 강 위에는 오리들 서너 마리가 떠 있고, 헤엄쳐 가는 한 마리 뒤로는 가늘고 긴 V자 물무늬가 따라가고 있다. 한 마리 오리가 그리는 물무늬가 놀랍도록 길다.


9시에 양만장에 도착한다. 강원도 방향으로 여행하는 라이더들의 스테이션 같은 곳이고, 내게도 그렇다. 먼저 탱크 가득 주유를 한다. 양만장 이후로는 화진포까지 오가는 도로 변 주유소들 중 고급유를 파는 곳을 찾기 어렵다. 더 넣기 어려울만큼 채워 넣으니 4만원이 넘는다. 기름값이 너무 올랐다. 주유를 마치고 잠깐 망설인다. 바로 출발할까,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갈까. 커피를 마시며 충분한 여유를 가진 후 출발하기로 결정한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받아 야외 카운터 자리에 서서 마신다. 6번 국도로 지나가는 자동차들, 휴게소에 주차된 몇 대 안되는 모터사이클들, 오늘의 라이딩을 준비하는 몇 명의 라이더들, 라이더들을 보며 꼬리를 흔드는 어린 강아지를 본다. 돌이켜보니 이 곳에 편하게 들를 수 있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양만장은 라이더 누구나 알고, 주말이면 수백의 모터사이클들과 라이더들이 모이는 곳이다. 모터사이클을 시작하고도 꽤 오랫 동안 그 모터사이클들과 라이더들 속에 섞이고 속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 양만장에 들어설 때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기도 했다. 한 번 오고 나니 또 올 수 있었고, 곧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양만장은 이제 내게도 스테이션이다.


10시에 양만장을 출발한다. 휴게소 구역을 벗어나 6번 국도에 접어들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기어를 올려가며 속도를 붙인다. 두 시간 반 정도 쉼 없이 화진포까지 달릴 계획이다. 4단과 5단 기어를 번갈아 쓰며 시속 80km에서 100km 사이로 안정적으로 달린다. 나직한 산들은 도로 양쪽으로부터 멀리 나앉았고, 그 산들과 도로 사이 공간에 논, 밭,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길가에는 금계국이 이어진다.


20여 분 달리니 용두교차로다.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주춤하게 되는 곳이다. 달리던 방향대로 직진하면 여기서부터 도로 번호가 44번 국도로 바뀌면서 북동쪽으로 향한다. 이 길을 타면 홍천을 거쳐 오늘 가고자 했던 경로 대로 화진포에 닿는다. 지금까지 타고 왔던 6번 국도를 계속 이어 달리려면 용두교차로에서 오른 쪽으로 빠지는 램프를 타고 내려간다. 그 6번 국도를 따라가면 동쪽 방향으로 횡성, 봉평, 진부, 오대산 진고개를 거쳐 강릉 북쪽 영진해변에 닿는다. 둘 다 좋은 길이다. 화진포를 가려고 나섰다가 여기서 강릉으로 향했던 적도 있고, 강릉을 마음에 두고 달리다가 화진포에 갔던 적도 있다. 이 교차로에서 망설이게 되는 건 나만이 아니다. 라이더들 사이에서 6번 국도와 44번 국도는 모두 아름다운 길로 통한다. 오늘은 망설임 없이 계획한 경로로 계속 가기로 한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점이 되는 신당고개를 지난다. 양평과 홍천이 잇닿는 고개다. 이름이 신당고개인 것은 이유가 명확하다. 신당고개에서 홍천 쪽 바로 아래에 유목정리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강원도 길들을 다니다 보면 '신당', '유목정', '이목정'이 들어간 지명을 종종 만난다. 신당이 있는 곳, 느릅나무가 있는 곳, 배나무가 있는 곳이다. 직관적인 이름들이다. 생활 반경이 넓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곳의 신당 동네와 저 곳의 신당 동네가, 여기 배나무 동네와 저기 배나무 동네가 사람들의 생활과 머리 속에서 혼존할 일이 없으니 간단하고 분명한 이름들이 문제 없었을 것이다.


10시 50분에 홍천을 지난다. 무릎, 어깨, 손목, 허리 상태를 느껴 본다. 관절과 근육이 굳어지는 감각이 있지만 이대로 화진포까지 달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다. 홍천을 벗어나면서 속도를 조금 더 올린다. 길도 달리기 좋은 길이다. 이제 양쪽의 산들은 길 쪽으로 조금 더 다가 붙는다. 산세도 급해지고, 산들의 겹쳐짐이 더 멀리까지 이어져 두터워진다. 마을과 집들이 산과 도로 사이의 들이 아니라 산자락 밭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인다.


홍천 성산교차로부터 인제까지의 44번 국도 구간에는 마음의 이정표 세 곳이 있다. 철정터널을 지나 홍천강과 내촌천이 만나는 합수부 언덕에 화양강휴게소가 있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조망이 있고, 늦가을에는 맛있는 사과를 파는 곳이다. 5분을 더 달리면 팜파스휴게소가 홀연히 나타난다. 팜파스 초원에 홀론 선 로지 같은 느낌을 가진 휴게소다. 밤에 멀리서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다. 소박하고, 단단한 기품이 있는 곳이다. 1994년과 1995년에 건축상을 받은 적이 있고, 이 휴게소를 설계한 건축가는 양구의 박수근미술관과 내면의 율전교회를 설계하기도 했다. 10분을 더 달리면 도로에서 조금 비껴 난 자리에 쥴장루이공원이 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프랑스군 쥴장루이 소령이 전사한 자리에 세운 동상이 있는 공원이다. 이 공원은 다른 전쟁 공원들과 달라서 높은 곳에 있지 않고, 크지 않고, 우뚝하지 않고, 예리하지 않다. 동상은 과장되지 않은 크기고, 총검을 드는 대신 가방을 메고 안경을 썼다. 한가롭고 평화롭게 외진 동네의 한 켠에 나직히 자리하고 있다. 오늘은 이 세 이정표를 모두 지나친다.


쥴장루이공원을 지나 높은 고개를 넘으니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이다. 인제가 시작된다. 신남부터는 44번 국도가 양구에서 내려오는 46번 국도를 만나 두 길이 겹쳐져 달린다. 포개진 길 왼 편으로는 소양호가 넓고 오른 편으로는 높은 산들이 도로까지 내려와 닿아 있다. 소양호 지류를 건너는 인제대교를 넘어 인제, 원통을 지나는 동안 모터사이클 계기판의 회전계와 속도계는 4,000rpm, 100km에 고정되어 있다. 나도 그 모터사이클 위에서 흔들림이 없다.


11시 40분 한계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서 44번 국도와 헤어져 46번 국도로 진부령, 미시령 방향으로 향한다. 우회전해서 44번 국도를 계속 가면 한계령을 거쳐 양양이다. 10분을 달리니 용대교차로다. 오른 쪽으로 비스듬히 빠지면서 46번 국도를 계속 탄다. 직진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미시령터널을 거쳐 속초로 가는 56번 지방도다. 가보면 46번 국도가 지방도 같고, 56번 지방도가 국도 같다. 여러 번 와본 길이고, 출발 전에 경로를 미리 결정해두어서 모든 갈림길에서 혼동도 주저함도 없다.


용대교차로부터 소똥령마을 입구까지 16km 진부령 구간은 오래 마음에 품고 있던 길이다. 용대리 황태마을을 지나서부터 완연한 강원도 산간도로다. 왼쪽으로 진부령부터 서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북천이 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북천의 계곡은 깊지 않지만, 계곡 주변 숲은 깊다. 고개를 오르는 경사가 부드럽고 굽이지는 코너의 각도 부드럽다.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고개길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이번에도 갖는다. 몸과 마음에도 부드럽게 굽이치는 리듬이 가득찬다. 그런 길로 진부령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서 멈추지 않고 달리는 채 정면으로 열리는 광대한 공간과 만난다. 왼편에서 큰 산줄기들이 듬직한 각도로 내려오고 오른 편에서는 조금 급한 각도로 산줄기들이 내리닫는다. 그 사이로 V자 계곡이 동해 쪽 소실점으로 멀어진다. 찰나의 순간에 가슴과 머리에 공명이 인다.


정상에서 동해로 향하는 내리막길 잠깐은 경사와 코너가 급하다. 급경사 내리막 뒤에 180도 가까운 헤어핀 턴을 하는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하지만 낭떠러지가 아니라 산허리를 돌아 내리는 길이라 현기증나는 위협감이 없다. 나의 능력치 안에서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헤어핀 턴 구간에서 모터사이클을 최대한 노면에 눕혀본다. 30도의 기온에 타이어 트랙션이 충분하고 마주오는 차가 없다는 게 확실하니 내볼 수 있는 용기다. 나의 용기는 소심하고 신중하다.


급경사 구간을 지나니 부드럽고 깊은 계곡길이다. 한계치보다 훨씬 낮은 속도로 달린다. 오른 편으로 크고 하얀 바위들 위로 기세 좋은 계곡물이 흘러간다. 진부령 정상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북천이다. 왼쪽 산에서는 큰 나무들이 도로 위까지 가지들을 펼쳐내고 있다. 일어서서 손을 크게 뻗으면 잡힐 듯도 하다. 생명의 가득함 속에 임장하며 진부리를 지나 소똥령마을 입구를 지난다.


간성읍 상리교차로에서 동서로 달리던 46번 국도가 끝나면서 7번 국도를 만난다. 7번 국도로 갈아 타고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10분을 달린다. 거진읍 봉평교차로에서 화진포 방향 도로표지를 따라 좌회전하면 도로 번호가 없는 길을 만난다. 번호는 없지만 '봉정로'라는 이름은 가진 길이다. 산길인듯, 농로인듯 봉정로를 5분 달려 작은 언덕을 넘으니 화진포다.


안개가 가득하다. 낮 12시 30분인데도 수면에서 안개가 피어 오른다. 아늑하다. 화진포 초입에서 모터사이클을 멈추고 시동을 끈다. 쨍한 정적의 밀도가 몸을 감싼다. 온 세상에 혼자 마주서 있는 듯한 팽팽한 긴장이 가득 차온다. 아뜩해진다.


화진포는 넓고, 물이 가까이 있다. 호숫가에 서니 수면이 저 아래 내려다보이지 않고 시선 높이에서 가깝고 넓게 펼쳐진다. 수면을 따라 시야가 열린다. 호수 건너편 가에 언덕인 듯 작은 산이 흑백 실루엣으로 서있고, 그 너머로 멀리 태백산맥 큰 산들이 옅은 배경으로 시야를 가득 채운다. 태백산맥 위로는 빈 하늘이 시야에 가득하다.


자연히 만들어진 호수 둑 위로 길이 나있다. 길 옆 호숫가에 갈대가 자라고, 호수에는 오리들이 떠있거나 날아 오른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는 큰 소나무들이 일렁이는 물결의 리듬으로 서서 숲을 이루고 있다. 호숫가를 걷는 동안 나는 고요하고 차분하고 분명해진다. 사람들도 조용히 말하고 천천히 걷고 있다. 부숭부숭 부었던 몸도 감정도 잦아들고 가벼워진다. 쓸쓸하고 외롭기도 하다. 오후 5시 쯤 집으로 돌아갈 먼 길을 앞두고 해가 지는 쪽으로 호수를 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기쁘고 즐겁기도 하다. 수면이 반짝이고 그 위로 오리들이 헤엄쳐 갈 때 즐겁고 기쁜 마음이 내 안에서 수면처럼 반짝인다. 슬픔, 외로움, 쓸쓸함, 기쁨, 즐거움이 조용히 차올라 실핏줄을 타고 선연히 퍼져나간다.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느낌들과 감정들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화진포에는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들이 있다. 화진포에는 화진포가 있다. 화진포에는 호수를 둘러선 카페들이 없고, 장어집들이 없고, 백숙집들이 없고, 횟집들이 없고, 모텔들도 없다. 빠스랑거리며 소리를 내는 것들이 없다. 구운 오징어, 삶은 감자와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는 호수 너머 화진포해수욕장 백사장 가에 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화진포에 가는 건 화진포 때문이다. 화진포가 아닌 이유로 화진포에 가게 될 것들이 화진포에 들어서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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