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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Sep 24. 2022

격앙의 흔적, 진정의 모습 : 홍천강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자욱한 안개가 낀 듯 어둑하다. 먹구름은 아니라서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은데, 사방이 낮고, 불투명하고, 희미하다. 시정이 확보되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남산도 모호함에 쌓여 있다. 실체와 전망이 안 보이는 날이다.


오후 한 나절의 틈이 났다. 홍천강은 이럴 때 라이딩하기에 적당하다. 집에서 멀지 않고, 산들을 감도는 강의 율동과 품이 넓은 계곡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고, 그 강에 잇대어 난 조용한 길을 달릴 수 있다. 오늘 같은 평일 오후에는 깊은 묵상 같은 라이딩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출발 전에 가야 할 길들을 떠올려 본다. 홍천강 길들은 도로번호도 없는 작은 길들이다. 교차로, 분기점의 도로표지판도 확실치 않다. 이럴 땐 지형과 지리의 랜드마크를 따라가며 라이딩을 하게 된다. 홍천강에는 인공의 랜드마크가 없으니 자연히 생겨난 오래된 마을들을 마음속 이정표로 삼아 연결해본다. 도로체계와 표지판에 의지할 수 없을 때, 마음속 여정의 이미지는 라이딩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


‘6번 국도와 44번 국도를 타고 홍천읍으로 간다. 홍천읍에서 5번 국도를 춘천 방향으로 타고 상화계리까지 간다. 상화계리에서 도사곡길을 찾아 소매곡리로 가서 홍천강을 만난다. 거기서부터는 도사곡, 굴지리, 장항리, 남노일, 노일리, 팔봉산, 반곡, 모곡까지 강가의 마을들을 따라간다. 모곡에서 청평호를 만나면 홍천강이 끝난다.’


덕소, 팔당, 양수리를 지나는 동안 날은 여전히 흐리다. 가을에 들어섰지만, 아직 어린 가을의 기운으로는 길고 드셌던 장마의 뒤끝을 걷어내기 버거운 듯하다.


양평을 지나칠 때 파란색 포터 트럭 한 대가 급하게 따라와 바짝 붙는다. 신경 쓰지 않고 5단 3,000 rpm을 유지한다. 트럭이 떨어지지도 않고, 지나가지도 않는다. 한동안 그렇게 달린다. 슬슬 부아가 치밀고,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속도를 슬쩍 올렸더니 트럭이 신경질적인 움직임으로 옆을 스치며 치고 나간다. 밸이 꿈틀하고 관자놀이가 울끈한다. 반사적으로 쓰로틀을 틀어쥔다. RPM이 솟구칠 때 기어를 6단으로 올린다. 3천, 4천, 5천, 6천까지 RPM이 오른다. 트럭이 까맣게 멀어진다.


한동안 달린다. 백미러에서 트럭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뜨겁고 맹렬하게 계속 달린다. 홍천이 가까운 상오안에 이르러서 두려움과 한계가 느껴진다. 쓰로틀을 풀고, 기어를 5단으로 낮춘다. 모터사이클이 잠잠해진다. 호흡과 심장이 잦아들고, 뒤틀렸던 밸과 심사도 풀어진다. 한계를 만나면 분노는 제풀에 죽고, 두려움의 위축이 터질 듯한 분노를 진정시킨다.


상화계리에 이르러 홍천강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길을 찾는 동안 작은 긴장, 집중, 불안, 혼란이 뒤채인다. 모터사이클 속도를 늦추어 달리면서 길 주변을 살핀다. ‘홍천강’ 표지는 찾을 수 없다. 조금 더 가본다. 회전교차로 옆에 ‘도사곡길’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찾았다! 도사곡길로 군부대가 있는 마을을 통과한다. 곧 나와야 할 소매곡리는 보이지 않고, 앞에 작은 언덕이 막아선다. 맞나? 언덕을 넘어 가본다. 길이 산자락을 돌아내려간다. 이 아래 강이 나올까? 내리막길이 다 끝나가는 지점에서 일자로 펼쳐진 홍천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맞게 왔다! 소매곡이다. 이제 홍천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소매곡은 매화 골짜기 작은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소담하다. 마을 앞으로 홍천강이 잔잔하게 흐른다. 강 양쪽 뒤로는 건장한 산들이 든든히 서있다. 강가 낮은 둔덕에 집들과 펜션들이 자리하고, 그 자리는 집들의 오랜 제자리인 것처럼 보인다. 지난여름 장마에 거칠었을 강은 지금 차분하게 흐르고, 강가의 집들은 별 탈이 없어 보인다.


소매곡교를 건너자 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언덕으로 이어진다. 언덕에 올라서니 높은 평탄 지대가 펼쳐지고 일순간에 풍경의 스케일이 전환된다. 평탄면 가장자리를 따라 일자로 난 길을 천천히 달린다. 길 건너편으로 물결치듯 달려 나가는 높은 산 봉우리들과 그 산 아래 아득한 골짜기를 흐르는 홍천강이 장대하다.


기세 높은 조망과 함께 강가 낭떠러지 길을 잠시 달린다. 강이 크게 휘돌아나가는 정점에 타워처럼 우뚝한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도사곡 천냥바위다. 이야기에 따르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친구에게 천냥을 빌렸다가 갚을 형편이 못되어 뛰어내리려고 했던 바위다. 친구는 사정을 알고 천냥을 받지 않기로 했고, 돈을 빌린 사람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곳이다. 도사곡이 골짜기의 모래땅인 것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이곳에 사는 일은 죽는 일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 했고, 살고 싶었을 것이다.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동안 누군가의 선의와 후의를 눈물겹게 소원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운 어려움과 눈물이 어린 간절함이 예전 도사곡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그쳐지면 좋겠다.


천냥바위를 돌아 내려가니 지대가 낮아진다. 굴지리로 좌회전한다. 굴지리는 강에 붙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을 지나자마자 길이 강가로 바짝 다가선다. 강이 긴 원근법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강에 붙은 길에서는 속도를 낼 수 없고, 속도를 내려면 강에 올 일도 아니니 그저 천천히 달린다.


장항리로 넘어가는 커브길에서 장마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강바닥의 풀과 강 둔덕의 작은 버드나무들은 물이 쓸고 간 방향대로 누웠다. 강변과 낮은 산자락의 보다 큰 나무들은 뿌리가 뽑히고 가지가 찢어지고 줄기가 부러졌다. 산자락의 꽤 높은 곳 나무 허리에는 농사용 비닐과 부러진 스티로폼들이 걸려있다. 건설 중이던 작은 다리 하나는 상판이 쓸려나간 채 H빔 교각만 남았다. 느긋하고 순하게 흐르는 이 강도 격앙되면 사납고 난폭해질 수 있다는 이치가 상한 나무들과 떠내려간 다리에 분명하다.


노일리로 넘어가는 큰 다리 중간에서 시동을 유지한 채 잠시 멈춘다. 위안터교다. 해가 나기 시작한다. 다리 아래로 홍천강이 넓고 곧은 형세로 흘러가고, 강과 다리는 커다란 열십자 모양으로 교차한다. 높은 다리 위에서 곧게 흘러가는 긴 강을 거칠 것 없이 조망한다. 마음에도 거침이 없다.


노일리에서 홍천강은 큰 강의 면모를 보인다. 묵직한 압도미와 치명적인 위험을 동시에 드러낸다. 강물은 넓고 깊으며, 강가의 모래밭과 자갈밭도 넓고 깨끗하다. 사람이 사는 이편 강마을의 지대도 넉넉한 편이다. 강 저편에서는 경사 급한 산자락이 강 위로 곧장 떨어져 내리고, 긴 급경사 바위벽은 물 위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면서 큰 강에 압도 미를 더한다. 검푸른 큰 강이 보이는 묵묵한 위엄 미의 이면이 그만큼 날카로운 위험인 것은 피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다. 건너편 강가 바위벽에는 ‘수영금지’, ‘사망사고 일어난 곳’을 경고하는 현수막들이 압도적인 위치들마다 붙어 있다. 재작년 늦여름 어느 날에는 소방대원들이 이 강에서 실종자 수색을 하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아름다운 것과 치명적인 것이 한 가지라는 말을 여기서 몸으로 체험한다.


어유포리 회전교차로에서 좌회전해서 79번 지방도 김유정로에 올라선다. 느닷없이, 개벽하듯 팔봉산이 나타난다. 수평의 대지, 산을 응시하며 곧게 뻗은 도로의 전경 너머에 좌우로 나란히 이어진 뫼 산자 암봉들을 가진 바위산이 비현실의 감각으로 우뚝하다. 공간감과 시간감을 놓친 채 산 쪽으로 달린다. 한 순간 달렸을까, 영원히 달렸을까. 산 밑에 닿았다. 강이 산그늘 아래를 힘이 넘치는 여울의 모습으로 흘러간다. 강폭이 좁아져 물살이 빠르고, 빨라진 물살이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로 부서지는 강의 소리에서는 생동이 느껴진다. 동네 이름 ‘물고기가 뛰노는 냇가’는 자연에 직결해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이 몸으로 얻은 것으로 보인다. 327미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수평의 대지에 수직으로 선 암벽과 암봉은 경외심을 일으키고, 산을 휘도는 기운찬 강은 생명의 기운을 일깨운다. 인근의 주민들은 지금도 소원을 담아 일 년에 두 번 팔봉산에 제를 지낸다.


동북쪽에서 흘러 들어올 때 속도를 높였던 강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면서 다시 강폭을 넓히고 속도를 늦춘다. 강과 더불어 호흡과 근육도 편안해진다. 팔봉산 남서면 강가의 자갈밭과 모래밭에 눈길이 간다. 개인 하늘 아래 햇빛을 받으며 처음인 것처럼 희고 깨끗하다. 산에서 갓 떨어져 나온 데다 그나마의 물때도 지난 장마 물에 씻겨 나갔을 것이다.


반곡리에서 홍천강은 완연한 하류의 모습이다. 강폭이 크게 넓어지고, 넓어진 품에서 물이 천천히 흐른다. 흐름이 완만하니 강바닥에는 모래밭이 넓다. 풀들이 자라는 모래밭의 연한 곳들을 골라 흐르면서 강물이 갈라지고 합쳐져 강의 가지들이 퍼져나간다. 반곡교 밑에서 홍천강은 또 다른 작은 강들의 생성과 결합과 분리를 품고 하나의 강으로 흐른다. 어른 강의 모습으로 마땅하다.


반곡 면소재지에서 강변길을 벗어나 산길을 달린다. 반곡에서 모곡까지 강변길로 달리면 좋겠는데, 이 구간에는 강변에 길이 없다. 개야리를 지날 때 멀리서 각이 살아있는 뾰족한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모곡 숫산이다. 모곡이 가까워지면서 길이 다시 강가에 붙는다. 폭이 넓은 강에 짙푸른 물이 가득하다. 유장하게 흐른다. 강을 따라 달리는 동안 강의 느낌에 모터사이클의 속도를 맞춰본다. 숫산 앞에서 강이 오른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양편의 산들이 더욱 멀어지고, 강도 더욱 넓고 느릿해진다. 모터사이클로 달릴 수 있는 홍천강 길이 끝나간다. 청평호에 합쳐지면 홍천강도 곧 끝난다. 모터사이클의 속도를 더 낮춰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간다. 오늘의 라이딩은 즐겁지만은 않았다. 상화계의 긴장, 불안, 혼란, 소매곡의 안도와 무탈, 도사곡의 기세, 압도, 고난과 간절함, 장항리와 노일리의 압도성, 폭력성, 치명성, 어유포의 경외와 생동, 반곡의 큰 것과 작은 것들의 역동, 내 안의 어두움, 분노, 두려움과 한계가 내 안의 모곡 홍천강으로 감당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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