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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Oct 14. 2022

첫가을에 해보는 생각 : '별그리다'

한나절 시간이 났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갔다가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오면 된다. 갈만한 장소들이 떠오른다. ‘춘천, 홍천, 횡성, 원주 정도는 무리 없이 왕복할 수 있다. 빠듯하지만, 홍천강을 따라 달리는 것도 가능하다. 퇴촌과 분원리는 여유 있게 한 바퀴 돌 수 있다.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청평에서 돌아오는 건 적당하다. 방향을 바꿔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엘 가볼까.’ 계획에 없던 시간 앞에서 욕망과 생각이 잠시 두서없다.


한동안 힘들었다. 차갑고, 미끌거리고, 뾰족하고, 낮고, 무겁고, 어두운 감정과 함께 몇주를 보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건 아니다. 은근한 냉소, 비아냥, 시기, 낙담, 우울, 비관의 축축한 안갯속에 잠겨 지냈다. 냉소, 비아냥, 시기는 주변의 못마땅한 행동들을 향했고, 낙담, 우울, 비관은 소중한 것들의 아직 닥치지 않은 불행에서 비롯되었다.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는 감정들이겠지만, 품고 있으면 힘이 많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힘든 동안, 내색을 크게 하지 않은 게 그마나 다행이다.


“별그리다”로 가기로 한다. 그곳은 거리가 100km 남짓하고, 호젓한 산길과 한가로운 들길로 갈 수 있고, 가는 길이 몸에 익어서 가뜩이나 힘들고 복잡한 심사에 길 찾는 초조함을 더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가 고요와 정적 속에 누워있기도 하니, 가서 마음을 정돈하고 오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시월 초인데 날씨가 쌀쌀하다. 점심이 가까웠지만, 기온이 크게 오르지 않는다. 내피가 달린 가을 재킷을 입었다가 벗는다. 아직은 둔하다. 통기와 발수가 되는 셔츠 위에 여름용 메쉬 재킷을 입는다. 추위를 대비해 방수 방풍이 되는 윈드 브레이커를 슬링백에 챙겨 넣는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 강변북로를 달린다. 밝은 해가 나는데도 한기가 든다. 6번 국도를 만나기 위해 삼패사거리로 향하는 동안 한기가 심해진다. 삼패사거리부터는 교외 국도를 달려야 하니 추위가 더해질 것 같다. 삼패사거리 직전 아웃렛 단지 주차장에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윈드브레이커를 꺼내 입는다.


덕소 고가차도를 달린다. 시선의 끝에 예봉산과 검단산이 걸린다. 왼쪽에서 흘러내리는 예봉산 줄기, 오른쪽에서 흘러 내려온 검단산 줄기가 이루는 둔각의 V자 모양에서 힘과 여유로운 기백이 느껴진다. 동쪽으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을 굽어보는 자연 성채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팔당 1, 2, 3, 4 터널을 연달아 지나고, 마지막으로 봉안터널을 통과한다. 터널 안에서 어둡게 조여졌던 시야가 밝고 시원하게 열린다. 새로운 세상이 처음 열리는 듯하다. 넓게 열린 새 세상 한가운데로 일직선 도로가 뻗어나가고, 그 도로를 따라간 시선 아득한 끝에 삼각형 산봉우리 하나가 화살촉 모양으로 선명하다. 그 산봉우리는 도로의 중앙선에 정확하게 정렬되어 있다. 터널들 저편의 세상과 단절한 이편의 세상이 지향하는 푯대 같다. 양평 백운봉이다. 산세가 날카로워서 양평의 마테호른이라고도 불리는 봉우리다.


양수리는 의미심장한 곳으로 느껴진다. 가까운 서울과는 검단산, 예봉산, 예빈산, 운길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삼각형 모양으로 합수한다. 사철 넉넉하고 그득한 물의 세상을 이룬다. 검단산 예봉산 저편 서울은 분주하고 소란한데, 이편의 양수리는 조용하고 차분하고 고요하다. 다른 세상 양수리에서 보는 검단산 예봉산은 서울 관문을 지키는 성채가 아니라 양수리의 고요와 아름다움을 지키는 든든한 성벽으로 느껴진다. 예빈산 끝자락을 통과하는 다섯 개의 터널은 성벽의 암문으로 보인다. 막힌 서쪽을 뒤로하고 동쪽으로 열린 세상의 가운데로 남한강과 6번 국도가 동남쪽으로 달리고, 달리는 방향의 끝에 표상처럼 백운봉이 서있다.


양수리 끝 용담대교에 올라선다. 다리가 강 위에 떠 있어서 달리는 오른쪽이 바로 물이다. 바람이 없어 강은 고요한 호수의 모습이다. 강 위로 오후 1시의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고 있다. 직하한 빛이 수면에 부딪쳐 부서진다. 부서진 빛의 가루가 온 강에 가득하다. 지금 남한강은 물의 강이 아니라 찬란함 가득한 빛의 강이다.


양평, 용문을 경쾌한 속도로 통과한다. 봉상리 삼가교차로에 도착한다. 양동 방향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해서 345번 지방도 양동로로 들어간다. 지금부터는 왕복 2차선 산길이다. 적당한 와인딩과 업다운이 이어지는 한적한 길을 달린다. 도로의 리듬과 결대로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얕게 모터사이클을 눕히고 일으킨다. 마음속에도 율동이 살아난다. 느슨하지만 탄력 있는 긴장으로 몸, 감정, 의식이 선명해진다.


산그늘 진 계곡 길을 달린다. 소나무 가로수가 선 콩밭, 들깨밭, 고구마밭 들길을 통과한다. 사슴목장을 지나고, 더스타 휴 골프장도 지나서 인적이 없는 큰 고개 하나를 넘는다. 벼가 익어가는 넓지 않은 논 사이로 난 들길을 달려서 다시 작은 고개 두 개를 넘는다. 몸이 많이 식었다.


양동을 지난다. 면소재지 초입의 작은 사과밭에 사과들이 빨갛다. 카드보드지에 매직으로 쓴 ‘사과 팝니다’ 팻말이 서있다.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큰돈을 보고 하는 사과밭은 아닌 듯하다. 사과밭을 지나 천변 우회도로로 들어선다. 개울 물이 맑아 옅은 옥색이 돈다. 둑에 지천인 개망초꽃은 많이 말랐다. 달맞이꽃은 연겨자 색으로 바래가고 있지만 아직 물기가 남은 것 같다. 애기똥풀은 선명한 샛노랑이 그대로다. 쑥부쟁이는 진초록 줄기와 잎, 연보랏빛 도는 꽃으로 지금이 다소곳한 절정이다.


양동 동쪽 끝 단석교차로에서 88번 지방도를 잠깐 탄 뒤, ‘별그리다’로 가는 시골길로 들어선다. 도로 번호는 없고 윗배내길이라는 이름만 있는 길인데, 이 길을 거쳐 ‘별그리다’로 가는 사람들은 도로번호나 이름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몸에 새겨진 기억을 따라 저절로 간다. 길 옆 논에 한창 익어가는 벼가 노랗고, 부는 듯 아닌 듯한 바람이 매끈하고 부드러운 물결로 벼를 쓸어간다.


‘별그리다’에 정적이 가득하다. 귓속에서 낮은 찌르레기 소리가 난다. 정적 속으로 시월의 순한 햇볕이 내린다. 아버지 무덤 상석 앞에 앉아 눈을 감는다. 몸 안으로 햇볕이 스민다. 산그늘과 계곡길을 지나는 동안 식었던 몸에 온기가 돈다. 햇볕이 몸에 스며 안에서부터 온기가 번져 나온다.


아버지는 단순하고 유순했다. 허례가 없고, 허세가 없었다. 거친 말과 행동이 없었지만, 그만큼 무르고 눈물이 많았다. 말이 많지 않았는데,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다. “급할 거 없다, 천천히 해라”, “해주구 말구지”, “곱게 다녀와라”, “술도 음식이지만, 많이 먹으면 탈 난다”. 기억에 남은 생전의 말들은 아버지의 모습과 행동을 닮았다. 모습이나 행동을 비석에 새길 수 없어 아버지의 말 하나를 새겼다. “급할 거 없다, 찬찬히 해라.” 아버지의 손주들이 마음에 들일까 싶어 새긴 말이다. 천천히는 찬찬히로 바꿨다. 말 하나를 새 검은 돌이 가을빛 속에 빛난다.


아버지보다 고단하게 살진 않았지만, 아버지보다 거칠게 부딪치며 살았다. 아버지처럼 무른 본성이지만, 아버지보다 대결적으로 살았다. 아버지처럼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생각으로 살다. 아버지는 허례를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보다는 돈을 쓰고 살았다. 아버지는 허세가 없었지만, 철이 없어서는 폼나고 멋지게 살려고 했다. 아버지는 종종 눈물을 비췄지만, 이제껏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없다. 그러는 동안, 냉소, 비아냥, 시기, 낙담, 우울, 비관이 몸에 쌓였다. 화, 분노, 욕망, 욕심, 집착, 조바심도 뱄다.


‘별그리다’에 가을이 든다. 공원 내 도로 벚나무들에는 낱잎 낱잎으로 빨간 단풍이 드는 중이다. 무덤 가 주목에는 투명한 빨강으로 열매가 익어간다. 공원 입구 느티나무 숲에는 일제히 노란 단풍이 들고 있다. 순한 햇볕이 내린다. ‘별그리다’의 가을은 지금부터일 것 같다. 대기는 가볍고 서늘해지고, 나뭇잎은 투명하고 얇아지고, 정적과 고요는 더 어질 것이다. ‘별그리다’에서 여름의 거침없음과 가을의 순함, 여름의 두터움과 가을의 성김, 여름의 내지름과 가을의 스며듬을 생각해본다. 눈물이 힘이 있는 것인지도 생각해본다.


‘별그리다’의 다른 이름은 양평공원이다. 강원도가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강원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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