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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Sep 03. 2022

마지막 여름의 아름다운 순간들 : 아홉사리고개와 구룡령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아름답다’는 말을 할 때 주저하게 된다. 다 큰 어른이 아름답다는 말을 하면 좀 이상하다는 걸 안다. 나이브하고 대책 없는 사람인가 싶다. 무책임과 무능의 뉘앙스도 설핏 섞인다.


세상이 쨍한 빛을 내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세상은 다른 모든 세상을 흐릿하게 배경 처리한다. 흐릿한 배경 속에서 쨍한 순간과 장면은 분명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출근을 할 때, 일을 할 때, 아이들을 볼 때, 대수롭지 않게 찾아든 일상의 그 순간이 각인하는 감각과 느낌과 기억은 오래간다. 오래도록 선명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창 밖으로 남산이 가까워 보인다. 아침 해를 받아 밝고 또렷하다. 짙푸름이 바래 간다. 성숙한 짙푸름 위로 희미한 노란색이 그런 듯 아닌 듯 어른거린다. 기름한 산허리를 뒤에 두고 신라호텔의 밝은 고동색이 수직으로 섰다. 집 앞 길가의 은행나무는 움직임이 없다. 여름이 마저 간다.


장비를 챙기면서 갈 길을 짚어본다. 오늘은 셋이 간다. 친구들이자 이따금씩의 라이딩 버디들이다. 용마터널 앞에서 한 명을 만나고, 팔당에서 한 명을 만난다. 6번과 44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홍천 화양강휴게소까지 내쳐 달린다. 철정교차로에서 451번 지방도로 길을 바꿔 아홉사리고개를 넘는다. 상남에서 446번 지방도 내린천로를 따라 원당삼거리까지 간다. 56번 국도로 구룡령을 넘어 양양에 닿으면, 7번 국도를 달려 강릉으로 내려간다. 강릉에서 456번 지방도로 대관령을 넘고, 월정삼거리에서 6번 국도를 만나면 그 길로 서울까지 돌아온다. 500여 km의 여정이다.


용마터널을 거쳐 강변북로를 지난다. 미음나루 쪽 한강 수면에 햇빛이 부서진다. 강이 빛으로 가득하다. 자글자글 끓는다. 수만 마리 피라미들이 튀는 것도 같다. 생명의 소란함으로 가득하다. 덕소를 지나 팔당에 이르는 동안 강의 소란함이 잦아들어 고요해진다.


셋이 막힘없는 국도를 달린다. 거침없다. 혼자 달릴 때보다 20km 이상 빠르다. 불안이나 부담감은 없다. 달리는 동안 감각, 감정, 생각, 조작이 모두 말끔하다.


화양강휴게소에서 쉰다. 눈이 하늘을 향한다. 창공이 시야에 가득 찬다. 창공 아래로 청벽산과 곤봉을 이어 흘러가는 산 능선이 검푸르게 펼쳐진다. 휴게소 앞으로 홍천강이 큰 반원의 호를 그리며 돌아 나간다. 강도 창공처럼 파랗다. 멀리 파란 하늘 밑 검푸른 산 능선, 가까이 파랗게 돌아나가는 강, 그 사이 둥근 터에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마을 길에는 푸른 가로수가 줄 지어 섰다. 장욱진의 나무처럼 선선하고 다정하다.


451번 지방도 아홉사리로에 들어선다. 경사가 급해진다. 잣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한 산들이 양쪽에서 급하게 조여들어 깊은 V자 계곡을 만든다. 계곡의 가장 낮은 지점들을 골라 물이 흐른다. 물이 맑다. 물 옆의 길은 물이 흘러오는 방향으로 경사를 이루며 상류로 향한다. 사방의 산들이 더욱 높아지고, 높아진 산들만큼 산 아래 길의 깊이감도 심원해진다. 한 채씩의 집들은 길보다 서너 길 아래 물가 둔덕에 자리 잡았다.


답풍리에 들어서자 지대가 넓어진다. 급하게 흐르던 계곡물이 평평한 땅을 만나 느슨하게 흐른다. 개울가 뽕나무와 버드나무 잎들의 윤택함이 옅어진다. 비탈밭의 고추는 이미 빨강이고, 들깻잎은 투명한 노랑이다. 김장철을 염두에 두었을 배추와 무는 아직 어리고 푸르게 자라는 중이다. 담장 앞에 해바라기가 샛노랗다.  


내촌면 소재지를 지난다. 사방이 높은 고개고, 고개 뒤편으로는 더 높은 산이다. 이곳에 닿는 길은 산간 마을들을 잇는 451번 지방도와 408번 지방도뿐이다. 이 도로들을 따라가도 닿는 곳은 화촌과 두촌이다. 오목하고 편평한 땅에 터를 잡은 내촌은 고립적이고 독립적인 마을이다. 마을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이정섭 목수의 내촌목공소가 있다고 들었다. 가보고 싶은데, 가보지 못했다. 길이 멀어서가 아니다. 내촌목공소의 가구 값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오늘도 그냥 지나간다.


아홉사리고개를 올라간다. 부드러운 와인딩이 이어진다. 좌우에는 잣나무와 소나무 산이고, 인적은 없다. 차로를 막고 포클레인이 소나무 산자락을 파낸다. 장마 뒷감당일 것이다. 송진향 섞인 흙냄새가 육향으로 달려든다. 싱싱하고 낮고 저돌적이다. 고개 정상에 올라선다. 소공원 자작나무 숲에서 작은 이파리들이 바람을 맞으며 떤다. 저돌적 육향이 종적 없이 사라진다.


상남에서부터 446번 지방도 내린천로를 달린다. 긴 장마에 격하고 탁했던 내린천이 차분하고 맑게 진정되었다. 바람이 선선하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정오의 나무 그늘이 드리운다. 물그림자 같은 그늘이다. 가벼운 회색 사이로 맑은 빛이 어른거린다. 물그림자 나무 그늘의 길을 달린 뒤 친구들에게 말했다. ‘여기를 지날 때 나는 기쁨에 복받친다’.


구룡령을 올라간다. 경사도 있고 와인딩도 센 편이지만, 헤어핀 턴이 없다. 친구들은 코너마다 모터사이클을 크게 눕히며 속도를 지킨다. 돌아들어간 탄력과 각대로 코너를 돌아나간다. 부드럽게 눕고 부드럽게 일어선다. 일렁이는 강물처럼, 바람에 쓸리우는 미루나무처럼 유려한 율동감으로 길을 탄다.  오른쪽 벼랑 가에서 은사시나무 잎끝이 노랗게 말려들고 있다.


양양 서피비치에서 모터사이클을 멈춘다. 파도가 치는 바다까지 걷는다. 하늘은 순전한 파랑이다. 파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까운 바다는 옥색이고, 먼바다는 감청색이다. 순수한 파랑과 순수한 감청의 중간을 안개 실 같은 수평선이 날카롭게 일직선으로 가르고, 그것으로 하늘과 바다가 나뉜다. 무한한 색채 평면에 웅웅 거리는 정적이 가득하다.


7번 국도를 바다와 나란히 달려 강릉으로 간다. 456번 지방도를 타고 대관령으로 향한다. 대관령 그늘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든다. 대관령이 높은 위치에서 긴 한일자 모습으로 버티고 섰다. 뫼 산자를 일부러 찾아보지만 찾을 수 없다. 강릉에서 보는 대관령은 바다 앞에 선 거대한 벽의 모습이다. 대관령 아래서 대관령이 고원 평탄면임을 눈으로 확인한다.


대관령 정상에서 시동을 끈다. 동해가 광대하다. 검푸른 바다에서 하얗게 해무가 오른다. 대관령 아래 바닷가에서 늦은 오후의 해를 받는 강릉이 안온해 보인다. 북쪽으로 경포대 남쪽으로 강릉비행장 활주로가 선명하고, 호수와 비행장 사이에서 시가지 건물들이 하얗게 빛난다. 바람이 거세다. 선선함이 선득함으로, 선득함이 한기로 바뀐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다. 아직 여름이지만, 태백산맥 산악 지대에서는 더 빨리 어두워지고 더 빨리 추워진다.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친구들과 윈드브레이커를 꺼내 입고 멈추지 않고 달리기로 한다.


진부, 용평, 장평, 봉평, 둔내 산간 마을들을 지나는 동안 날이 저문다. 둔내에서 횡성으로 내려서는 황재를 지난다. 서쪽 먼 산마루주홍빛 태양이 선연하다. 산 능선에도 능선의 모양대로 주황 빛무리  막이 씌웠다.


풍수원성당을 지난다. 해가 모두 지고, 검은 아스팔트 길을 세 대의 모터사이클이 헤드라이트를 쏘며 달린다. 그뿐이다. 앞에도, 뒤에도 차가 없다. 캄캄한 허공에 검은 산과 검은 나무들이 실루엣으로 걸렸다. 검은 실루엣의 집들에 네모의 노란 불빛 패치가 달렸다. 외롭고 고독하다. 어두워서 우주가 내 몸 주변만큼 작아졌다. 작아진 공간 안에 자아가 가득하다. 어둠 속을 나와 함께 달린다. 포근하고 아늑하다. 내 안에 텅 빈 우주가 들어찬 것 같기도 하다.


밤이 늦어 집에 도착했다. 한 친구의 메시지가 와있다.

“집 도착, 원더풀 투데이!”

또 한 친구의 메시지도 와있다.

“즐거웠고 고마웠다! 오자마자 뜨거운 물에 몸 담갔다! 명란젓갈 잘 먹겠다.”

답을 보냈다.

“나도 도착, 복에 겨운 하루였다!”


다 큰 어른이 변명은 구차하지만, 오늘 세 명의 라이더가 그렇게 철없지는 않다. 일할 때 일하고, 일 안 할 때는 집안일 건사하고, 짬이 나면 모터사이클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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