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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Aug 09. 2022

먼 곳들의 아름다움 : 정선과 동강 (2)

산길이라 견디기 힘들진 않았어도, 한여름에 네 시간을 쉼 없이 달렸다. 집중하느라 눈과 머리가 뻑뻑하다. 관절과 근육도 굳었다. 읍내 상유재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600년 된 고택이다. 한옥 스테이도 하고, 한켠에 카페도 있다. 정선에서 하룻밤 묶거나, 커피를 마실 때 들르곤 한다. 잘 안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열기를 뺀다.


상유재는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몇 년 전 라이딩을 와서 카페를 찾다가 하늘을 가득 메운 커다란 나무 두 그루를 보게 되었다. 읍내 한복판에 수백 년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느티나무인가 팽나무인가 하면서 가보니 뽕나무였다. 수령 600년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고택이 처음 자리 잡을 때 함께 심은 뽕나무고, 상유재라는 고택 이름을 갖게 한 나무였다. 나이뿐 아니라 생김도 듬직하고 품격이 높았다. 뽕나무 앞으로 작은 한옥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가 보니 담을 따라 소박한 정원이 있고, 정원을 따라가니 사랑채 마당과 대문 사이에 카페가 있었다. 그때부터 정선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하룻밤을 묶게 되면 상유재를 찾고 있다. 숙박도, 커피도 상유재 안주인이 직접 챙긴다. 지금 안주인은 상유재 집안의 20대 며느리고, 상유재 집안은 터를 잡은 후 20대 600년 동안 한 번도 이 터를 남에게 넘기지 않고 간수했다. 뽕나무가 600살이 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몸의 열기가 식어 마당으로 나선다. 흙마당 주변으로 기와 담장이 둘러 섰다. 담장을 따라 가꾼 듯 아닌 듯 여름 꽃들이 피었다. 띠엄띠엄 고욤나무 주목 목련 복숭아나무가 서있다. 처음인 듯 새로 보이는 나무 네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전에도 있었겠지만 놓쳤던 듯하다. 뭔가 좀 이상하다. 키는 내 키보다도 큰데, 생김은 회양목과 흡사하다. 안주인에게 물어보니 회양목이 맞고, 뽕나무와 나이가 같다고 한다. 나보다 큰 회양목에 600살 넘은 회양목은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다. 이 회양목들이 뽕나무와 함께 상유재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뽕나무가 올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전문가들이 왔었고, 그때 회양목도 보고 가면서 가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하며 안주인은 20대째 자신까지는 이 집을 유지해왔는데, 지금 외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 중 누구라도 정선 집으로 돌아올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근로복지공단정선병원 앞에서 동강으로 들어선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조양강이다. 조양강은 여량의 아우라지부터 조양강과 지장천이 합수해서 그야말로 동강이 시작되는 가수리까지 구간이다. 시멘트 포장의 조양강변 둑길인 세대길을 따라 강과 함께 10여 km를 내려간다. 장마 뒤라 흐름이 빠르고 여울에서 흰 물살이 부서진다. 물이 느린 강변을 백로와 왜가리가 슬로우 모션으로 걷고 있다. 재작년 봄에 이 길에서 강변 가득 샛노란 유럽나도냉이꽃에 정신을 잃었었다. 지금은 팔월 초라 냉이꽃은 없고, 길가에 심은 댑싸리들이 하룻강아지 모습으로 크고 있다.


용탄대교에서 급하게 270도 턴을 해서 424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가리왕산로다. 바로 앞에 솔치, 솔고개가 있다. 길 옆이 전부 소나무 숲이다. 도로는 소나무 숲 사이를 오솔길처럼 지나간다. 노견도 없고, 가드레일도 없다. 소나무와 소나무의 넓은 사이들을 골라 이어 구불구불 나간다. 솔치에 들어서면서 헬멧의 쉴드를 열었다. 옅은 솔향을 깊은 호흡으로 느낀다.


용탄리 동강탐방안내소를 지나 동강로에 들어선다. 지금부터 길은 동강 왼쪽 산자락을 따라 강 위를 달리듯이 20여 km를 강 따라 내려간다. 잠깐 달려 동강길 첫 번째 마을인 귤암리에 이른다. 요즘에는 동강할미꽃마을이라고도 한다. 강 건너에 장대한 암봉들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치솟고 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검은 바위 연봉들 산마루에 한여름 나무들이 푸르다. 그 아래를 장마 뒤 넓은 강이 싯푸르게 흘러간다. 강 이쪽 귤암리 마을 산비얄 콩밭도 싯푸르다. 동강 귤암리는 지금 온통 검푸르고 싯푸른 기운으로 가득하다.


10여분 달려 가수리에서 멈춘다. 조양강과 지장천이 합수하는 동네다. 여기부터 동강이 온전히 동강으로 흐른다. 합수부라 강도 넓고, 마을도 동강길 세 마을들 중 가장 크다. 마을 입구 언덕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밑동의 둘레가 서너 사람이 함께 안아야 할 정도로 거대하다. 그 거대한 밑동이 굵은 두 줄기로 갈라지면서 뻗어 올라 가지들을 넓게 펼친다. 펼쳐진 가지들에서 잔 가지들이 퍼져나가고, 잔 가지들마다 빼곡한 푸른 잎들이 하늘을 가린다. 수령이 570년이다. 그 나무 아래서 동강을 보며 쉰다.


오늘 가수리에서 멈춘 건 느티나무 말고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기 때문이다. 마을 왼쪽 바위 언덕에 동강을 보고 제비집처럼 들어앉은 집 한 채가 있다. 동강로를 지날 때면 저절로 눈길이 가는 집이다. 집을 둘러본다. 10여 평 되는 작고 초라한 집이고, 손길이 닿지 않은지 오래된 집이다. 그렇지만 치명적으로 매혹적이다. 단단하고 높은 바위 언덕 위 집터에 서니 동강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지장천과 만난 힘찬 물소리가 음향 좋은 음악당에서처럼 손실 없는 실음으로 들린다. 집 뒤 산 중턱에는 줄기가 붉은, 크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우뚝하다. 마을 어귀를 내려다보니 그 거대하고, 잘생기고, 신령스러운 느티나무가 내 집 마당의 나무처럼 서있다.


욕심이 나는 걸 어쩌지 못한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는 할머니에게 물어본다. 절망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서울 사람들은 저런 게 좋은가보다. 보는 사람마다 묻는다. 50년 전부터 경로당으로 쓰던 집인데, 신식 경로당이 생긴 뒤로는 쓰지 않는다. 땅은 영월 유씨 집안 누군가의 소유다. 공무원이라고 한다. 집은 서울 사람 누군가의 소유라고 하는데, 누군지는 잘 모른다. 일전에 서울 사람이 이 집을 사고 싶어서 물어 물어 그 영월 유씨를 찾아갔는데 팔 생각이 없다고 했단다. 땅 가진 사람이 땅을 안 판다지, 집 가진 사람도 집을 안 팔 테지, 복잡해서 저 집 사는 건 될 일이 아니다.’ 부동산을 모르는 눈에도 좋아 보이는데, 될 일 같았으면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벌써 차지하고 앉아 쓸고 닦으며 돌봐왔겠지 싶다. 남도 차지하지 못하는 사정이니 내 차지가 되지 못하는 것에 큰 원통함이 없다.  


가수리를 지나니 시멘트 포장길이 더욱 좁아진다. 왕복 1차선으로 자동차 교행이 불가능한 외길이다. 양편으로 풀과 버드나무 가지들이 무성한 외길로 10여분을 더 내려간다. 점심때가 지났다. 배가 고프다. 강 건너편으로 칼로 내리쳐 자른 듯 매끈한 병풍바위 절벽을 마주 보는 펜션 음식점이 보인다. 엄나무 닭백숙, 옻나무 닭백숙, 메기 매운탕, 쏘가리 회, 쏘가리 매운탕, 빠가사리 매운탕, 퉁가리 매운탕이 메뉴다. 혼자 주문할 수 없는 메뉴들이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용기를 낸다. 간단한 식사도 있는지 물어보니 ‘원래는 안 되는 건데, 된장찌개 먹겠으면 해 주겠다’고 한다. 다행이다.


야외 평상에 걸터앉아 강 건너 병풍절벽에 마음을 뺏긴다. 검고 높은 바위 절벽이 상류 쪽은 높고 하류 쪽은 낮은 빗변 삼각형 모양이다. 삼각형의 빗변을 따라 나무들이 짧은 갈기 모양으로 푸르게 늘어섰다. 바위면은 잘라낸 듯 단차 없는 평면이고, 그 평면이 강 위에 세운 성벽 같이 수직으로 섰다. 장엄하다. 산세의 기운과 규모가 반드시 이름을 가졌을 것 같다. 네이버 지도를 열어보니 백운산이다. 그러고 보니 서너 집 되는 음식점과 펜션에 백운산이 들어간 간판들이 보인다. 다시 지도를 보니 이 마을이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다. ‘여기가 마을이었구나’ 싶다. 집들이 몇 되지 않아서 풍광 좋은 곳에 장사하러 들어온 영업집들이라고만 짐작했지 마을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색이 검은 된장찌개가 오이무침, 열무김치, 가지나물, 호박나물, 마늘종 볶음과 같이 나온다. 단박에 맛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된장이 아니라 막장찌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찬이 전부 한여름 제철 반찬이다. 강원도에서는 된장이 아니라 막장으로 찌개를 끓인다. 색이 검지만, 간장을 빼지 않아 맛이 더 좋다. 된장찌개가 텁텁하고 깊고 뭉근하고 풀어진 맛이라면, 막장찌개는 맑고 얕고 선명하고 타이트한 맛이다. 은근히 밀고 올라오는 맛이 아니라 막바로 입에 달라붙는 맛이다. 된장과 고추장의 중간 어디쯤 맛이다. 이 집은 막장에 호박, 양파, 무, 두부, 매운 고추를 되는 대로 넣었다. 그래서 얕고 선명한 막장찌개 맛이 더욱 얕고 선명하다. 달근하고 시원하고 매콤하다. ‘원래는 안 되는 건데’ 맛은 아주 제대로다.


음식을 내오기 전에 안주인이 알이 잘은 포도 한 송이를 갖다 주면서 ‘밥 먹고 드시라’고 했는데, 밥을 기다리는 동안 다 먹었다. 밥을 내오면서 안주인이 ‘밥 먹고 먹으라고 했더니 다 먹었네’ 한다. 밥 전에 먹으면 안 되느냐고 물으니, 그러면 밥 맛이 없지 않으냐고 한다. 안주인 걱정과 달리 포도를 먹고도 밥을 달게 다 먹었다. 안주인이 새로 한 송이를 갖다 준다. 알이 잘은 걸 보니 마당에서 따온 듯하다. 계산을 하는데 ‘맛있게 자셨나’ 묻는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맛있는 음식은 포도도 어쩌질 못한다.


동강을 옆에 두고 달릴  있는 길은 운치리  나리소에서 끝난다. 그다음부터의 동강로는 신동읍 고성리와 예미리의 높은 , 깊은 계곡, 험한 고개를 지나 예미역으로 간다. 동강을 조망하기 위해 나리소에서 급하게 좌회전해서 동강전망자연휴양림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선다. 정상에서 보는 동강은 옆을 달리며 보는 동강과는 다른 강이다.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아주 급하고, 시멘트 포장으로 노면이 고르지 못한 데다, 180 헤어핀 턴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모터사이클을 1 기어에 두고 스로틀을 열어 RPM 충분히 올려서 올라간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존심은 어디 가지 않는다. 발을 딛지 않고 끝까지 올라가려고 타야  라인, 모터사이클의 균형, 속도와 RPM 신경을 집중한다. 집중을 하되 겁을 먹으면  된다. 험한 길에서 겁을 먹으면 패닉에 빠져서 모터사이클을 쓰러트리거나 시동을 꺼뜨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처음 왔을   길을 진땀 빼고 올라가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시동을 꺼뜨리고 넋이 나간  겨우 겨우 모터사이클을 돌려 참담하게  길을 내려갔었다. 그때 나리소 근처 도로 가에 모터사이클을 세워 놓고 3km 길을 되짚어서 걸어 올랐다. 오늘은 집중해서 발을 딛지 않고 끝까지 올라간다.


걸어서든 모터사이클이든, 정상에서 보는 동강은 옆을 달리며 보는 동강과 전혀 다른 강이다. 옆에서는 우뚝하게 솟은 검은 바위산과 절벽의 굳센 기세로 압도적인데, 정상에서는 무한대로 열리는 광활함 속을 구비지며 흘러가는 강의 유장함으로 압도적이다. 새롭게 열리는 천지고 산천이다. 하늘과 산과 땅과 강이 광활하게 하나다.  우주와 천지의 밀도가 몸속으로 밀려든다. 동시에 느슨해지는 몸과 마음이  밀도 속으로 풀려 번져 나간다.


 시선과 신경을 길에 집중하고 동강전망자연휴양림으로 올라간다. 경사가 급해 모터사이클이 뒤로 기울어진다. 기울어진 만큼 몸을 앞으로 숙여 엎드리듯 모터사이클을 감싸 안는다. 웅크린 자세로 길을 읽으면서  몸의 감각을 집중해서 균형을 잡는다. 1 기어에서도 RPM 조금 높다 싶으면 헤어핀 구간을 돌아 나가기 부담스러운 속도가 되고, 조금 낮다 싶으면 시동이 꺼질듯하다. 오르는 내내 스로틀 워크에  감각을 집중한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길이 완만해진다.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 주차장에 들어서 고개를 드니 온통 하늘이다.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주차를 하고 조망지로 간다. 하늘이 무한대로 열려 있다.  하늘 아래 하늘의 규모만큼 산과 땅이 펼쳐져 있다.  산과 , 땅과  사이를 여름 동강이 길게 길게, 구비 구비로 흘러가고 있다. 광대한 천지 산천의 정적과 긴장 속에 홀로 선다.  우주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원과 영원이 모두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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