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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Jun 06. 2024

마음 혹은 삶의 색들: 봄의 주천강과 강가 마을들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노랑, 연두, 초록은 봄의 색이다.


노랑은 환하고 가볍게 발산한다. 삼월의 강둑에 지천으로 핀 개나리꽃은 천지를 환히 밝힌다. 개나리꽃의 빛 속을 걸으면, 들뜨고 설렌다. 노랑은 자신의 색을 노골적으로 주장한다.


초록은 짙고 두텁게 포용한다. 오월의 거리에 드리운 느티나무 잎들은 세상을 넉넉하게 품어 안는다. 느티나무 너른 그늘에 앉으면, 편안하고 여유롭다. 초록은 자신의 존재를 사려 깊게 드러낸다.


연두는 산뜻하고 나긋하게 차오른다. 노랑과 초록의 틈에서 돋아나서 어느새 사월의 숲에 어른거리며 사람을 홀린다. 바람이 스치는 연두의 숲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섬세해진다. 연두는 자기 안의 충동과 분별을 들으며 제 시간을 보낸다.


연두가 초록으로 깊어져 가는 철에는 계곡길을 달리는 게 마땅하다. 분홍의 꽃이 지고 연두의 잎이 나오면, 계곡에는 온후함이 들어찬다. 가까운 산에선 초록의 바탕 위에 연둣빛이 일렁이고, 먼 산들은 초록에 초록이 포개져 짓푸름으로 두터워진다. 물은 가볍고 쉽게 흘러가고, 산 그림자 어린 투명한 소는 옥색으로 깊어진다. 봄의 계곡을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모터사이클이 사라진다.  


늦봄 하루를 주천강 가의 길과 마을들에서 보낸다. 42번 국도 새말교차로에서 출발해서 주천강을 따라 안흥, 강림, 월현, 덕초현을 거쳐 다시 안흥과 새말로 돌아 나오는 40 킬로미터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새말에서 해발 650미터 전재를 넘어 안흥에 이르는 길은 치악산 북동쪽의 깊은 산줄기들을 통과한다. 1,085 미터 매화산과 1,350 미터 백덕산 사이에 내려앉은 안흥은 이름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정경을 보여준다. 안흥, 강림, 월현을 이어 흐르는 주천강은 맑고 넉넉한 서정으로 흐르고, 산정상의 아름다운 분지 덕초현은 고립적 이상향의 풍경을 펼쳐 보인다.


전재를 넘어 돌아 안흥으로 들어선다. 저 멀리 우뚝하던 산들의 자락은 기세를 눅이며 마을들을 품는다. 양편 산록의 밭들 사이로 한가로이 주천강이 흐른다. 밭에는 어린 옥수수와 콩이 자라고, 강둑에선 미루나무가 바람결대로 설렁인다. 은청색 밀밭 위로 하늘이 푸르고, 푸른 하늘에 백로들이 유유하다. 편안하고 아름답다. 1937년 安興이 될 때까지 안흥의 이름은 實美였다.


주천강을 따라 강림과 월현 방면으로 달린다. 안흥을 벗어나 강림과 월현에 들어서자 계곡이 깊어진다. 길은 경사 급한 산면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고, 강 건너 바위 벼랑을 마주하고 나란히 달리기도 하다가, 눈앞의 산구비를 돌아 나가는 강을 따라 아득해지기도 한다. 강은 때로는 검은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때로는 하얗게 쓸리고 깎인 바위들을 전경으로 흘러간다. 강이 휘돌아 나가는 언덕에는 붉고 곧은 소나무들이 무리 지어 섰고, 은사시나무 줄지어 선 강둑에는 금계국과 애기똥풀이 지천이다. 주천은 술샘이고 월현은 달뜨는 고개인데, 술이 흐르고 달이 뜨는 여기는 선계인가.


주천강 동쪽에서 강을 굽어보는 상동산 꼭대기에 덕초현이 있다. 강림면 월현 1리 5반의 주소를 가진 오래된 마을이다. 상동산 정상부는 10만 여 평의 계곡 분지고, 계곡 좌우의 완사면을 따라 하나둘 들어선 집들이 마을을 이룬다. 마을로 통하는 계곡길을 따라 해발 650 덕새재에 올라서면 홀연히 아늑한 분지에 안긴 마을이 펼쳐진다. 마을은 늘 조용하고, 한가로운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쨍한 정적을 더할 뿐이다.


덕초현은 밖에서는 존재를 알 수 없는 곳이다. 마을을 안은 상동산이 해발 659 미터이고, 덕초현의 해발 고도는 650 미터다. 덕초현으로 들어가자면 장벽처럼 앞을 막아선 덕새재를 갈지자로 넘어야 하고, 덕새재 너머의 마을은 그 고개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2000년대 후반까지도 휴대폰이 불통이었고, 겨울에는 택시가 들어가기를 꺼렸다. 덕초현 인근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이 마을을 덕새재라고 부른다. 산봉우리들 사이에 걸친 고지대에 갈대나 억새 같은 거친 풀이 자라는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덕새재는 고개 이름이면서 마을의 이름이고, 덕새재라는 이름은 이 땅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덕새재에는 원래 30여 가구의 화전민들이 살았다. 옥수수, 감자, 콩, 메밀을 심어 먹고, 해발 650미터 산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는 생활은 고단했다. 그 화전민들은 정부의 화전 정리 사업에 따라, 또 더 나은 생활과 삶을 찾아 1970년대 말에 모두 덕새재를 떠났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이 땅은 잊히고 지워졌다. 농사를 짓는 봄 여름 가을에 들어왔다가 겨울에는 밖으로 나가는 몇몇의 사람들만이 덕새재를 찾았을 뿐이다.


이 “어둡고 조용한 “ 곳에 별을 보는 사람들이 1997년 천문인 마을을 세웠다. 천문인 마을에 모인 사람들은 ‘광해가 없는 우주와 맞닿은 곳에서 별을 보면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가슴에 간직했다. 높은 하늘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순수한 자연과 한적한 산속에서, 아름다운 산하와 함께, 별빛의 낭만을 즐기고 청정한 삶을 추구했다.’ 그 후 덕새재에는 꿈, 아름다움, 즐거움, 사랑, 그리움, 자연, 쉼, 힐링, 그리고 고요, 영혼,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덕새재와 그 인근은 현재 천문인마을, 월현포레스트(캠핑장), 안나의 정원(스테이), 별빛정원(펜션), 통나무학교(통나무집 건축 교육), 뜨래꽃마을(가톨릭 공동체 마을), 전원주택들의 단지가 되었고, 건설과 건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고단했던 땅 덕새재는 이제 아름다운 꿈과 동경의 공간이다.


고통에 시달린 사람에겐 위안이 필요하다. 아픈 사람에겐 치유가 필요하다. 외로왔던 사람에겐 공감이 필요하다. 몸을 혹사했던 사람에겐 쉼이 필요하다. 몰아쳤던 일은 잠시 중지할 필요가 있고, 불안하고 초조할 땐 차분하고 고요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힘들고 지쳤던 사람이 대안의 삶을 꿈꾸고 추구하는 건 본능에 가깝다. 지난 10여 년 동안 덕새재의 변모는 대안을 향한 오랜 꿈과 본능의 귀결로 보인다. 10여 년 동안, 덕새재를 떠나 살아가는 일에 진력했던 덕새재 사람들이 덕새재로 돌아왔고, 덕새재 밖에서 생활을 잇느라 기진했던 사람들이 덕새재로 들어왔다. 그동안 힘들고 지쳤던 사람들이 많았던지 덕새재에는 이제 빈 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덕새재 아래 주천강의 서쪽 강가에 강림리가 있다. 강림리는 강림면의 면소재지다. 강림에는 행정복지센터와 우체국이 있다. 강림초등학교와 강림중학교도 이곳에 있다. 농협과 세븐일레븐, 공인중개사사무소와 중기회사, 전기차충전소와 문화체육관도 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사람들 간의 노력을 조직하는 일, 인성과 역량의 계발을 통해 세계와 미래를 주도할 인재를 키워내는 일, 돈을 만들고 만든 돈으로 소비를 하는 일, 땅을 거래하고 거래한 땅에 건설을 하는 일, 문명을 누리고 문화를 즐기는 일이 모두 강림에서 이루어진다. 주천강 서쪽 강가에서 조직하고 키워내고 벌고 소비하고 거래하고 건설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거나 너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저 그렇게 해나갈 뿐이다.


주천강의 동쪽 강가에 덕새재가 있고, 서쪽 강가에 강림이 있다. 동쪽 강가의 사람들은 별을 보고, 기도하고, 쉬면서 꿈과 아름다움, 사랑과 영혼, 고요와 자기 자신을 추구한다. 서쪽 강가의 사람들은 벌고 쓰고 조직하고 키우면서 그런 일상으로 생활과 삶을 만들어 간다. 늦봄의 하루를 주천강에서 보내니 알겠다. 살아간다는 건 강림과 덕새재 사이 어디쯤을 흘러가는 일이 아닐까.  덕새재와 강림 사이 주천강 가를 서성이는 일을 그만두는 건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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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은 나무를 가로질러 놓은 장대나 나무를 엮어 만든 발판 같은 대(臺)를 뜻한다 (YTN, 2015. 12. 18.)

   ‘새’는 말, 띠, 억새 등 볏과의 식물을 뜻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아래와 같은 글과 자료를 참고했다.


- 건설감리잡지 (2006년 7월)


- Senior 조선 (2014. 7. 24.)


- 천문인마을 홈페이지 “천문인마을 소개”


- 대한민국 구석구석 “천문인마을” (한국관광공사 국내여행 정보 서비스)


- 월현포레스트 홈페이지 “캠핑장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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