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리는 감각의 공간이다. 두 가지 감각이 겹쳐지고 합쳐지는 곳이다. 상반된 감각과 정서로 통하는 관문 같은 장소고, 감각들이 통합해서 깊어지는 장이다.
아침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강원도로 나갈 때, 팔당댐 옆 봉안터널을 빠져나가 만나는 양수리는 가득한 빛으로 환하다. 남한강 푸른 물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아침 햇빛으로 수면은 은가루처럼 반짝인다. 두물머리 느티나무는 봄에는 연두로, 가을에는 노랑으로 선명하고 강렬하다. 강의 양쪽으로는 푸른 산들이 상류를 향해 연달아 멀어져 간다. 아침의 양수리는 빛나고, 새롭고, 다채롭고, 경쾌하다.
환하고 경쾌한 양수리의 아침은 감각을 깨운다. 감각이 밖으로 열려서 외부의 대상들에 연결된다. 푸른 강, 눈부신 수면, 일렁이는 나무들과 크게 물결 진 능선들의 색과 빛과 율동이 열린 감각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빛나고 생동하는 것들로 가득해서 마음이 들뜨고 흥겨워진다.
라이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의 양수리는 차분하다. 빛이 사위고, 색들은 무채색의 계조가 되고, 율동도 진정된다. 푸른 강이 어두워진다. 수면은 검어진다. 나무들과 산들의 율동은 다만 묵직한 정적의 있음이 된다.
조용하게 낮아진 양수리 저녁 풍경은 일어섰던 감각을 정돈한다. 외부로 열렸던 감각이 내면을 향하고, 잦아든 감각은 자아와 연결된다. 들뜨고 흥겨웠던 마음은 깊고 고요해진다.
귀로의 양수리 풍경은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 양서초등학교 앞에서 시작된다. 강 건너편은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의 수청나루다. 여기서부터 양수리 두물머리까지 8 킬로미터의 강은 남한강 최하류의 마지막 구간이다.
이곳에선 강이 천천히, 길고 깊게 흐른다. 급한 굽이짐이 없어 대체로 넓고 곧게 흐른다. 산들은 강에서 물러나 앉은 채 완만한 경사로 중첩되면서 하류를 향해 소실되어 간다. 그 강을 따라, 강과 산이 만나는 경계선을 따라, 6번 국도가 길게 이어진다.
강원도와 경기도 양평의 산과 들을 달리던 6번 국도는 양서초등학교 앞에서 부드럽게 우회전하며 넓은 강을 만난다. 저녁에 이 강을 따라가서 만나는 양수리는 아침에 나올 때 만난 양수리와는 반대다. 아침에 강원도로 향할 때 양수리는 팔당 1 터널, 2 터널, 3 터널, 4 터널, 봉안터널을 거친다. 연이은 다섯 개의 좁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느닷없이 환하고 밝은 세계가 열린다. 좁은 통로의 끝에서 물과 빛의 새 세상이 개벽하듯 펼쳐진다.
라이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6번 국도 위의 양수리는 멀리서부터 시야에 잡힌다. 길은 아득한 곳의 양수리를 향해 여유로운 시퀀스로 접근해 간다. 시퀀스의 진행에 따라 시야는 점점 확장되고, 양수리에 이르면 이윽고 완전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양서초등학교부터 용담대교 초입까지 3 킬로미터는 남한강과 한강 하류의 자동차길 중에서 가장 강에 가깝게 붙어 달리는 길이다. 길의 왼쪽이 바로 강이고, 수면의 조금 위가 노면이다. 이 길을 저물녘의 속도로 달리면, 남한강 하류의 풍경이 넉넉하고 편안하다. 드넓은 강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잔물결 이는 수면은 저무는 햇빛으로 부드럽다. 강 건너로는 어두워가는 하늘 밑으로 산그림자가 짙어지고, 강을 따라 난 길가에는 나무들의 자취가 희미해진다.
용담대교에 올라서면 발 아래가 물이다. 물 위를 나직하게 달린다. 들뜬 긴장과 기쁨으로 하루를 달렸던 마음도 나직하게, 느긋하게 풀어진다. 이때쯤 두물머리 너머로는 운길산, 예봉산, 검단산이 석양을 받는다. 높은 봉우리들과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들에 그늘이 든다. 산의 실체가 산그림자가 되고, 앞선 산과 뒤의 산이 농담을 달리 한 산그늘로 겹쳐진다. 일몰이 임박하고, 양수리가 가까워진다. 조용히 미동도 없이 달린다.
양수리에서 석양이 일몰로 바뀌면 희미한 감빛에 쌓였던 산들이 검은색, 암회색, 회색의 그림자들로 멀어져 간다. 실핏줄 선명한 가지들로 능선에 섰던 나무들도 마침내 사라진다. 색과 디테일이 사라지고, 입체는 평면이 된다. 어두운 강 위에 어두운 산의 그림자가, 어두운 산 그림자 뒤에 덜 어두운 산 그림자가, 덜 어두운 산 그림자 뒤에 흐릿한 산 그림자가 실루엣으로 겹쳐지며 어두운 하늘에 섞인다. 어두운 풍경이 어두운 하늘과 하나가 되면, 세상은 커다랗게 비워진 어둠과 단순과 고요가 된다. 그 고요 속에서 자아의 감각이 선명해진다.
일몰의 양수리는 반짝이는 순간들의 하루 라이딩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완벽하다. 연두색 설레임 가득한 봄의 의암호, 싯푸른 힘으로 가득한 여름의 평창과 정선, 옥색 계곡과 붉은 단풍이 천지를 홀리는 가을의 설악산과 오대산, 그곳의 빛나는 순간들은 일몰의 양수리에서 자아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쌓인다. 그렇게 쌓인 자리 위에 저녁 양수리의 고요가 내린다.
양수리의 깊고 고요한 어둠 속을 달릴 때, 모터사이클의 속도감은 사라진다. 세상의 역동성, 사소한 움직임, 변화, 입체, 색, 다양성, 소리도 사라진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단순해진다. 삼차원의 디테일이 사라지고 세상은 농담과 윤곽과 평면의 이차원으로 재구성된다.
커다란 어둠의 평면 속을 작은 점으로 달린다. 사방이 아득하게 깊어지고, 자아로 향한 감각은 섬세해진다. 일깨워진 자아는 모순된 감각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미 어두운데, 무섭지 않고 무겁지 않다. 다정하고 아늑하다. 이차원의 공간인데, 얕고 빈약하지 않다. 넓고 깊고 무한하다. 작은 점 같은 자아지만, 왜소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온전하고 충만하다. 고적하지만, 외롭지도 않다. 비워진 공간이지만, 공허하지 않다. 흑백이지만, 단조롭지 않다. 디테일이 없지만, 모호하지 않다. 고요하지만, 고립과 체념이 아니다. 깊은 고요의 양수리에서 무한한 공간과 자아는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된 자아는 생생한 긴장으로 팽팽하다.
양수리는 두 물이 합수하는 곳이다. 강원도의 산과 들과 강을 달리면서 빛과 색을 받아들인 자아도 일몰의 양수리에서 단순과 고요 속의 자아와 하나가 된다. 단순과 고요의 자아가 빛과 색의 자아를 지우지 않는다. 화진포 호수의 평화, 한계령 설악산의 장엄함, 미산계곡의 아름다움, 동강의 경이로움, 송정 솔숲의 리듬과 파도 소리는 양수리의 고요 속에서 깊어진다. 일몰의 양수리에서 깊은 고요를 보면, 강원도의 빛나는 순간들은 더 찬란해진다.
양수리에서 합쳐져서 크고, 넓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물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