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정면으로 긍정하기 힘들 때, 목적하는 바들을 명확하게 분간하는 일이 어려울 때, 횡성이라는 곳에 가게 된다. 의암호의 서정, 갑둔리의 정적, 화진포의 평화, 송정 솔숲의 낭만, 정선의 은둔 욕망이 생활의 의무를 넘어설 수 없을 때, 횡성에 간다. 먼 길 위에서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은지, 굽이치는 고갯길을 너울거리며 넘어가고 싶은지, 외딴 곳에서 충만해오는 자아를 느껴보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도 횡성에 간다. 타협된 욕망, 어수선한 목적의 현실이 횡성이다.
그곳은 서울 남동쪽 100km 거리에 있다. 서울을 벗어나 구리나 덕소에서 6번 국도를 타고, 그 길을 천천히 달리면 두 시간 안에 도착한다. 길을 갈아탈 필요 없이 그냥 가다 보면 닿는다. 가는 길에 만나는 가장 높은 고개는 해발고도 300m의 도둑머리고개다. 인구는 2만여 명이다. 그곳에는 랜드마크가 없다. 깎아지른 절벽, 불타는 단풍, 위세 있는 고택, 높은 빌딩 같은 것들이 없고, 샹그릴라 같은 낭만적 고립조차 없다. 횡성은 캐릭터를 드러내지 않는 장소로 보인다.
서울 사람들 마음의 거리로는 횡성이 멀고 외진 곳인 듯하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먼 곳으로 생각하고, 가본 사람들도 꽤 먼 곳으로 느낀다. 깊은 산, 높은 고개, 메밀 전과 찰옥수수, 한우와 더덕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마음의 거리와 상상 속에서 100km의 거리와 300m의 도둑머리고개는 사실보다 멀고 높아진다.
사실보다 먼 거리와 실제보다 높은 고개의 체감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달려서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갈 수 없을 때, 달려서 얻고 싶은 게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 수 없어 심사가 복잡할 때, 결심 없이 나서도 한 라이딩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덕소부터 양평까지 한강길의 넉넉함, 양평부터 용두교차로까지 속도의 맹렬함, 용두교차로부터 횡성까지의 고적함, 횡성에서의 그 무심한 자아를 경험하는 한나절은 실제가 아닌 마음 속 거리만큼의 여정에 더 가깝다.
횡성 사람들은 말을 무던하게 한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고 산 사람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날카롭고 거친 말들을 잘 쓰지 않는다. 경음이나 격음 섞인 말들이 많지 않다. 산비탈을 산비얄이라고 하고, 비탈밭은 비얄밭이라고 한다. 버들치를 버들개라고 하고, 개천은 개울이라고 한다. 분을 참지 못하고 욕을 할 때조차 ‘에이 마할 놈‘이라고 한다. 쌍시옷이나 쌍기역이 들어간 욕을 하는 사람을 보기는 드물다. 사람이 죽었음을 전할 때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거나 ‘그 사람이 틀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횡성에는 장칼국수라는 음식이 있다. 횡성의 말처럼 맛도 모양도 무던하고 조용하다. 고추장, 매운 고추, 해물로 통쾌하고 짜릿한 맛을 내는 속초와 강릉의 장칼국수 맛과 반대다. 횡성의 장칼국수는 검은 막장을 풀어 국물을 끓인다. 면은 반죽을 얇게 밀어서 납작하고 가늘게 썰어 넣는다. 주된 채소로는 연한 아욱의 잎과 순을 잘라 넣는다. 아욱 외에 되는 대로 약간의 감자를 채 썰어 넣거나 조금의 부추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고추는 풋고추가 아니라 장아찌로 삭힌 것을 잘게 다져 양념해서 고명으로 얹는다. 이렇게 끓여낸 국수의 모양은 검고 수수해서 보잘것이 없다.
그 국수를 먹으면 어떤 선명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쫄깃함 없는 면발은 후두둑후두둑 끊어진다. 그저 순하고 나직한 것들이 뭉근하게 섞인 맛이고, 그래서 배불리 먹어도 속이 편하다. 먹고 나서는 털고 일어서는 후련함보다 흡족감에 뒤를 돌아보는 잔잔함이 남는다. 횡성의 장칼국수에는 음식을 하는 사람의 주장과 생각보다 일상의 존재와 생활이 담기는 것 같다.
아욱은 여름에 먹는 채소다. 횡성에서는 봄에 씨를 뿌려서 6, 7, 8월에 주로 먹고, 초가을까지 먹기도 한다. 대개 장칼국수에 넣어 먹거나 아욱된장국으로 먹는다. 데친 나물이나 생나물로는 잘 먹지 않는다. 아욱은 밭 가득 키우지 않고 집에 가까운 밭 가장자리에, 텃밭과 바깥 마당의 경계쯤에 한 식구들이 한 철 먹을 만큼만 놓아 두고 먹는다. 상추처럼 살성이 아주 부드러운 채소인데, 먹을 때는 그중에서도 특히 보드라운 잎과 순을 골라서 끓여 먹는다. 아욱된장국을 아는 사람들은 설핏 끓여낸 국보다 오래 달여낸 맛을 좋아한다. 된장 국물에 달인 아욱 맛이 달고 깊기 때문이다.
횡성으로 가는 라이딩은 만만하고 편안하다. 새벽같이 나갔다가 밤이 늦어야 돌아오는 여정이 아니다. 미시령이나 한계령 같이 장쾌하고 아찔한 고개를 넘지도 않는다. 시간에 쫓겨 신경을 곤두 세운 채 바람을 가르며 달릴 일도 없다. 날카롭게 타거나 독하게 탈 필요가 없다. 목적지인 듯 경유지인 듯 채비 없이 나서서 나들이하듯 다녀오면 적당하다.
생각해 보면, 그곳이 마냥 무던할 수만은 없다. 횡성 사람들이라고 욕망이나 소망이 없을 리 없고, 울분과 슬픔도 없을 수가 없다. 귀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즐거움의 욕구,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위세가 드러나는 집을 갖고 싶은 욕망, 랜드마크가 없는 땅에 랜드마크를 세우려는 집단적 자존심, 소외된 위치와 좌절된 절박함이 낳는 분노, 소망과 좌절 사이의 공간에 처한 자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슬픔, 슬픔의 매일을 살아가는 일의 눈물겨움, 이 모든 것들이 그곳 사람들만 피해 갔을 리가 없다.
욕망과 소망, 좌절과 울분, 슬픔과 눈물이 비껴가지 않았을 횡성이 별반 모난 데가 없다는 사실에는 깊은 비밀이 있는 듯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욕망과 소망을 터트리지 않고 삭이는 것 같다. 좌절과 울분에 소리를 지르는 대신 한숨 한 번 쉬고 눅이는 것 같다. 슬픔과 눈물에 저항하는 대신 그 속으로 투항하는 것 같다. 고통을 밖으로 앓지 않고 안으로 앓는 것 같다. 불가피한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체념인지 지긋한 용기인지는 아직 분별할 수 없다.
아무렇게나 끓인 것 같은 장칼국수를 앞에 두고는 생각하게 된다. 에고를 드러내지 않는 이 장소의 자존은 무엇일까. 낮고 조용한 국물, 툭툭 끊어지는 면, 식감을 죽인 아욱잎으로 끓인 장칼국수 한 그릇을 비우며 또 생각한다. 선명한 자의식 없이 생활 현실의 묵묵한 긍정으로만 쌓여가는 삶에도 존엄이 주어질까. 겸손한 존엄이나마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