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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15. 2019

비자림을 걷다, 산도(産道)를 걷다

    

          

모두를 비워내고 싶을 때가 있다. 흔적도 없이 개어 내고 싶을 때가 있다. 태어났으므로 살아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아침 해를 맞이하는 일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외에는 지금의 나를 새롭게 할 길이 없을 때, 나는 산으로 간다.


함부로 들어오려는 도시의 소음들과 나는 허용한 적 없는 무참한 장면들이 무방비상태인 나에게 시비를 걸어올 때, 귀를 닫고 눈을 감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은 나의 무능감을 확인시켜줄 뿐 어떤 방어도 되지 않는다. 덜 자극적인 소리와 덜 자극적인 영상으로 옮겨보기는 하지만 물리적인 공간이 주는 긴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럴 때, 나는 산으로 간다.


산을 걷다 보면 나는 어느새 길이 되어 있고, 산길의 풀이 되어 있고, 그 풀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는 바람이 되어 있고, 하늘을 흐르는 구름이 되어 있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개울물이 되어 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에 답을 해주는 일조차 내 의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 같아서 잠자코 그들의 지저귐을 듣고만 있다.


한없이 자유로워지고 또 한없이 겸손하게 해 주는 숲속에서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찾곤 한다. 아마도 인위와 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원초의 나를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기에 그러하리라. 지구의 역사가 숲에 숨어 있다. 그 꿈틀거림이 나를 부를 때, 나는 산으로 간다.     


몇 해 전, 누구를 탓하기는 싫으나 그렇다고 애를 쓰고 살아온 나를 탓하는 일은 더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곁에 있는 산을 두고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갔다. 그곳에는 그렇게 걷기 좋은 길이 많다는데,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비교적 덜 닿은 숲들도 있다는데, 이름 모를 오름들과 한라산 어느 메쯤이어도 좋다는 생각에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제주 공항에 내렸다. 불어오는 바람의 푸근함을 기억한다. 어느 길, 어느 숲에서라도 나를 반겨줄 것이라는 착각에, 마치 긴 하루를 보내고 어린 시절 집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의 편안한 느낌으로 바라보았던 그 하늘과 그 바람이 생생하다.


더는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던 산굼부리에서 하늘도 그리 높은 곳에 있지 않구나, 그렇다고 땅도 그리 깊은 곳에 있지 않구나 하는 위태로움을 느끼고 향했던 곳이 비자림이었다. 관광객들이 떠나간 자리, 원시로 이어질 것만 같은 산도(産道) 같은 길을 거슬러 오르면서 몸과 마음을 죄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벗어냈다.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그 길을 딛고 아직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뺨을 흘러내리던 무엇의 뜨거움을 기억한다. 몸에 마치 심장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던 대지의 온기, 천년을 건너온 바람, 생명의 내음, 인류는 밝혀낼 수 없는 어느 생명체의 지저귐, 내가 녹아 흙이 되고 바람이 될 것만 같던 그 순간이 결코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새로운 탄생임을 알 수 있었다.


여름에도 덥지 않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비자림은 그 고요와 직접 투사하지 않는 햇살로 인하여 신비하게 느껴졌고, 그 신비가 현실의 많은 의미와 의무의 담장을 허물어주었다. 비자림 안에서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졌다.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를 훨씬 더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냥 그러한 것, 그대로 그러한 것, 스스로 그러한 것, 대단한 것처럼 숭앙받는 자유의지마저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만들어버리는 대자연의 어울림이 울려 퍼지는 그 숲, 비자림이 좋았다.


나의 걸음은 땅 아래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닿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내 흔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인지 내 존재가 저 아래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맨발로 걸음 하는 곳곳에서는 온기로써 나의 역사를 안아주었다. 대지가 미약한 내 존재를 품어주었다. 손가락 하나만 걸어도 그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오는 것처럼, 발바닥의 면적만큼이니 아주 작은 면이지만, 나의 전생과 내 조상의 생들까지도 모두 토닥여주며 멀고 험한 길을 잘 걸어온 것에 대한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촉촉하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대지를 밟으며 산도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지만, 두세 걸음만 걸어도 이내 나의 흔적은 사라질 만큼 땅은 탄력적이었다. 나의 체온은 그 숲의 무엇도 바꿀 수 없었고, 나무와 대지가 뿜어내는 향내로 나의 체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이 공간에 영향을 미칠지 미치지 못할지는, 나의 흔적을 남길지 남기지 않을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를 거부하지 않는 숲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듯하다.


비자림은 숲이라는 공간만으로는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없는 곳이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 있는 곳, 비자림을 걷는 것은 공간을 걷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걷는 것이기도 하다. 그 거대한 자연 앞에서 섭리와 순리와 우주를 배운다. 현실의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문제들이 존재를 뒤흔들 크게 느껴져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연은 나를 밀어내지 않는데, 나는 나를 얼마나 밀어내려 하며 살아왔는가. 나는 나의 역사를 얼마나 부정하며 살아왔는가. 내가 속한 사회를 거부해왔는가. 비자림이 가르쳐준 흔들림 없음과 자유와 그 온기를 품고 집으로와서 행복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작은 행복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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