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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15. 2019

우리 다음에는 조금 더 오래 걷자

걷고 걸어도 손가락 거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 다음에는 좀 더 오래 걷자

처음에는 멀리 하늘 보다가
바람이 차가웁다 이야기도 나누고
나뭇잎 떨어지면 내려앉는 곳
길고양이 숨어드는 곳
앞서가는 아가씨 설레어 흐르는 머리칼도 보면서

걷다가 걷다가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어지면
가만한 우리 숨소리에 귀 기울이고
닿을 듯 말 듯 우리 사이 가까워지면
스치는 옷깃 잠시의 온기에 또 귀 기울이고

걷고 걸어도
우리 손가락 거는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그때쯤엔 부딪히는 우리 어깨
내가 너에게 기대는 것인지
네가 나에게 기대 오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게 되면
나는 그걸로도 좋겠네

우리 다음에는 조금 더 오래 걸으며
어색함이 흘러가 머무는 곳을 보자

너의 눈 속에 머물 곳이 없으면
스치는 너의 옷깃에 깃들어 있을게
다정한 네 옷깃에도 머물지 못하면
길고 긴 너의 손가락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을게

걷기만 하자
나랑 너랑 나란히 걷기만 하자
가을이 익어가면 우리
손가락은 걸지 못해도
어깨 나란히 하고
우리 사이에 온기가 머물 만큼만
딱 고만큼의 거리에서
조금 더 오래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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